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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당혹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마음의 상처는 이미 아물었고 기억조차 탈색되어 희미한 잔상들만 남아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집담회가 열리고 강제 징집되었던 과정을 설명하는 순간,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을 뿐, 강제 징집과 제대로 이어지는 27개월의 기간 동안 겪었던 고통들은 아직도 내 의식 어딘가에 날카롭게 뿌리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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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화사업 피해자들, 진실을 말하라"

제가 22사단에서 근무했다는 것을 확인한 것도 집담회에 참석한 후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몇 반이었는지도 기억했던 제가 몇 사단 출신인지 전혀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작은 충격이었습니다.

사전에 위원회 측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조차 '22사단'이라는 낱말은 생소했습니다. 그만큼 의식적으로 군 생활에 관련된 것들은 조그만 편린들조차 기억의 골방 속으로 쫓아버렸던 모양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절차야 어떻든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번도 제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백 명의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들에 대한 폭력적인 유폐. 강제 징집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미 81년 가을 학내 시위 도중 백골단에 잡혀 강집되었던 동기 정성희 군이 다음 해 7월 싸늘한 시체로 돌아왔으며,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와 친구들이 치안본부나 보안사에 연행되었다가 잔혹한 구타와 고문에 짓이겨진 후 일부는 국가보안법이나 집시법으로 구속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군대로 보내졌습니다. 강제징집은 인신 구속과 더불어 전두환정권이 학생운동을 약화시키고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무자비한 폭력일 뿐이었습니다.

징집연령이 되면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신체적, 정신적 결격사유가 없는 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군에 입대하면 보안사에 끌려가 폭력과 고문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강요받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고통을 덜기 위하여 친구나 선배의 이름을 불어야 할지도 모르며, 출신 대학에 돌아가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몸조심해서 다시 사회로 복귀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강집자들은 처음부터 그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경로를 걸어야 했습니다. 우리들은 군 복무 기간 중 반드시 한번, 혹은 두 번, 경우에 따라서는 오랫동안 '녹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보안사에 끌려갈 것이며, 앞에 열거한 경우들을 반드시 겪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필요한 경우 언제든지 저들의 입맛과 요구에 따라 개조될 것이며, 심지어 보안사의 어느 밀실에서 죽임을 당하더라도 '신병을 비관하여 자살했다'는 사유가 적힌 사망통지서 한 장으로 모든 것이 정리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생활해야 했습니다.

가로놓인 상황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83년 12월 사망한 서울대 한희철 군의 경우처럼 친구들 중의 한 명이 경찰이나 보안사에 끌려가 자백을 강요받다가 집요한 폭력과 고문에 못이겨 이름이라도 나오게 되면 그날로 보안사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강제 징집 당했던 우리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날 집담회 자리에서 위원회의 관계자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는 참으로 충격이었습니다. 위원회에 불려온 병무청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자원입대'라는 적법한 절차를 거쳤으며, 병역법에 명시된 규정에 따라 처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문교부에서 학적을 변동시켰으며, 지금도 교육부 현직관리로 있는 어느 공무원은 '우리는 꼭두각시였을 뿐'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저는 군 생활 중에 간혹 그때 일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당시 서대문경찰서 조사실에서 입대지원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갑작스러운 수배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하루종일 두 명의 형사로부터 여죄를 대라며 구타와 회유에 시달린 후, 밤늦게 정보과장이 들이미는 입대지원서를 거부할 용기가 과연 있었을까 싶습니다.

"네가 서명해야 이번 사건이 마무리되고 부모님 뵐 면목도 있지 않겠느냐"는 협박성 회유를 거부하면 그 이후 벌어질 일은 너무나 뻔했습니다. 폭력과 체력이 맞부딪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겠지요. 그럼에도 과정이야 어떻든 직접 서명했으므로 '자원입대'한 것이라 주장한다면 그렇다고 해주겠습니다. 자원입대든, 범법행위로 구속시켰다고 주장하든 반대자를 탄압하고 학생운동을 무력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실행된 국가폭력이라는 본질에는 단 한치의 차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사들에 호위되어 경찰서 차를 타고 춘천보충대에 던져진 다음날이었습니다. 저는 삼척의 신병훈련소에 인계되었습니다. 군 생활에 대한 실질적인 사전지식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오전 내내 상황실 한쪽 의자에 앉아있어야 했습니다. 그 사이에 서류 뒷면에 '특수학적변동자'라는 붉은색 스탬프가 선명히 찍힌 개인기록카드도 작성했습니다.

점심 무렵이었습니다. 하사관 한 명이 상황실에 들어오다가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이 새끼 뭐야?"라며 눈을 부라리던 그가 잠시 후 나의 정체를 알아챘습니다. "이 빨갱이새끼들은 다 철책에 세워놓고 총살해 버려야 돼! 지금이 어느 땐데 데모야, 이 새끼들이." 그에게 저는 군에 막 입대한 신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지키는 나라를 망치려는 빨갱이였던 것입니다.

언젠가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또 한번 그 일을 떠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도 강제 징집된 자입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여학생의 관심을 끌기 위해 농담이 적힌 엽서를 보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퇴학당하고 강제 징집되어 사역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을 감시하는 병사 한 명이 사격대회에 나가 1등 상을 받았습니다.

부대원들이 그를 칭찬하자 병사가 진지하고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모두들 왜 나를 칭찬하는지 모르겠어. 만약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나는 맨 먼저 너희들을 향해 총을 쏘아 갈길텐데!"

저는 제가 겪었던 '녹화사업'도 똑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한국전쟁의 와중에 수만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총살당했던 것처럼, 평소에는 '좌경 학생들을 순화시켜 활기찬 군 생활로 이끌려고 노력'하지만 전쟁이나 그와 유사한 일이 발생했다면 우리들 모두는 가장 먼저 총살되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전향하여 좌익분자들을 색출하는데 앞장섰던 보도연맹원들도 총살당했는데, 하물며 '좌경용공학생 출신자들'이야 더 말해 무엇할까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김병년(1983년 강제징집자)

<강제징집자, 녹화사업 피해자 집담회>는 22일 오전 10시에도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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