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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Avignon) 역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서면 아비뇽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성벽과 성문을 만나게 된다. 나는 육중한 성문을 지나 도시 자체가 열린 박물관이라는 아비뇽의 시내로 들어갔다.

시계탑 광장까지 이어지는 중심도로, 레퓌블리크 거리(Rue de la République) 변에는 여행자들과 아비뇽 시민들이 한가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길을 걷다 보니 성당이나 관공서 건물 같아 보이는, 정성을 들여 만들어진 한 건축물이 눈길을 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건물 이름이 '아비뇽 라피데르 박물관(Musée Lapidaire d'Avignon)'이라고 적혀 있다. 박물관 안에 들어가 받아본 팸플릿에는 이 박물관이 프랑스 남동부를 대표하는 고고학 박물관이라고 되어 있다.
 
프랑스 남동부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고고학 박물관이다.
▲ 라피데르 박물관. 프랑스 남동부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고고학 박물관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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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라피데르 박물관은 본래 칼베 미술관(Musée Calvet)의 소장품 중에서 로마 시대와 중세의 조각품을 전시할 목적으로 만든 훌륭한 박물관이다. 아비뇽 교황청과 생베네제교(Le Pont Saint Bénézet)만 알고 있던 나에게 이 고고학 박물관은 큰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곳이었다.

박물관 외관은 전세계 가톨릭 예수회 소속 성당 건물들과 똑같이 생겼다. 박물관 외부 파사드가 예수회 소속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예수회의 선교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 신대륙에 세워진 성당들은 대부분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다.

1933년 설립된 이 박물관은 레퓌블리크 거리에 있던 예수회 소속의 예배당을 개조해서 전시공간을 만들었다. 원래 예배당 건물이었기 때문에 건물 전면부의 파사드와 함께 높은 천장, 육중한 기둥들이 옛 모습 그대로 멋있게 남아 있다.
 
예배당을 개조한 이 박물관은 파사드와 높은 천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 라피데르 박물관 내부. 예배당을 개조한 이 박물관은 파사드와 높은 천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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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층형 파사드의 맨 위에는 십자가가 있고, 그 아래에 삼각형 지붕이 이어진다. 그리고 지붕 양 옆으로 내려오는 곡선과 부드러운 창문의 곡선이 아름답다.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전형적인 바로크 스타일의 건물인 것이다.

파사드를 자세히 보면 창문 혹은 성상의 자리처럼 흔적을 만들어놓고 내부 조각품은 비어 있는 공간이 있다. 묘한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예술작품의 한 수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고 수준의 바로크 건축물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건물이다.

나는 박물관에서 나누어주는 팸플릿을 급히 읽으면서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박물관 내부는 거칠 것 없이 시원하게 트여 있었다. 대부분 돌로 만들어진 조각품들은 박물관의 벽면을 중심으로 모여 있고, 박물관 중앙은 큰 홀로 넓게 개방되어 있다.

박물관 입구의 관리인은 할아버지 두 분인데 참으로 친절하다. 박물관 내부까지 들어오는 외국 여행자들이 거의 없기 때문인지 관람하는 방향도 알려주고, 박물관의 대표적인 유물이 어디에 있는지도 정성스럽게 알려준다.
 
라피데르 박물관에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시대의 석조 유물들이 풍부하다.
▲ 석조 유물의 보고. 라피데르 박물관에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시대의 석조 유물들이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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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 세공을 뜻하는 '라피데르(Lapidaire)'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박물관답게 돌로 만들어진 섬세한 조각 작품들이 박물관의 전시공간 안에 풍부하게 소장되어 있다. 특히 아비뇽 선사시대의 유물, 고대 이탈리아 에트루리아(Etruria)의 고고학 유물들은 지역과 시대별로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다.

로마시대의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를 뜻하는 골(Gaule) 지역에서 나온 조각품도 볼 수 있다. 작은 청동상, 유리 제품, 금 장신구, 테라코타 등잔 등 갈로 로마시대의 유물도 별도로 진열돼 있다. 이 갈로 로마시대의 유물은 19세기 보클뤼즈(Vaucluse) 지역에서 칼베(Calvet) 재단이 집중적으로 발굴한 유물들이다.

교회 중앙부의 오른쪽에는 고대 이집트의 조각품까지 전시되어 있고, 이집트에서 뜯어온 무덤의 벽면까지 전시되어 있다. 남의 나라에 가서 마치 채집하여 오듯이 가져온 무덤 유물들을 큰 박물관 안에서 버젓이 전시하고 있는 이 사람들의 배짱도 놀랍기만 하다.

이집트 채색 벽화, 파라오상과 함께 파라오를 모시던 신하의 초상화에서는 이집트 미술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특히 이집트에서 죽음의 의식과 관련하여 사용하던 유물들이 주목을 끈다. 석관, 무덤 장식품, 묘비, 제사상(祭祀床), 관 속에 넣은 인형(ushabti) 등이 전시 중이다.

