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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수치, 일본-메콩 정상회의 관련 공동기자회견
 아웅산 수치, 일본-메콩 정상회의 관련 공동기자회견
ⓒ AP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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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버마)의 대표적 인물인 아웅산 수치(수지)의 국제적 위상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로힝야족에 대한 군부의 탄압을 묵인했다는 이유다.

2017년 11월에는 영국 옥스퍼드시가 명예시민훈장을 박탈했고, 12월에는 아일랜드 수도인 더블린시가 명예시민권을 박탈했다. 올해 3월에는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박물관이 2012년 수여했던 엘리 비젤상을 취소했고, 8월에는 영국 에든버러시가 명예시민권을 박탈했다. 10월에는 캐나다가 명예시민권을 박탈했고, 11월 11일에는 영국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가 2009년 수여했던 양심대사상(최고 상)을 취소했다.

로힝야족은 불교국가 미얀마에서 이슬람을 믿는 소수민족이다. 이들은 영국 식민통치가 시작된 1885년부터 미얀마에 유입됐다. 영국은 로힝야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을 앞세워 다수세력인 미얀마족을 견제했다. 일종의 이이제이 전략으로 미얀마를 식민지배한 영국의 통치 방식에 관해 양승윤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미얀마>는 이렇게 설명한다.
 
"영국은 분할통치정책(divide & rule)을 펴 중심부와 산간지역을 구분해서 각각을 직접 관리하였다. 이렇게 하여 다수족이자 주족인 버마족(미얀마족)을 견제하고자 했다. 또한 영국은 친족, 까친족, 꺼인족 등의 소수 종족들에게는 군 입대의 기회를 제공한 반면, 주족인 버마족은 군입대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버마족의 세력화를 최대한 억제하고자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로힝야족은 미얀마 내에서 영국인에 버금가는 지위를 확보했다. 그래서 미얀마족 입장에서는 영국인 못지않게 로힝야족에 대해서도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생긴 앙금으로 인해 영국 식민통치가 끝난 1948년부터 로힝야족은 미얀마족의 탄압 대상이 됐다. 로힝야족은 1982년에는 미얀마 시민권까지 박탈당했다.

수치와 서방세계를 갈라놓은 핵심 요인

사태가 더 악화된 것은 2016년 10월부터다. 로힝야족이 조직적인 군사적 반격을 가하고 미얀마 정부군이 대규모 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상황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로 인한 유혈 충돌 속에서 수십만의 로힝야족이 미얀마를 탈출했다.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은 2015년 11월 총선에 승리한 데 이어 2016년 3월 대선에서도 승리했다. 미얀마 대통령은 상하 양원의 투표로 선출된다. 이때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은 수치의 운전사 출신인 틴 쩌다. 틴 쩌의 사임으로 올해 3월 열린 대선에서 당선된 인물도 수치의 측근인 윈 민트다.

이렇게 측근들을 내세운 상태에서 수치는 국가자문역 자격으로 국정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군부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긴 하지만, 아웅산 수치가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로힝야족에 대한 박해가 한층 강화된 형태로 전개되고 있으니, 서방세계가 수치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로힝야족에 대한 미얀마의 비인도적 처우는 용납될 수 없다. 수치의 책임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수치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추동하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수치의 대(對)중국 정책이 수치와 서방세계를 갈라놓은 핵심 요인이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11월 28일은 미얀마의 꼰바웅(꽁바웅) 왕조가 멸망한 지 133주년 되는 날이다. 1885년 그날, 미얀마는 영국 식민지로 전락했다. 미얀마가 영국의 표적이 돼 멸망에까지 이른 것은, 1860년대에 영국·러시아·프랑스·미국 등의 대(對)중국 전략이 바뀐 것과 관련이 있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과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중국대륙을 석권하지 못한 서양 국가들은 1860년대에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다. 거대한 중국을 먼저 치기보다는, 중국을 둘러싼 신하국 혹은 변경을 먼저 점령한 뒤에 중국을 공격하자는 목표를 세우게 됐다.

이에 따라 서양 국가들이 주목한 것은 티베트-미얀마-베트남-타이완-오키나와-조선을 연결하는 U자 라인이다. 서양열강은 중국과 U자 라인 사이에 순망치한 관계가 작동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것처럼 U자 라인이 흔들리면 중국 안보도 흔들릴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1866년에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것과 1871년에 미국이 신미양요를 일으킨 것도 이런 전략에 입각한 일이었다. 한국인 역사학자 김기혁이 미국에서 펴낸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최종 단계>(T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에 따르면, 일본이 1870년대에 타이완·오키나와·조선에 대한 공세를 강화한 것도 이 같은 서양의 전략을 모방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U자 라인의 동부인 타이완·오키나와·조선은 서양 국가들의 의도와 다르게 결국 일본 수중에 넘어가게 됐다.
 
청나라를 둘러싼 U자 라인.
 청나라를 둘러싼 U자 라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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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때인 1752년 세워진 미얀마 꼰바웅 왕조는 조선 정조 때인 1790년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체결했다. 미얀마가 청나라의 신하국이 된 것이다. 1993년 발행돼 중국 대학들에서 역사 교재로 사용된 장웨이화(张维华)의 <중국 고대 대외관계사>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는 '고대'가 '고대·중세·근대'의 그 '고대'가 아니라 '과거'나 '옛날'이란 의미로 쓰였다.
 
"1769년, 청나라 정부는 마침내 대학사 부항(傅恒)을 파견해 미얀마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이끌도록 했다. 부항은 군대를 세 길로 나눠 함께 전진시키며 미얀마 진입을 지휘했다. 미얀마 왕인 신퓨신은 두려워서 강화 협상을 요청했다. 그때 청나라 군대도 풍토병에 걸려 더 이상 싸우기 힘들었다."
 
