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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 고기, 술, 건배사... 연말 하면 떠오르는 것들입니다. 기름과 숙취에 찌들지 않고 한 해를 마무리할 순 없을까요? 좀 더 색다르고 재밌게 연말을 나는 법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잘 하는 일 한 가지만 하면 된다고요?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로 먹고 산다. 남의 돈으로 바꿀 만한 지식, 기술이 교육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잘 하는 일 한 가지로 돈을 받고, 이 돈으로 생활 필수품들을 샀다.

생활 필수품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식재료, 핸드폰, 자동차, 세탁기처럼 흙에서 기르고 공장에서 만든 유형(有形)의 재화. 다른 하나는 외식, 영화, 오감놀이센터, 헬스클럽 같은 무형(無形)의 서비스.

유무형의 모든 것을 돈과 교환했다. 가르치는 일을 제외한 모든 것에 잘 할 자신이 없었기에,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팽이버섯이나 소고기, 아니면 자동차를 내 손으로 길러내고 만들기에는 어려웠다.
 
영아기 교육을 위해 오감 센터를 전전했다.
 영아기 교육을 위해 오감 센터를 전전했다.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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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산하지 못 하는 것은 농수산물이나 공산품 뿐만 아니었다. 맛있는 식사, 즐거운 여가, 심지어 돌도 안 치른 딸아이 교육까지도 돈으로 바꿨다. 편리하고,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먹거리, 즐거움, 그리고 어린 아이 교육은 직접 들이는 손품에 따라 덜 완벽해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전문가의 빈틈없는 서비스를 만끽했다.

한 가지만 잘 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분업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산업 시대였기 때문이다. 분업은 가장 짧은 시간에 최대 성과를 내는 효율 만점 시스템이다. 게다가 좋아하는 일만 할 줄 알아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매력적이다.

단점은 외부 경제 상황에 쉽게 흔들린다는 점이다. 이는 곧 실직 혹은 건강 이상 같은 개인적 변화, 경제공황 같은 사회적 변화에 삶을 송두리째 흔들릴 수도 있음을 뜻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월급 받는 안락한 삶 이면에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내가 있었다.
 
기술 혁명은 조만간 수십억 인간을 고용 시장에서 몰아내고, 막대한 규모의 새로운 무용(無用) 계급을 만들어낼지 모른다.
-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21세기에는 전 세계 인구 80%의 노동력이 더이상 필요 없게 된다는 노동의 미래 회의(*마가릿 대처, 제러미 러프킨을 비롯한 다수 노벨상 수상자들과 경제학자들이 모여 미하일 고르바초프 재단 주최로 열린 회의)를 비롯해, 역사 학자 유발 하라리가 주장하는 무관계급까지. 일자리를 위협하는 새로운 정보가 속속 들린다. 언젠가 나의 노동력을 돈으로 못 바꿀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분필을 더 이상 잡을 수 없게 되어 돈을 벌지 못 하면 내 삶의 질은 추락할 것이다. 그동안 먹을 것부터 휴가까지 다 돈으로 해결해왔으니, 돈을 못 버는 상황은 삶의 실패를 뜻했다.

외부 상황에도 꿋꿋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바로 '자급자족' 하는 삶이다.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구할 수 있다면 눈 앞의 금리 인상이나 가까운 미래의 4차 산업 혁명에 따른 일자리 시장 변화에도 우리 삶은 덜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농사 지을 땅도 없고, 그릇을 흙으로 빚어 구워 쓰며 완벽하게 자급자족 할 자신도 없다.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돈으로 바꾸던 일들을 직접 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급자족'이라면, 어설퍼도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다. 일단 그것부터라도 실천하겠노라 다짐했다.

그 첫 번째가 외식 대신 가능한 집밥을 먹는 것이고, 두 번째로 장난감이나 키즈카페 대신 부모가 몸으로 놀아주는 것이며, 세 번째로 전문 놀이·문화 시설보다 여가를 내 힘으로 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와 연말. 이때야말로 자급자족 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연말 여가 자급자족하기
 
완벽한 크리스마스
 완벽한 크리스마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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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완벽한 연말'에 대한 겉치레를 버려야 했다. 돈을 쓰지 않고, 전문가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음식 맛과 화려함은 떨어질 것이다. 덜 완벽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야말로 '여가 자급자족'의 첫걸음이다.

