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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10.19 08:02수정 2018.10.19 08:09
본문 속의 일부 인물 및 에피소드는 와인과 중세 역사의 쉬운 이해를 위해 창작된 가공임을 밝힙니다. 그 외 실제 지명 및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 기자말
 
알 수 없는 이유로 나의 몸은 14세기의 프랑스에 있었다. 나는 교황 요한 22세의 명으로 스페인의 아라곤에서 그르나슈(가르나차) 포도나무의 묘목들과 종자들을 아비뇽으로 가져가는 일행 속에 속해 있었다.

일행들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그 해가 신곡의 저자 단테가 세상을 떠난 1321년의 12월 말임을 알게 됐다. 일행들은 나를 '바스커빌의 윌리엄 수사(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과 분위기로 짐작컨대 아마 잉글랜드 출신의 프란체스코회 수사가 내 현재의 신분인 듯 했다.
 
우리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윽고 프랑스의 기옌(Guyenne)공국, 즉, 사람들이 말하는 아키텐(Aquitaine) 땅으로 들어섰고 어느새 해는 바뀌어 1322년이 되었다. 나와 동행하고 있는 이는 오베르라는 이름의 프랑스인 수사였는데 역사와 인문학의 지식이 깊어 좋은 대화 상대가 되었다.

험난한 피레네 산맥과 달리 기옌 공국령은 도로가 잘 발달돼 우리는 한겨울이지만 편안하고 느긋하게 길을 가며 다양한 얘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아시다시피, 이 아키텐 땅은 프랑스 왕국으로서는 손톱 밑에 박혀있는 가시 같은 존재지요."
 
추위를 이기려고 마신 와인의 취기 덕에 달아오른 얼굴로 오베르 수사가 얘기를 시작했다.
 
"그 옛날 로마의 카이사르 조차도 다른 갈리아 부족에 비해 이 아키텐 땅의 토착민들은 워낙 용맹하고 사나워서 정복하기 힘들었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까요. 서부 해안에 위치한 이 점 때문에 아키텐 공국은 잉글랜드와의 무역 중심지가 되면서 재력까지 더해졌습니다. 심지어 12세기에는 아키텐 대공인 기욤 10세가 다스리는 공국령(公國領)이 전체 프랑스 영토의 1/3에 이르기도 했지요. 그러다 보니 기욤 10세의 딸인 엘레오노르가 자신을 프랑스의 실질적인 여왕이라고 인식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아버지인 기욤 10세는 그런 그녀에게 더 큰 영광을 주기 위해 프랑스의 왕 루이 6세의 세자와 약혼을 시켰고 이는 프랑스 왕가에서도 크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아무튼 프랑스 전체 영토의 3분의 1을 지참금으로 가져오는 약혼녀였으니까요. 그녀가 15살이 되던 해인 1137년, 아버지인 기욤 10세와 루이 6세가 몇 달 만에 나란히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왕이 된 루이 7세와 함께 프랑스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 부부는 사이가 몹시 나빴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당시의 교황인 에우제니오 3세를 설득하여 '혼인 무효'라는 편법으로 카톨릭 교리까지 어겨가며 이혼을 했죠. 당시 엘레오노르의 나이는 서른 살, 여성으로서는 이미 한참 때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이혼을 하면서 다시 아키텐 공국을 돌려받은 터라 유럽 전역의 귀족과 왕족들이 그녀의 사랑을 차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이혼 직후에 선택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9살 연하의 헨리 플랜태저닛, 바로 노르망디 공작이자 앙주백작이었습니다. 둘은 1152년에 결혼을 했고, 2년 뒤인 1154년에 헨리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라 헨리 2세가 되자 이 부부의 영토는 전체 잉글랜드와 아키텐 공국령, 노르망디 공국령, 거기에 앙주 백작령까지 더해져 프랑스 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 거죠."


너무나도 생생하게 중세 유럽의 역사가 눈 앞에 펼쳐졌다. 교활하고 욕심 많았지만 합리적인 군주가 되고 싶어했던 플랜태저닛 왕가의 창시자 헨리 2세, 그리고 사실상 프랑스의 여왕과도 같았던 오만하고 아름다운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그러나 이 둘의 결혼 생활도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둘은 훗날의 그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를 포함해 아들 5명과 딸 3명을 낳았으나 젊은 헨리 2세의 바람기는 엘레오노르의 질투를 불러 일으켰고, 결국 그녀는 아들들을 부추겨 아버지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지금 이 시대인 1322년에는 잉글랜드의 세력이 옛 아키텐 땅이었던 이 기옌 공국 정도에 불과했지만, 불과 15년 뒤인 1337년,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기옌 공국의 몰수를 선언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에 저 길고 참혹한 백년 전쟁이 벌어지게 됐던 것이다. 잠시 와인으로 목을 축인 오베르 수사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 기옌 공국은 플랜태저닛 가문으로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일 겁니다. 일설에는 기옌 공국, 그 중에서도 특히 보르도에서 와인을 수출하면서 얻는 수입이 잉글랜드 전체에서 걷히는 세금보다도 더 많다고들 하더군요."
 