이때의 강화 협상이 발효된 것은 1790년이다. 1790년부터 미얀마 군주는 청나라가 책봉하는 '미얀마 국왕'의 지위를 갖게 됐다. 이렇게 생긴 관계는 95년 만인 1885년 미얀마가 영국 식민지가 되면서 깨지고 말았다.

중국과 U자 라인의 순망치한 관계에 대한 서양의 판단은 적중했다. 티베트·미얀마·베트남·타이완·오키나와가 서양 혹은 일본 수중에 넘어간 뒤인 1910년 조선이 멸망함으로써, 청나라와 U자 라인의 동맹관계는 최종적으로 소멸됐다. 그러자 2년 뒤에 청나라는 신해혁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수치의 균형외교를 바라보는 시각

U자 라인에 대한 공략으로 단절된 미얀마와 중국의 관계는, 미얀마 독립 23년 뒤인 1971년 회복됐다. 네윈 장군이 미얀마를 통치하고 있을 때였다. 1885년까지 있었던 중국과 미얀마의 수직적 상하관계가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서방세계의 눈에는 미얀마가 마치 U자 라인으로 복귀된 것처럼 비칠 만도 했다. 미국과 소련 어느 쪽에도 가세하지 않겠다는 비동맹노선을 철저히 이행해온 미얀마가 중국과 밀착하기 시작했으니, 미국 등 서방세계한테는 그렇게 보일만도 했다. 그래서 서방세계는 미얀마 군부정권을 압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얀마가 서방세계의 경제제재를 받는 동안에 중국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미얀마 상품을 수입하고 군사무기를 수출했다. 이런 속에서 미얀마는 중국의 인도양 진출에 교두보가 되어주었다. 그간 미국 등 서방세계가 미얀마를 압박하고 아웅산 수치를 후원한 것은 인권문제 때문인 측면도 있었지만, 미얀마 군부의 반미노선과 친중국 노선 때문인 측면도 컸다.

미국은 박정희 군사독재를 후원한 나라다. 전근대적인 일본의 천황제도 지켜준 나라다. 미국이 우선시하는 것이 인권이나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국의 국익이라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미국이 미얀마 군부를 싫어했던 핵심적 이유는 그들이 미국의 국익 증진에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웅산 수치를 열렬히 후원했던 미국 등 서방세계가 근래 들어 태도를 바꾼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로힝야족의 인권 상황에 대한 우려 때문인 측면도 있지만, 수치의 외교노선에 대한 우려 때문인 측면도 크다. 집권한 뒤에 그가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노선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다 지켜봤듯이 수치는 서방세계의 지원으로 지금의 위치까지 오게 됐다. 서방세계의 전폭적 후원이 있었기에, 군부 정권의 탄압을 이겨내고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미얀마 민주화세력과 그 자신의 노력이 가장 컸겠지만, 국제사회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아웅산 수치도 있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서방세계 입장에서는, 수치의 집권과 더불어 미얀마 외교노선이 바뀌리라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미얀마가 더 이상 중국을 돕는 일이 없을 거라고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외의 상황이 나타났다. 수치가 군부정권의 외교노선을 계승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달라진 점은 있다. 수치는 미얀마와 서방세계의 관계도 강화했다. 그래서 수치 입장에서는 "나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추구하고 있다"고 서방세계에 외칠 만도 하다. 하지만, 수치에게 기대감을 크게 가졌던 서방세계로서는 이런 균형외교도 마음에 안 들 수밖에 없다.

균형외교란 표현은 수치와 서방세계의 관계를 최대한 좋게 평가했을 때나 가능한 표현이다. 엄밀히 따지면, 수치의 외교노선은 중국 우선주의다. 이 점은 2016년 대선 직후에 보여준 일련의 행보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은 아웅산 수치한테는 적이었다. 미얀마 군부정권을 도운 나라다. 중국은 미얀마 문제에서만큼은 아웅산 수치와 서방세계의 공동의 적이었다. 그런데 대선 승리 직후, 수치는 '어제의 적'과 과감하게 손을 잡았다.

2016년 3월 31일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외교부 장관이 된 그는, 불과 닷새 뒤인 4월 5일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을 초청했다. 외교부 장관으로서 회담을 가질 첫 번째 카운트파트로 중국 외교부장을 선택한 것이다. 뒤이어 8월에는 직접 베이징으로 날아가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를 만났다. 중국은 그를 총리급으로 한껏 예우했다. 이렇게 중국을 먼저 방문한 뒤인 그 해 9월 미국을 방문했다.

군부정권의 중국 우선주의 외교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서방세계 입장에서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안문석 전북대 정외과 교수의 논문 '아웅산 수치의 균형외교'는 이렇게 말한다. <인물과 사상> 2016년 11월호에 실린 글이다.
 
"중국은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미얀마 교역의 제1파트너이고, 미얀마가 유치한 외자 총액의 40퍼센트를 차지한다. 장래 미얀마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치는 중국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뒤 수치는 시진핑 주석의 세계 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에도 협조하고 있다. 일대일로는 육로와 해로를 잇는 신개념 실크로드(비단길)를 만들어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만들겠다는 웅대한 전략이다. 수치는 중국이 미얀마를 거쳐 인도와 인도양 쪽으로 일대일로 라인을 확장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

서방 세계가 지금 수치를 압박하는 것은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같은 수치의 외교노선에 실망했기 때문인 측면도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수치를 열렬히 후원했던 그들은 수치의 실용주의 외교를 보고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이 한 단계 더 심화되다 보니, 수치에 대한 서방세계의 압박에 명분과 힘이 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태그:#아웅산 수치, #아웅산 수지, #로힝야족, #일대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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