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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 자리 잡은 궁전 앞쪽으로 나가자 8백 헥터, 우리 개념으로 약 640만 평에 이르는 베르사유 정원(Jardins de Versailles)이 지평선 저 끝까지 펼쳐지고 있었다. 웅장함과 기하학적인 정형성은 보는 이의 눈을 황홀케 한다. 이곳을 찾았던 루이 14세 시대의 귀족들도 그랬을까?
 
베르사유 정원
 베르사유 정원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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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심겨진 나무만 20만 그루라고 한다. 또 매년 이곳에 심는 꽃나무만 21만 그루이고, 정원에 설치한 크고 작은 분수가 50개, 물분사기는 620개에 달한다고 책자에 쓰여 있다. 아빠가 정원 저쪽을 손으로 가리키셨다.
 
"저기 보이는 저 물 말이다."
"호수?"
"아니, 대운하(Le Grand Canal). 여기선 잘 안 보이는데 총길이 5.57㎞에 달한다는 저 운하의 가운데 부분에 좌우로 뻗은 운하가 또 있다."
"십자 형태인가요?"

"그렇지. 루이 14세가 '작은 베니스(Petite Venise)'로 만들었다는 운하야. 한번 가볼까?"
"좀 멀어 보이는데요."
"슬슬 걸어가면 괜찮지 않을까?"
 

그 순간 정원을 오가는 전기차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얼른 대여소로 달려가서 전기차를 빌려가지고 돌아왔다. 막상 운전을 해보니 아무 길이나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길을 잘못 들면 경고방송이 나오고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면 후진해서 통행 가능한 길을 다시 택해야 했다.

우리는 아폴로 연못(Bassin d'Apollon) 옆쪽에 차를 세웠다. 앞쪽에서 보면 연못의 출발 지점에 네 마리의 황금 말이 이끄는 황금 마차를 젊은 태양신 아폴로가 몰며 연못 한가운데를 힘차게 질주하는 역동적인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루이14세를 상징하는 태양신 아폴로가 황금마차를 몰며 연못 한가운데를 힘차게 질주하는 모습의 역동적인 조각상
 루이14세를 상징하는 태양신 아폴로가 황금마차를 몰며 연못 한가운데를 힘차게 질주하는 모습의 역동적인 조각상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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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여주신 아빠는 이번에는 나를 데리고 황금마차 조각상 뒤쪽으로 빙 돌아가면서 물어보셨다.

"황금마차를 모는 건 태양신 아폴로인데 누굴 의미하는지 알겠어?"
"그냥 짐작인데요. 베르사유궁을 지은 태양왕 루이 14세를 상징하는 거 아닐까요?"
"빙고!"


아빠는 아주 기뻐하시면서 황금마차 뒤쪽에 다가가자 다시 말을 이으셨다.

"저 조각상의 이름은 '봄의 아폴로 전차(Le char d'Apollon au printemps)'다. 태양신이 봄을 이끌고 달려가는 거지. 어디로? 여기서 눈을 들어 앞을 보면 무엇이 보이느냐?" 

프랑스 왕국의 심장
 
뒤쪽에서 바라본 ‘봄의 아폴로 전차’. 태양신 아폴로가 향하는 곳은 건물 중앙의 루이14세 침실이다.
 뒤쪽에서 바라본 ‘봄의 아폴로 전차’. 태양신 아폴로가 향하는 곳은 건물 중앙의 루이14세 침실이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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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마차 뒤쪽에선 정원 저 너머 베르사유궁의 중앙건물이 보였다. 그 중앙건물의 정중앙 3층에 루이 14세의 침실이 있었다. 프랑스 왕국의 심장이다. "짐이 곧 국가"라고 외치던 그의 말이 궁전의 건물과 연못 배치와 조각품 설치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어 있었던 셈이다. 침실이 있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주거공간은 태양신 아폴로 신전처럼 신성한 곳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잠자리에 들 때와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궁정인들의 알현을 받았고, 여기서 천하만사를 논하고 각국 대사들을 접견했다. 황금빛으로 장식된 그 방에 들어섰을 때 루이 14세의 부귀영화가 그대로 느껴지는 기분이기도 했었다. 태양신 아폴로와 태양왕 루이 14세. 그래서 정원 곳곳에 루이 14세를 상징하는 아폴로 석상들이 세워져 있는 거였다.

나는 다시 전기차를 몰고 대운하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았던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성으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본관의 앙투아네트 방이 폐쇄되어 아쉬웠던 참이라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이곳만은 꼭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성은 본래 루이 15세가 '공식 애인' 퐁파두르 부인에게 주려고 지은 것이었으나, 완공되기 4년 전 병으로 죽는 바람에 바리 부인에게 주었다가 루이 16세가 즉위하면서 곧바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하사된 성이었다.

성 앞에 이르러 차를 주차시킨 뒤 건물 입구로 다가가니 여기도 보안검색이 실시되고 있었다. 늘어선 관람객들을 뒤따라 그녀가 쓰던 접견실, 음악실, 침실, 부엌, 화장실 등을 구경했다. 2층 건물인 프티 트리아농은 사치의 대명사인 앙투아네트의 악명과 달리 실제론 사치스러운 것도, 호화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프티 트리아농에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
 프티 트리아농에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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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점을 지적하자 아빠가 수긍하셨다.

"미우니까 뒤집어씌웠던 거야."
"뒤집어씌웠다고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선 나도 약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루이 16세가 아직 태자이던 시절에 14살의 어린 나이로 시집 왔다. 그러다가 4년 뒤인 1774년 태자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가 되었다.

