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보다 경제개혁이 힘들다. 정치개혁에 동조하던 쪽도 돈 문제가 걸린 사안에서는 태도가 바뀌기 쉽다. 개혁에 대한 저항력도 경제개혁 쪽이 훨씬 강하다. 배우 한석규·이제훈이 주연한 2014년 SBS 사극 <비밀의 문> 제12회에서도 그런 장면이 있었다.
 
영조시대의 대표적 개혁인 균역법에 관한 장면이었다. 균역법은 병역을 대체하는 군포 납부와 관련해 평민의 납부 부담을 16개월 2포에서 12개월 1포로 줄여주는 한편, 그동안 납부를 회피해온 상류층(부유층 양반 포함)한테도 군포 1포를 부과하는 법이었다.
 
균역법은 병역뿐 아니라 경제와도 직결된 사안이었다. 군포 납부의 형평성을 제고함으로써, 요즘 식으로 말하면 경제민주화도 달성하고 국가재정 확충도 도모하는 법률이었다. 당연히, 저항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비밀의 문> 제12회에 나온 것은 그런 장면이다. 
 
 경제개혁을 반대하는 유생들.

경제개혁을 반대하는 유생들. ⓒ SBS

   
 사도세자(이제훈 분)와 영조(한석규 분).

사도세자(이제훈 분)와 영조(한석규 분). ⓒ SBS

  
이 장면에서는, 대궐로 몰려든 유생들이 연좌 시위를 하고, 영조(한석규 분)가 사도세자(이제훈 분) 및 신하들을 대동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모습이 나온다. 영조와 유생들 사이에 오고간 대화들을 듣노라면, 양쪽이 군신관계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유생 중 하나는 "반상(양반과 평민)이 유별하거늘 어찌 쌍것들과 한 묶음이 된다 말입니까"라고 항의했고, 영조는 "나라 지키는 데 신분이 무슨 소용이냐?"며 "이 나라가 어디 양반만의 나라이더냐?"고 호통쳤다.
 
그러자 "군포를 내는 것은 쌍것들의 몫이옵니다"라며 "양반은 그들을 지도하고 순화하는 것으로써 나라를 지키면 되는 것이옵니다"라는 외침이 나왔다. 자기들한테는 돈 거둘 생각을 말라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감각으로 볼 때도 꽤 억지스러운 주장이었다. 이런 억지를 임금한테 부릴 수 있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영조 옆에 서 있던 인물이 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서 있는 호조판서 박문수(이원종 분)다. 이 드라마에서는 비중이 낮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박문수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 균역법을 비롯한 경제정책에서 특히 그랬다.
 
그래서 박문수에 대한 기득권층의 공격은 영조에 대판 비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박문수는 경제개혁에 대한 이 시대 기득권층의 비난을 한몸에 받고 살았다. 문재인 정부의 장하성·김동연 라인이 받은 것 이상으로 욕을 먹고 살았던 것이다. 
 
 호조판서 박문수(이원종 분).

호조판서 박문수(이원종 분). ⓒ SBS

   
박문수 하면 흔히 '암행어사 박문수'를 연상하지만, 그가 암행어사를 한 적은 없었다. 어사였던 적은 있다. 어사는 왕명을 받고 도성 밖으로 출장나가는 신하였다. 박문수는 도합 4차례 약 1년간 어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암행어사로 활동한 적은 없다.
 
실제와 달리 암행어사로 잘못 알려진 이유가 있다. 박문수는 1691년 출생해 1756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암행어사로 알려진 것은 사후 1세기 뒤인 19세기부터다. 조선왕조의 부패가 극심해 서민 경제가 피폐해진 때부터 '암행어사 박문수'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 전부터 박문수는 서민경제를 생각하는 강직한 인물로 유명했었다. 19세기에 서민경제가 악화되자, 그 같은 박문수의 이미지에 암행어사 이미지가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정의로운 인물 '박문수'한테, 정의로운 직업 '암행어사' 이미지가 겹쳐진 것이다. 정의로운 영웅의 출현을 갈구하는 대중의 욕구가 그런 '역사왜곡'을 낳았던 것이다.
 
박문수에 대한 역사왜곡은 19세기뿐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지나 박정희 독재정권 때도 계속 이어졌다. 박문수 같은 영웅이 나타나 세상을 말끔히 정리해줬으면 하는 욕구가 갈수록 강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김백철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의 <박문수, 18세기 탕평 관료의 이상과 현실>은 이렇게 설명한다.
 
"19세기부터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300여 편이 넘는 박문수 설화들을 살펴보면, 영조·정조 연간에 파견된 수많은 어사 이야기가 박문수라는 대표 인물을 통해서 집약된 듯하다. 특히, 주요 내용은 기득권층으로 규정된 부패한 관리에 홀로 맞서 통쾌한 일격을 날리고 억울한 이들을 구원하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거의 실현 불가능한 영웅의 일대기 속에서 대리 만족을 찾고자 하는 염원이 깃들어 있다. 이는 세도정치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군사 독재기를 거치면서, 부조리한 현실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영웅의 존재를 간절히 바란 데서 비롯된 듯하다."
 
