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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청년이 정치활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주저하게 하는 것과 확신하게 하는 것이 가득한 이 정치판에 뛰어든 이, 여성최초 제주도지사 후보였던 고은영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활동가인 혜민과 연주가 함께 만났다.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또는 꿈꾸는 여성청년들의 사연을 받았고 이를 중심으로 고은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고은영x여세연의 제주도 푸른밤. 장장 5시간이 넘게 이어진 대화를 4회차 기사로 정리해보았다. 1, 4회차는 혜민, 2, 3회차는 연주가 작성하였으며 1회차씩 연달아 게시될 예정이다. -기자말

6.13 지방선거가 끝나고 세 달이 지났다. 항상 그렇듯이 선거가 끝나면 마치 선거를 치러본 적도 없는 세상인 것처럼 잠잠해진다. 거리에만 서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많은 정치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한적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출마자들의 삶은 선거 이후에도 이어진다. 당선된 이들은 의회나 지자체로, 낙선한 이들은 선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일상을 찾아 나서게 된다. 선거가 끝났지만 그 이후의 삶이 궁금한 후보, 여성청년인 나는 최초의 여성 제주도지사 후보였던 고은영이 떠올랐다.

미투 운동이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었지만 반응하지 않는 정치권을 보며 답답하고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때 1톤 트럭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소리치는 고은영의 사진이 너무나도 멋있었다. 지역의 난개발을 막는 여성영웅처럼 등장한 고은영은 단순히 멋있는 후보를 넘어 능력 있고, 자신감 있고,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우리들'의 후보자였기 때문이다.  
 
  고은영 녹색당 제주도지사후보가 1t트럭 위에 서서 선거유세하는 모습. 해양쓰레기와 건축폐기물을 업사이클링해 유세용트럭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은영 녹색당 제주도지사후보가 1t트럭 위에 서서 선거유세하는 모습. 해양쓰레기와 건축폐기물을 업사이클링해 유세용트럭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 제주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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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은영 만나러 갈까요?"

고은영 후보는 선거운동 중에 만난 여자 어린이에게 "커서 도지사 되세요"라고 말했다. 이는 어린이와 함께 있는 부모에게도 던지는 메시지였다. "딸을 도지사 정도론 키우셔야죠"라는 말인 셈이다. 여세연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연주는 고은영을 보며 '멋지다'는 감정을 넘어 여러 희망들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대학교를 '육지'에서 다니게 된 제주도 출신 연주는 고등학생 때, 학생회장 후보를 남학생에게 '양보'했던 일을 떠올리며 스스로 나서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는 상황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고, 자연스레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의심하고 단념해왔다고 한다. 그러다 제주도지사 후보로 나선 고은영 후보의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며 "나도 저런 정치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하게 되었고 '지금의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긍정적인 물음을 던지게 됐다.

고은영을 통해 여러 물음과 기대를 떠올린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정치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돌아보면 이른바 '반장' 역할을 해왔음에도 대표자가 되어 정치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쉽지 않은, 이질적인 선택이었다.

쉽게 말하면 나 같은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간 대표자가 되어 활동한 적은 있지만 대부분의 결과가 '실패했다'고 자평해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정치를 한다는 상상은 지난 경험들을 낱낱이 깨부숴야만 하는, 들여다보기 어려운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번 지방선거에서의 여성청년 후보의 등장과 활동은 나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었다.

여러 층위의 복잡한 고민들은 결국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래, 고은영을 만나보자.' 마침 단체 일정으로 제주도에 가게 된 덕분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성청년들의 사연을 받아 정치 참여를 주저하게 하는 것, 확신하게 하는 것에 관해 고은영 녹색당 제주도당 공동위원장과 얘기해보자고 제안했다. 이에 고은영 위원장은 답했다.

"언젠가 올 것이라 생각했던 그 요청이네요!"

그렇게 지난달 8월 30일 우리는 제주도 푸른밤, 저녁 7시에 만나 새벽 1시가 넘어서까지 본격 정치 수다를 떨었다.
 
제주도푸른밤이 다가오기 전, 골목길에 서서 본 바다의 모습. 아름다웠다.
 제주도푸른밤이 다가오기 전, 골목길에 서서 본 바다의 모습. 아름다웠다.
ⓒ 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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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청년이 정치하기 좋은 '공간'이란 무엇일까?

본격적인 얘기에 앞서 서로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우리는 여성이자 청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쉽게 '제가 부족해서', '제가 잘 모르지만', '2018년의 저는'이란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는데, 이런 수식어가 결국 습관적인 자기검열의 언어처럼 다가왔다.

나를 증명하고 드러내는 것에 있어 감추거나 낮춰야만 한다고 배워온 덕분일까. 이러한 자기검열은 여성들이 정치하는 데 주저하게 하는, 영향을 주는 요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분위기가 강했던지 고은영은 먼저 제안했다.

"오늘 우리 자기검열에 빠지지 않는 원칙을 세우기로 해요."

