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10월 31일 저녁의 일입니다. 야학에 2교시 국어수업이 있어서 8시 15분쯤 교무실에 닿았습니다. 30분에 수업이 시작되므로 1학년 사회수업을 할 선생님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2학년 한 학생이 문을 열고 나에게 지금 교실에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나는 그 학생에게 아직 시간이 남았다며 30분 되면 들어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무엇인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닫았습니다. 드디어 30분이 돼서 선생님과 나는 교재를 갖고 각자 교실에 들어갔습니다.

아, 놀랐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일어나 있었고, 교실 한복판에는 책상들을 네모나게 이어 붙여놓고 그 위에 여러 먹을 것들을 차려놓았습니다. 한쪽에는 작고 예쁜 초가 세 개 켜 있었고, 바로 그 뒤에는 '1' '0' '3' '1' 숫자 모양의 초가 거의 녹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오늘 열두 명 다 나왔습니다. 아까 들어오셨어야 했는데 저희들이 너무 일찍 초를 켜는 바람에 모양이 이렇게 됐어요."

반장 학생이 웃으며 나에게 말했습니다.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지난번에 분명히 오늘 수업을 좀 일찍 끝내고 10월의 마지막 날 분위기를 내는 걸로 결정했는데, 학생들이 이것을 어기고(?) 상을 차려놓은 것입니다.

감, 귤, 과자, 사탕, 치킨, 맥주, 와인, 오징어포와 땅콩 등이 있었고, 주꾸미가 몇 군데에 놓여있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총무 학생이 남편이 잡아은 것을 집에 조금만 남겨놓고 다 가져온 것입니다. 그 학생은 초고추장을 곳곳에 떠놨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눈에 확 띄었습니다. 그것은 낙엽들이었습니다. 낙엽들이 몇 군데에 몇 개씩 예쁜 모양으로 놓여있었습니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내가 낙엽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까 반장은 영이(가명)씨가 집 주위에서 오늘 행사를 위해 주워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가까이 서 있는 그녀의 표정이 아주 환해졌습니다. 낙엽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서 저무는 늦가을의 분위기를 더 한층 빛내주었습니다. 올해 나이가 59살인데 그런 감성을 지녔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수업시간이라고 학생들은 예의를 갖춰 나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바로 뒤에 반장은 모두 종이컵에 맥주를 따르게 하고 한 마디를 했습니다. 이제 2개월이 지나면 졸업을 하는데, 이렇게 10월의 마지막 밤 추억을 마련해준 선생님이 고맙다며, 다 함께 건배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반장은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부르자고 말했습니다. 가사를 모르는 학생들은 휴대폰에서 찾아 큰소리로 그 노래를 힘차게 불렀습니다. 우리들은 정담을 서로 나눴습니다. 나는 그러면서도 '9시부터는 수업을 해야 할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9시 될 때에 우리 이만 정리하고 수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 말에 일부 학생은 따르려고 했으나 반장을 비롯해서 거의 다 오늘만큼은 수업을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공부도 좋지만 우리에게도 이런 추억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조금만 더 음식과 대화를 나눈 뒤에 노래방에 가자고 했습니다. 나는 이 분위기를 깨뜨리면서 수업을 나가는 강심장을 갖지 못한지라 학생들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8시 30분에 시작해서 9시 50분에 수업이 끝나는데, 그날은 20분 먼저 교실에서 나왔습니다. 1학년 교실 문을 조용히 두드려서 선생님께 사정을 말하고 학생들을 따라갔습니다. 열두 명 가운데 사정이 있는 세 명은 가지 않고 아홉 명이 가까이에 있는 노래방에 갔습니다.

59살부터 70살까지 늦깎이 학생들은 마이크를 잡고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가볍게 몸을 흔들었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거의 다 70년대와 80년대에 유행했던 것이라서 거의 다 아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과 나는 목청껏 같이 불렀습니다. 나도 손뼉을 치고 가끔 탬버린을 흔들며 분위기를 맞춰주었습니다. 하지만 춤은 아무리 해도 안 돼서 두 팔만 올렸다가 내렸다가 했습니다.

열 명이나 있어서 신청한 곡이 줄을 이었습니다. 우리는 쉼 없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습니다. 서로 일어나서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를 때 나는 옆에 있는 영이씨에게 저 노래도 70년대와 80년대에 우리가 많이 불렀던 노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이 한창 공부할 때에 저는 공장에 다녔어요."

그 순간 나는 무엇인가 한 대 꽝 하고 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그 무엇으로라도 달랠 수 없을 정도로 몹시 아팠습니다. 학생들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즐거운 기분이 싹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빨리 나오고 싶었습니다.

영희씨의 그 말 한 마디는 나에게 언젠가부터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던 그녀의 아픔을 다시 상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말은 맞습니다. 내가 부모님을 잘 만나서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때에, 그녀는 초등학교만 나와서 불우한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공장에 들어가서 힘들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영이씨만이 아닙니다. 거기 있는 학생들은 다 그렇게 10대와 20대를 살았습니다. 예쁜 교복을 입고 멋있는 가방을 들고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을 얼마나 부러워했을까요? 집안이 가난해서 공장에 들어가 고된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던 자신들의 처지를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까요?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그동안 학생들에게 가깝게 다가가려고 나름 신경을 썼지만 그 벽은 여전히 높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나는 영이씨의 그 말을 듣고 힘을 내서 가면을 썼습니다. 억지로 몸을 더 흔들었습니다. 얼굴에 더 밝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학생들과 더 눈을 맞추면서 악을 쓰듯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치 그래야만 그들의 세계에 나도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태그:#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