박문수가 사후에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살아생전에 서민들을 위한 경제개혁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는 존재감이 약했지만, 18세기 전반을 살았던 서민들한테는 그래서 존경스러운 관료였다.
 
존경스러운 관료였다는 말은 일반 백성들한테나 해당된다. 기득권층한테는 당연히, 아니었다. 기득권층은 박문수한테 공격을 퍼부었다. 장하성·김동연 경제 라인에 대한 자유한국당의 공세는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박문수는 복지정책에 정성을 쏟았다. 그런데 그의 방법은 좀 독특했다. 자기 사재를 복지에 쓰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 돈을 쓸 때도 기존 관료들과 달랐다.
 
그는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복지에 사용하는 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장사를 벌인 뒤 그 수익을 복지에 썼다. 정부 소유의 소금을 구워 판매한 돈으로 곡식을 사서 복지 재원으로 활용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복지 재원을 마련할 공기업을 만들고 여기서 생긴 수익을 복지에 사용했던 것이다.
 
음력으로 영조 18년 3월 29일자(양력 1742년 5월 3일자) <영조실록>에서는 "소금 굽는 일을 민응수와 박문수에게 각각 관장하게 하되 그들이 재량껏 판단케 해서 재정을 넉넉히 하는 방도를 추진하자고 요청하자, 임금이 윤허했다"고 말한다.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복지정책을 펼쳤으니, 영조 임금한테는 '아주 예쁜' 신하일 수밖에 없었다. 이복형 경종 밑에서 왕세제(후계자) 생활을 할 때부터 박문수를 옆에 둔 영조가 오랫동안 그를 신임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임금 돈을 적게 쓰면서도 임금을 빛나게 해주는 신하였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에서 찍은 ‘박문수 길.’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에서 찍은 ‘박문수 길.’ ⓒ 김종성

  
하지만 영조한테는 예뻤지만, 양반 지주들한테는 조금도 예쁘지 않았다. 세금을 추가로 걷지 않고 복지정책을 추진한다 해도 그랬다. 나랏돈을 그런 데 쓰는 것 자체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사재를 털어 복지 재원으로 쓰는 박문수의 행동이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양반 지주들한테는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기득권층은 박문수를 음해했다.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 유생들이 균역법을 비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살벌하게 음해했다. 박문수가 겉으로는 복지 사무를 처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소금 판 돈을 착복하고 있다는 식의 말을 퍼트린 것이다.
 
일례로, 영조 19년 2월 2일자(1743년 2월 26일자) <영조실록>에 따르면, 부사과(종6품 무관) 홍계희는 "(박문수가) 어염(魚鹽)의 이익을 독점하여 한 도(道)의 재화를 마음대로 썼다"는 상소문을 영조에게 제출하했다. 염전 사업으로 생긴 돈을 박문수가 복지에 안 쓰고 개인적으로 착복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바닷가 염전에서 천일염을 만들지만, 당시에는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추출했다. 바닷물을 끓이자면, 목재가 필요했다. 기득권층은 이 점도 박문수 공격에 활용했다. 그 많은 나무를 어떻게 구할 거냐며 공격을 가했다. 비현실적인 정책으로 깎아내리고자 그런 공격을 했던 것이다.
 
이뿐 아니었다. 박문수가 역적 모의를 하고 있다는 음해까지 나왔다. 기득권층은 역적 이인좌와 박문수를 연결시켰다. 영조 등극 4년 뒤인 1728년에 청주성을 점령하고 한양으로 진격했던 이인좌를 박문수와 같은 편으로 만든 것이다.
 
박문수는 이인좌의 난 때 진압군으로 참여해 공을 세웠다. 그런데도 '박문수가 실은 이인좌 편이었다'느니 '이인좌 군영에서 박문수를 본 사람이 있다'느니 하는 식의 터무니없는 음해가 나왔다.
 
박문수는 집권당인 노론당 소속이 아니라 소수파인 소론당 출신이었다. 또 영조한테만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에 자기 세력을 구축할 여력이 없었다. 거기다가, 지나칠 정도로 강직했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도 별로 없었다.
 
죽은 뒤에는 후세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지만, 당대에는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당대에도 일반 백성들은 좋아했지만, 그들의 지지는 정치세력화로 연결되지 못했다. 이랬기 때문에 역모를 꾸밀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기득권층은 그를 역적으로 몰아세웠다. 세상을 떠나기 전년도인 64세 때도 그는 역모 혐의를 받았다. 영조가 굳게 신임하지 않았다면, 편히 죽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서민 가계를 살리고 재벌을 약화시키기 위한 지금 대한민국의 경제개혁도 만만치 않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관료들은 특히 더 그렇다. 영조시대 박문수도 그랬다. 서민 복지에 신경을 쓴다는 그 점 하나 때문에, 그는 뭘 해도 항상 욕을 먹으며 평생을 살아야 했다.
경제민주화 박문수 장하성 김동연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