바로 그 보르도가 저 멀리에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 보르도군요. 저 앞에 보이는 저 강이 바로 가론(Garonne) 강입니다. 가론 강은 보르도 앞을 지나친 후 메독(Medoc) 지방에서 도르도뉴(Dordogne) 강과 합쳐져 지롱드(Gironde) 강이 되죠. 지롱드 강은 다시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가니 이 강들을 이용해 보르도 지역에서 만들어진 와인들을 잉글랜드로 실어 나르는 거구요. 아마 그 내용은 잉글랜드 출신이신 윌리엄 수사께서 더 잘 아시겠죠?"
 

12세기 중반(좌)과 14세기 초반(우)의 프랑스 내 공국령 지도. 11세기 중반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닛과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혼인으로 잉글랜드는 한때 프랑스 전역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땅을 차지했었다. 이후 점차 세력이 약화되긴 했으나 14세기 중반에도 보르도 지역이 포함된 아키텐 공국은 여전히 잉글랜드의 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와인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잉글랜드에 가져다 주었다. ⓒ 위키피디아

 
"예, 알다마다요. 잉글랜드에서는 보르도를 통해 수입된 레드 와인을 암적색을 띤 적포도주란 뜻의 클라레(Claret)라고 부르지요. 술을 많이 마시는 우리 잉글랜드 사람들에게는 진하면서도 값이 저렴한 보르도의 와인이 딱 알맞습니다. 물론 보르도 지역이 세 개의 강이 만나는 지역이라서 상대적으로 와인과 원료인 포도의 수송비용이 저렴한 탓도 있겠지요. 보르도(Bordeaux)라는 지명 자체가 '강가'를 뜻하는 프랑스어 '보르 드 로(bord de l'eau)'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잉글랜드인들의 입맛에는 확실히 단일 품종으로 담은 부르고뉴는 너무 묽고, 프로방스 같은 남부 프랑스의 와인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수송비 때문에 값이 너무 비싸죠. 그에 비해 보르도는 그 자체의 포도들도 맛이 진한 데다가 가론 강과 도르도뉴 강 유역에서 나는 여러 품종의 포도를 섞어서 잉글랜드인들의 기호를 더 잘 맞추니 자연히 보르도 와인을 더 많이 수입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대가로 보르도에서는 부족한 각종 곡물, 양모, 가죽, 송진에 소금까지 잉글랜드에서 수입해서 판매하니 플랜태저닛 왕가 입장에서는 이렇게 좋은 수입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얘기들을 주고 받으며 가론 강을 건너 보르도 시내로 들어갔다. 그런데 시내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뭔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종을 시켜 무슨 일인지 알아봤다. 잠시 후 시종이 돌아와 전한 얘기를 들은 오베르 수사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내게 소식을 전했다.
 
"왕이 죽었답니다. 지난 1월 3일에 프랑스의 필리프 5세가 서거하셨다는 군요."
"필리프 5세라면 필리프 4세의 둘째 아들이죠? 왕위를 찬탈했다는 말이 많던데요."
 
"예, 확실히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필리프 5세는 지금의 교황이신 요한 22세가 선출하도록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형인 루이 10세가 딸인 잔 공주만 남긴 채로 서거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이긴 해도 잔 공주가 왕위를 물려받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숙부인 필리프 5세가 갑자기 개입해서 여성은 왕위 계승권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는 랭스 대성당의 문을 걸어 잠근 채 홀로 왕위에 등극했는데 반대하는 세력들을 끊임없이 탄압하면서 결국 자신의 왕권을 관철시켰죠. 그런 그가 자신도 왕위를 이어받을 왕자가 없이 공주만 남긴 채 서거했기 때문에 남성 승계의 원칙에 따라 그의 막내 동생인 라마르슈 백작이 왕으로 즉위해 샤를 4세가 됐다는군요."
 
"그런데 새 왕이 즉위했는데 보르도 사람들의 분위기가 왜 이렇게 어둡죠?"
"그건 새 왕인 샤를 4세가 온화하긴 하지만 그 전부터 이 기옌 공국에 대한 잉글랜드 왕의 주권을 부인하고 프랑스의 영토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막대한 수입을 올려주는 기옌 공국령을 잉글랜드 왕가에서 쉽게 포기할 리도 없고… 억지로라도 뺏으려 한다면 전쟁이 일어날 도리 밖에 없겠죠. 그런데 복잡한 문제는 그 뿐이 아닙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나요?"

 
오베르 수사는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더니 누가 듣기라도 할세라 내게 몸을 기울여 속삭이듯 말했다.
 
"문제는 새로 왕위에 오른 샤를 4세도 아들이 없다는 겁니다. 샤를 4세는 장 1세의 막내 아들이자 살아있는 유일한 유일한 아들인데, 혹시나 샤를 4세가 이대로 아들 없이 죽기라도 한다면 987년에 위그 카페(Hugues Capet)로부터 시작되어 300년 넘게 이어져온 카페 왕조의 직계는 완전히 대가 끊기는 거죠.