고은영에게 '지역 난개발을 막는 여성도지사'라는 타이틀이 있었던 만큼, 우리의 이야기는 주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대학생활 내내 고시원에서 지냈던 나는 주거공간이 결국 개인의 현재적 삶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축소시킨다고 봤다. 화분을 키울 수 있을 정도의 햇볕이 간절했던 고시원 생활이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과거 달동네에서 살았던 고은영은 서울에서도, 제주에서도 개발 광풍을 경험하며 주거, 지역이라는 것이 개인의 문제만으론 풀 수 없는 굉장히 정치적인 문제임을 실감했다. 이러한 지역에 대한 고민은 '거주했던 공간이 정치를 하려는 여성청년에게 어떻데 다가오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연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꺼냈다.

"제주도가 너무 좁아서 무서운 것도 있더라고요. 예를 들면 제가 제주공항에 내려서 택시를 타서 '제주장례식장 가주세요' 했는데 '어- 너 누구 딸이냐?' 이렇게 물어보는 거죠. 이런 긴장감이 한편으론 지역에서 미투운동 집회가 활발하지 못한 이유와도 맞닿아있다고 생각해요."
 

이는 정치활동에서 인적 관계가 큰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여성청년은 지역에서 무언가를 표현하고 표출하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고은영 역시 본인이 제주도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는데 '무일푼 무연고'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쉬었던 점이 분명 있었다고 덧붙였다.

"제주도의 굉장히 많은 카르텔에 전선을 긋고 전면적으로 얘기해왔는데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제가 무일푼 무연고였고, 지역에 빚이 없고 깊은 연고가 없고 내가 관계로 빚어진 사람도 없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저는 청년이 가진 힘이 거기에 있다고 보는데요. 지역에 있는 청년들도 기성세대보단 빚이 적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면 균열을 내고 이건 잘못됐다고, 기성의 정치문법이나 사회의 패러다임에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얘기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다고 봐요. 무일푼 무연고여서 가능했다기 보단 쉬웠다는 거죠."


이런 대화들이 오갔을 때, 물음들도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여성청년이 정치하기 좋은 '공간'이란 무엇일까? 비단 정치운동만의 어려움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단순히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 간의 관계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인 맥락, 문화적인 특성, 성별에 따른 기대감이 함께 교차적으로 반응한다고 볼 때, 점점 어려워진다.

고은영은 제주도의 여성들이 아주 오랫동안 경제력에 있어 그 역할이 분명한 반면 사회적인 역할, 즉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기회들은 주어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는 2018년에 이르러서야 고은영이 '최초의 여성도지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선거운동 중인 고은영의 '연대자들'
 선거운동 중인 고은영의 "연대자들"
ⓒ 제주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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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극복을 돕는 일일 수 있어요"

고은영은 후보시절, 많은 이들로부터 '출마할 자격'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나이도 어리면서, 여성이면서, 제주도 출신도 아니면서…' 와 같은 끝없는 질문은 제주도지사로 나선 고은영의 경험이 분명 아닐 것이다.

많은 여성후보자들, 특히 여성청년 후보자들은 출마한 지역에서 "결혼하면 떠날 사람"으로 비춰지거나 "결혼하면 정치 일을 못할 사람"이라는 인식과도 부딪치며 출마 자체에 대한 인정 투쟁을 시작하는 게 일상이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버티며, 내가 정치인이 될 만한 사람이라는 자신감과 확신을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을까? 

"'내가 자기 검열에 빠지든 뭐하든 건져주고, 사랑해주고 예뻐해 줄 수 있는 연대자들만 내 옆에 든든하게 있으면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는 서로의 용기 될 거다'라고 하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게 연대라고 보고요, 그걸 정말 선거에서 볼 수 있었어요."

강정마을 투쟁에 함께하며 해양생물인 '해파리'로 닉네임을 정했던 고은영. 그는 주변 사람들에 영향을 받고 휘청휘청 돌아다니는 모습, 사람들 앞에 나설 때 벌벌 떨기도 하는 모습 등에서 이 닉네임을 따왔다고 설명했다.

고은영과의 대화를 통해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는 '다양한 이들이 정치판에 들어가야 한다'고 외쳐왔지만, 대표자나 정치인들을 아직도 '정상성'의 잣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양한 이들이 정치판에 들어가는 것자체가 어쩌면 '대표자의 특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에 대해 균열을 내는 것임에도 다른 상상을 펴보지 못했다.

고은영은 우리가 알던 이미지 이외에도 다양한 모습이 많아서 본인과 같이 선거를 뛴 이들에게도 새로운 정치인으로 여겨질 수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가 등장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극복을 돕는 일일 수 있어요"라는 고은영의 말은 그간 '실패한' 나와 연주의 경험을 건져주었다. 정치활동에 고민을 품은 여러 이들의 사연에 대해 고은영이 과연 어떻게 응답할지 기대되는, 제주도의 푸른 밤이었다.

(*2회에서 계속)

태그:#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고은영, #녹색당, #여성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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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정치적 역량과 연대를 강화하고 사회 전반에서의 성평등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일조하고자 하는 여세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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