멋진 크리스마스 트리와 유행하는 캐릭터로 장식된 케이크, 고급 식당의 연말 디너 코스 요리는 분명 완벽하다. 게다가 SNS에 체면치레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완벽함'을 추구하려 들면 멈추기 어렵다. 완벽한 트리 다음에는 완벽한 케이크, 그 다음은 더 완벽한 식당과 선물을 갖춰야 할 거다. 소비를 통해 '더' 잘 하려 하면 할수록 위를 향한 욕구는 끝도 없다.

한정된 돈에서 체면 유지 비용을 들이면 무엇인가는 내려놓아야 한다. 12월 동안 좀 있어 보이려다가는 1월을 더 가난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흥청망청 지출한 후, 얇아진 지갑 때문에 씁쓸해지는 뒤끝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그러므로 올 연말에는 멋드러진 크리스마스 트리와 고급 음식점의 두툼한 스테이크를 과감히 배제하기로 했다.

그동안 즐거움을 위해 큰 맘 먹고 소비했다. 다음 달에 쪼들릴지언정, 현재의 즐거움을 일단 누렸다. 심장은 콩닥콩닥 뛰지만 계산원이 모르게 숨은 작게 들이쉬고 손 살짝 떨면서 카드를 긁었다. 올해는 큰 맘 먹고 절약해보려 한다.

와인 한 잔, 치즈 그리고 핸드폰으로 들리는 환희의 송가 정도면 가족들과 한 해를 떠나보낼 분위기는 충분하지 않을까. 추운 겨울을 재미나게 보낼 수 있는 실내 이벤트를 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편안하게 한 해를 마무리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2016년 가족들과 송년회. 케이크와 술 뿐이었지만 여전히 기억에 남는 연말이다.
 2016년 가족들과 송년회. 케이크와 술 뿐이었지만 여전히 기억에 남는 연말이다.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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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닫으려 마음 먹으니 송년 방법들이 제법 떠올랐다. 친구 초대, 가장 좋았던 책 추천, 그리고 그 책의 글귀를 엽서에 써서 선물하기, 소박한 나의 요리, 술, 커피, 양초와 음악.

조용하고 바쁘지 않은 곳에서 1년 동안 함께 해온 가족과 친구들과 한 해를 되돌아 보고 싶다. 서둘러 먹고 다음 손님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하는 바쁜 식당보다 집이 낫겠다.

크리스마스를 명절로 치르는 덴마크 풍경은 한국의 크리스마스 모습과 사뭇 다르다. 새 것보다는 오래된 것,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 자극적인 것보다는 은은한 분위기를 지향하는 덴마크의 '휘게(hygge)' 정서는 크리스마스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크리스마스 D-day 달력을 만들어 한 달 전부터 그날을 기다리며, 아이들이 색종이로 접은 리스와 꺾어온 나뭇가지로 집안을 장식한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부모, 아이, 친구들이 집에 모여 양초를 켜 분위기를 내고, 직접 구운 생강 쿠키와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덴마크인들은 소비를 삼갈수록 더욱 휘겔리(hyggelly)하다고 믿는다. 덴마크는 날씨도 나쁘고, 지하 자원도 부족한 데다가, 물가는 비싸고, 영토도 작다. 겉으로 보면 세계에서 가장 불행할 법도 하다. 그렇지만 가진 것을 탓하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그들의 문화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힐 정도다.

'쫌 다른 연말'을 위해 SNS에 더, 더, 더 소박한 연말을 올려보고 싶다. '쓰지 않는' 연말이야말로, 돈으로 밖에 해결할 줄 모르는 이 시대에 큰 사치가 아닐까.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훌륭한 식당 사진이 넘치는 SNS에서, 있는 그대로의 편안한 연말 모습이야말로 귀하고 독보적인 태도가 될 거라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dahyun0421)에도 실립니다.


태그:#최소한의소비, #쫌다른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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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고, 글 쓰고, 사랑합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을 꿈 꿉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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