특히 미라를 만들 때 쓰던 카노푸스 단지(Canopic jars)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믿었던 부활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시신을 썩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일찍부터 미라를 만들었다.

그들은 미라를 만들면서 끄집어낸 허파, 간, 창자, 위장을 분류하여 각각 네 개의 용기에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이들을 카노푸스 단지라고 불렀다.

카노푸스 단지는 이집트의 가장 위대한 신인 호르스(Horus)의 네 아들을 상징하는 송골매, 비비 원숭이, 자칼, 사람 얼굴이 뚜껑에 장식되어 있다. 이 박물관에서도 단지의 뚜껑 위에 동물이나 사람 얼굴이 장식된 항아리에는 이집트 인들의 내장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 박물관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조각품들은 바로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다. 신들이 그려진 물병,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그릇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는데, 박물관 입구 왼쪽에는 고대 그리스의 꽃병과 항아리 등이 집중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놀랍게도 그리스의 항아리들은 저 멀리 그리스의 아테네 등에서 온 작품들이다. 자세히 보고 있으면 항아리를 만들 때 사용된 기술도 다르고 용도도 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테나 여신이 범접하기 어려운 자태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 암포라. 아테나 여신이 범접하기 어려운 자태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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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몸통이 불룩한 검은색 바탕의 긴 항아리 암포라(amphora)가 인상적이다. 이 암포라들은 시신을 매장할 때 넣기 위해 특별히 제조되어 함께 묻힌 것들이다. 한 암포라에는 아테나 여신이 범접하기 어려운 자태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창을 들고 무장한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승리의 여신 니케를 동반하고 아테네의 수호신임을 당당하게 과시하고 있다.

역사가 스민 수많은 그리스의 석조유물들이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높은 천장 아래, 옛 돌에 새겨진 신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다양한 표정의 신의 얼굴을 보면서 산책하듯이 돌아보는 기분이 참으로 상쾌했다. 돌 위에 새겨진 독해하기도 힘든 문자들은 묘한 궁금증들을 자아내며 나를 신비의 그리스 세계로 이끌었다.

나는 예상치 않았던 대형 박물관의 수천 년 전 석조상들을 보면서 적잖이 놀랐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신의 눈길을 느끼며 고고학박물관 밖으로 나왔다. 나는 나의 발길을 붙잡는 훌륭한 여정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다시 길을 나섰다.

나는 아비뇽 구시가의 중심, 시계탑 광장이라는 뜻의 오를로쥬 광장(Place de l'horloge)을 향해서 걸었다. 광장을 가는 중에 만나는 도심의 샘물들은 프로방스의 더위를 식혀 주고 있었다. 광장에 거의 다다르니 길 건너편에는 아이스크림 가게들이 성업 중이었다. 계절을 불문하고 많은 여행객들이 찾아 드는 명소들이다.

오를로쥬 광장 왼편에는 아비뇽 시청사와 오페라 극장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다. 시청사뿐만 아니라 오페라 극장까지 건축물 자체가 화려하기 그지없다. 오페라 극장 앞에는 시민들과 여행자들로 붐비는 노천카페와 유명한 식당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시민들을 보고 있으니 아비뇽의 활기가 느껴진다. 광장 옆으로는 예쁜 가게들이 들어찬 작은 골목들이 이어진다.
 
프랑스 사람들이 아끼는 놀이문화 회전목마는 프랑스 도시마다 자리잡고 있다.
▲ 회전목마. 프랑스 사람들이 아끼는 놀이문화 회전목마는 프랑스 도시마다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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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가 가득 찬 이 광장에서 가장 이색적인 모습은 광장 가운데에 자리한 회전목마이다. 무려 19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명한 회전목마이다. 프랑스 어느 도시를 가나 도심에는 회전목마들이 있는데 놀이기구도 전통을 지키는 것인지 프랑스 사람들은 회전목마를 진심으로 즐기는 것 같다.

나는 아비뇽의 구시가를 즐기며 계속 천천히 이동했다. 내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곳은 아비뇽 다리라고 불리는 '생베네제교(Le Pont Saint Bénézet)'. 다리까지 가는 골목길들이 정겹기만 하다. 나는 여러 상점에서 파는 프로방스 지방의 기념품들을 둘러보며 골목길을 걸었다. 오래되고 불편해 보이지만 누추하지 않고 전통의 향기가 느껴지는 골목길들이다.

생베네제교 앞의 골목에 도착하니 골목길에서 진한 향기가 났다. 기념품 가게마다 팔고 있는, 프로방스 특산의 라벤더에서 퍼지는 향기로운 향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라벤더로 만든 비누에서 퍼지는 향기였다. 프로방스에 자리한 아비뇽 남쪽의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생산한 비누가 유명세를 치르며 팔려나가고 있었다.
 