당시 유럽 권력의 발전소였던 합스부르크 제국, 곧 오스트리아와 힘겨루기를 해왔던 프랑스인들은 자기 나라의 왕비가 된 오스트리아 여자를 아주 싫어했다. 오스트리아 여자를 불어로는 '로트리쉬엔느(I'Autrichienne)'라 하는데, 프랑스인들은 이 말을 조금 비틀어 '로트르 쉬엔느(l'autre chienne)'로 발음했다고 한다.

"무슨 뜻이에요?"
"로트르 쉬엔느는 '다른 개(another dog)'인데, 젠더가 있는 불어의 경우는 여성명사로 '다른 암캐'가 되는 거지. 그런 식으로 앙투아네트를 경멸했던 거야."
"그렇지만 예쁘지 않았어요?"
"초상화를 보면 예쁘더구나."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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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사치스럽기는 했다고 한다. 이 점이 프랑스인들의 입방아에 오른 거였다. 음악, 그림, 춤, 연극을 좋아하고 패션과 보석에도 관심이 많았다. 또 카드 도박을 즐기고 거는 판돈도 크고 해서 문제는 있었지만, 역대 다른 왕비들과 비교할 때 앙투아네트가 특별히 더 사치스러웠던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농민들이 분노해서 폭동을 일으켰잖아요?"
 

사실이었다. 빵 가격이 여러 번 폭등하면서 살기가 막막해진 농부들이 떼지어 파리로 몰려왔다. 민중의 분노는 왕실로 향했고, 그중에서도 사치와 향락의 대명사인 앙투아네트에게로 쏠렸다.

희생양

하지만 재정이 파탄 난 건 그녀 때문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한 개인이 사치했다고 파탄이 날 정도로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왕실 예산은 프랑스 전체 예산의 3%였고, 앙투아네트가 쓴 돈은 그 왕실 예산의 10%였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라고 한다.

"그럼 무엇 때문에 재정이 파탄 난 거예요?"
"미국 독립군을 원조했던 게 가장 큰 원인이야. 영국에게 지기 싫었거든. 이런 무리한 원조와 경제정책의 실패, 그리고 역대 왕조의 낭비가 누적된 결과지."

"그럼 어떻게 해석해야 해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S'ils n'ont pas de pain, qu'ils mangent de la brioche)'라고 했다는 말은?"

그 말이 유명하다. 하지만 그 말을 처음 한 것은 앙투아네트가 아니라 계몽사상가 루소였다는 게 정설이라고 한다. 즉 루소가 '어떤 왕비의 말'이라면서 인용한 자서전 <고백>은 1766년에 발간되었는데,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온 것은 1770년이니 시집도 오기 전에 왕비가 되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럼 왜 그런 소문이 난 걸까요?"
"프랑스 대혁명 후 왕정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유포되었던 거야. 그리고 빵 대신 케이크라 할 때의 원문은 '브리오쉬(brioche)'인데 그 모양은 이렇다."

 
프랑스의 전통 빵 브리오쉬
 프랑스의 전통 빵 브리오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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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보여주신 휴대폰 속의 사진을 보고 내가 말했다.

"또 다른 빵이네요."
"그래. 여러 형태가 있지만 보통은 이렇다더군. 그러니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라는 말을 제대로 옮기면 '쌀밥이 없으면 팥밥을 먹으면 되잖아' 정도의 뉘앙스였던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투아네트는 사악하고 사치스러운 여인으로 알려져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결과를 보면 오히려 선량하고 사교적이며 동정심 많은 여자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루이 16세가 사냥터에서 쏜 화살에 맞아 농민이 쓰러지자 직접 달려가 간호해주고, 마차를 몰 때 농민의 밭을 망치지 않도록 밭을 비켜 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일화 같은 것도 전해진다고 한다.

"근데 왜 나쁜 이미지로 알려졌을까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라고 아빠는 지적하셨다. 새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옛 왕조를 비판하고 폄하하는 건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가령 의자왕의 '3천 궁녀' 같은 것도 당시 백제 인구나 규모를 고려할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는 백제가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의자왕을 방탕한 임금으로 몰아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이라는 표현처럼 궁녀가 많았다는 뜻으로 3천이라는 숫자를 쓴, 일종의 과장적 레토릭이었을 뿐이라는 해석이다. 앙투아네트에 대한 일화나 표현도 그와 비슷했다.

"역사는 역시 승자의 기록인가봐요."
"그런 셈이지."


왕실재정이 파탄나자 루이 16세는 위기를 극복해보려고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제3신분인 평민 대표들은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곧 구체제의 모순을 지적하며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주장했다. 이에 화가 난 루이 16세는 무력으로 탄압했고, 성난 민중은 바스티유(Bastille) 감옥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한 뒤 방위군을 조직해 국왕의 군대에 맞섰다.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이었다.

"내일 코스는요?"
"바스티유 감옥이다."
 

아빠와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날 프티 트리아농 옆에 있는 왕의 별장 그랑 트리아농(Grand Trianon) 등 18세기를 구경한 뒤 RER열차를 타고 21세기의 파리 아파트로 다시 돌아왔다. 하루 종일 그곳에 머무른 탓인지 화려한 베르사유궁이 대혁명의 와중에 그래도 용케 보존이 되었던 거구나 하는 이런저런 잡생각에 그날 밤은 쉬 잠들지 못했다.

태그:#베르사유정원, #베르사유궁, #루이14세, #마리앙투아네트,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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