직계의 대가 끊어지면 방계에서 왕위 승계권을 주장하겠지만, 아시다시피 이게 보통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마 카페 왕조와 조금이라도 피가 섞인 프랑스 내의 주요 귀족들이라면 모두 저마다 모두 왕위 승계권이 있다고 주장할 거고, 그런 의미에서는 외가 쪽으로 프랑스 왕가와 연결돼 있는 플랜태저닛 가문도 마냥 물러나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324년에 샤를 4세가 기옌 공국에 대한 프랑스의 영유권을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고, 1328년에 샤를 4세가 후사 없이 서거한 뒤에는 카페 왕조의 남자 방계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등극하여 필리프 6세가 되면서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도 모친인 이사벨라가 샤를 4세의 누나였기 때문에 외가 쪽으로 가장 가까운 방계이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남자 승계의 원칙 때문에 프랑스 왕위에까지 욕심을 내진 않았다.

그가 바란 건 다만 자신의 영토인 기옌 공국의 통치권 보장과 플랑드르 지방의 자유로운 양모 무역뿐이었다. 그러나 재정난에 몰린 필리프 6세는 1337년에 결국 기옌 공국의 몰수를 선언했고, 분노한 에드워드 3세는 거꾸로 모계에 의한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지만… 그것은 현재의 오베르 수사는 알 수 없는 조금 더 미래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잉글랜드의 왕이자 기옌 공국의 영주였던 에드워드 3세(왼쪽)와 발루아 왕조의 창시자인 필리프 6세(오른쪽). 잉글랜드는 기옌 공국의 중심지인 보르도의 와인 수출과 북부 플랑드르의 양모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었고, 재정난에 몰린 필리프 6세가 이를 탐내 기옌 공국의 몰수를 선언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 National Portrait Gallery, Nicolas de Larmessin

 
"보르도 사람들은 새로운 왕이 기옌 공국을 뺏기 위해 잉글랜드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어요."
 
오베르 수사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보르도 시내에서 묵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의 프랑스 왕조가 우리 교황 성하의 선출을 도운 가문이다 보니 프랑스 왕을 싫어하는 보르도 사람들이 우리까지 덩달아 미워할 것 같군요.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이대로 보르도를 벗어나 카르카손(Carcasonne, 프랑스 남부 랑그독의 도시)까지 길을 재촉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카르카손까지만 가면 아비뇽까지는 길도 멀지 않고, 교황 성하의 가호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의 말에 따라 우리는 서둘러 보르도 시내를 벗어났다. 다행히 카르카손까지 가는 길은 가론 강을 따라 평탄한 길이 계속되어 크게 힘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길을 가는 우리의 어깨 위로 어둠과 함께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본다는 기쁨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무심결에 일행으로부터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그것을 깨닫고 급히 일행들을 쫓아갔지만 그들이 든 횃불은 좀처럼 가까워질 기색이 없었다.
 
혹시나 낙오될까 초조해진 내 주변으로 더 짙은 어둠이 덮쳐왔다. 나는 오베르 수사와 일행들을 소리쳐 불렀으나 점차 굵어지는 눈발과 어둠 속에서 내 자신 조차도 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았다. 타고 있는 나귀의 옆구리를 차며 재촉하려는 순간 나는 몸의 중심을 잃고 안장에서 떨어졌고, 완전한 어둠이 나를 덮쳐 왔다…
 
"사장님, 사장님!"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내 작은 술집 1001 M.U.N 의 바에 앉아 있었다. 내 앞에는 늘 오던 그 젊은 사내가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아, 예, 괜찮습니다. 제가 졸았나요? 무슨 실수한 건 없나 모르겠네요. 죄송해요."
"별 말씀을요. 괜찮으시면 된 거죠. 와인이라도 한 잔 드시겠어요?"

 
손님이 주인에게 거꾸로 술을 따라주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그가 따라준 와인을 제대로 음미할 새도 없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 나니 정신은 들었지만 순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거 창피한데요. 손님께 늘 와인 음미하는 법 말씀 드려 놓고 정작 제가 이런 결례를 하네요."
"하하하,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그나저나 많이 피곤해 보이시니 전 이만 일어나는 게 낫겠어요. 사장님도 오늘은 푹 좀 쉬시죠."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대신 다음에 오시면 제가 제대로 대접할께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편안히 쉬세요."

 
사내가 인사와 함께 일어섰고, 난 아직도 잠이 덜 깬 채로 주섬주섬 술자리를 정리했다. 풍경소리와 함께 문을 나서던 사내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일전에 제 이탈리아 친구들이 왔을 때 잘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 전해 달라네요.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들르겠대요. 그럼 쉬세요."
 
그는 웃으며 그 말을 남기고 떠났고, 난 멍하게 그의 말을 돌이켜 보았다. '이탈리아 친구들? 최근에 이탈리아 손님들이 온 적이 있었나?' 이탈리아뿐 아니라 딱히 외국인 손님을 맞았던 기억은 없었다. 굳이 있었다고 한다면….
 
난 순간 등줄기를 따라 얼음물이 흐르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확실히 있기는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 손님들이….
 
(-15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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