다리의 절반만 남아있지만 그 안에 수많은 역사가 숨어 있다.
▲ 생베네제 다리. 다리의 절반만 남아있지만 그 안에 수많은 역사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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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서 직접 만나게 된 생베네제교는 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는 다리이다. 12세기에 양치기소년 베네제가 신의 계시를 받고 하나하나 돌을 쌓아 920m의 길이를 연결한 전설의 다리이다. 베네제가 거대한 바위를 들어서 옮기는 종교적 기적을 보여주자 아비뇽 시민들이 다리 건설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신화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다리는 정말 얼토당토 않은 다리 모습을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동요가 만들어진 석조 아치교인데, 다리 중간이 댕강 무너진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베네제교는 1226년, 루이 8세가 아비뇽에 쳐들어온 전투 때 다리의 4분의 3이 파괴되었다. 그 후 로마식 교각으로 겨우 재건하였으나 17세기 초에 다리의 아치 4개가 홍수 등으로 인해 또 무너지고 지금은 4개의 교각만이 남아 있다.

생베네제교는 프랑스에서 워낙 유명한 다리여서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나는 다리 입장료를 지불하고 다리 위의 교각 위로 들어섰다. 교각 끝으로 가다 보니 다리 중앙에 한 예배당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묘하게도 다리 한 가운데에 예배당을 지어 놓은 것이다.

나는 예배당 창살 사이로 코를 집어넣고 예배당을 둘러보던 프랑스 아가씨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다리 위에 예배당을 만들어 놓았네요. 이 예배당은 무슨 예배당인가요?"
"생베네제를 기리는 생베네제 예배당이예요. 생베네제 예배당은 바로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는 생베네제의 무덤이 있던 곳입니다."

"1669년 홍수로 다리가 무너질 때 이 예배당 자리에 있던 생베네제의 관도 떠내려갔어요. 아비뇽 시민들이 그의 관을 열자 그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생베네제가 성인으로 추대되었다는 이야기겠지요?"
"네 그는 성인이 되었고, 그의 관은 생디디에 성당(St. Didier Cathedral)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손을 맞잡고 둥글게 원을 만드는 춤을 추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 아비뇽 다리 위에서. 손을 맞잡고 둥글게 원을 만드는 춤을 추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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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리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 다리 위에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에서 가장 유명한 한 노래의 악보도 전시되어 있었다. 프랑스 민요인 '아비뇽 다리 위에서(Sur le Pont d'Avignon)'의 악보이다. 행사 때 손을 맞잡고 둥글게 원을 만들어 춤을 추거나, 한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프랑스인들이라면 어린 시절에 누구나 불렀던 노래이니 프랑스인들의 향수를 강하게 자극하는 노래이다.

다리가 끊어진 곳에 앉아 바로 밑을 흐르는 론 강(Rhône River)을 바라보았다. 보수 비용 문제로 지금까지 이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마치 '스카이워크(Skywalk)'처럼 강물을 직접 내려다보는 묘한 운치가 있다. 맑게 웃고 있는 프랑스 아가씨들에게 내 얼굴이 담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프랑스 젊은 여인들의 밝은 웃음이 론 강과 잘 어울렸다.
 
절벽 위에 자리한, 아비뇽 최고의 전망대이다.
▲ 아비뇽 다리에서 본 로쉐 데 돔. 절벽 위에 자리한, 아비뇽 최고의 전망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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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리에서 나와 성벽으로 이어진 오르막길을 올랐다. 수많은 계단이 한 지점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길이라 길이 연결되는지 살짝 걱정되었지만 성벽 계단을 이어주는 연결구간의 자물쇠가 다행히 열려 있었다.
 
절벽 위에 자리한 꽤 큰 연못이 여행객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 공원의 연못. 절벽 위에 자리한 꽤 큰 연못이 여행객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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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의 전망이 시원스런 아비뇽 최고의 전망대, 로쉐 데 돔(Rocher des Doms) 공원. 공원 안에는 아기자기한 작은 연못도 있고 인공 동굴도 있다. 공원의 정상에서 보니 아비뇽 구시가와 론 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비뇽의 붉은색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럽다. 생베네제교도 이 공원에서 멀리 바라보는 전망이 훨씬 더 훌륭하게 다가왔다.
 
공원의 정상에서 보면 론 강의 강줄기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 론 강. 공원의 정상에서 보면 론 강의 강줄기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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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전망대에는 프로방스 각 지역들의 거리가 표시된 이정표가 있었다. 이정표는 푸른 론 강 너머 저곳에 보이는 지역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음이 평안해지는 넓은 평야가 강 뒤로 펼쳐지고 있었다. 저 너머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태그:#프랑스, #프랑스여행, #아비뇽, #라피데르 박물관, #생베네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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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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