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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외환위기와 세기말의 공포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기를 농촌에서 맞이하려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 귀농자들을 위한 귀농학교가 생겨나 유기농 퇴비 만드는 법, 효소 발효 방법 등 전통적인 농사방법에 대해 교육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환경 생태학자, 생명운동론자, 친환경농업을 실천하는 농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농촌공동체 안에서의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일본의 유기농법이 들어와 자연농법, 태평농법이란 말이 생겨나고, 쿠바는 도시농업과 유기농업을 통해 미국의 봉쇄정책을 이겨내고 식량자급율 100%를 실현하고 농민들이 의사나 교수보다 수입이 많은 세계유기농의 메카로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귀농을 결단하고 농촌으로 들어간 귀농자들에게 닥친 현실은 귀농교육의 내용이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들었던 말이나 글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귀농학교를 거쳐 귀농한 사람이나 개인적인 학습을 통해 귀농한 사람들 대부분 농촌의 마을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고 농촌 공동체 밖의 외딴 산 속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생계를 위해 읍내에 집을 얻어 학원 등을 운영하면서 농사를 짓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가끔 각오를 단단히 한 귀농자들이 도시에서 모은 자본을 모두 쏟아 부어 집도 짓고, 땅도 사서 농사를 바로 시작했으나 연간 농산물판매액이 500만원을 못 넘기는 현실 앞에서 2~3년을 못 버티고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채 탈농(脫農)의 대열에 합류하게 됩니다.

냉혹한 현실에도 버티고 있던 귀농자들은 자신들이 귀농을 준비할 때 보고, 듣고, 배우고, 꿈꿔왔던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이 왜 자신들에게 실현되지 않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귀농 후 기울인 노력에 대한 반성과 점검이 끝나자 자신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사람들은 어떻게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했는지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농사를 지어 생활하려던 귀농인들의 눈에 그들은 생활만 농촌에서 할뿐 그들의 일터는 논과 밭이 아닌 강단과 책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지탱해 준 것은 농사일과 농산물 판매액이 아니라 통장에 찍히는 강연료와 인세 그리고 토지임대료였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1994년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생긴 이래 농촌으로 들어간 많은 사람들은 귀농을 단순히 직업의 전환이나 거주지의 이전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과 생태주의적 생활을 실천하려는 다짐의 표현이라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자부심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던 귀농인들은 농사 수입으로 생활하지 않는 사람들을 귀농의 개념에서 배제시키고 귀촌이란 용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2003년말부터 귀농과 귀촌을 구별해 표현하게 된 과정입니다.

귀농과 귀촌의 분리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게 됩니다. 귀농은 농업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직업의 하나로 전락했고, 귀촌은 노동과 생산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에 대한 얘기는 귀농·귀촌의 분리. 그 후의 이야기에서 다루겠습니다.
 

태그:#귀농, #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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