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에서 관람한 영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건 때론 조심스럽다. 영화제에서 상영한 영화들은 영화제가 아니면 다시는 못 보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간혹 한국 독립영화 중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먼저 상영한 후 이듬해 개봉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독자의 관심도 유발 등을 고려해서 이럴 때는 언제 리뷰를 써야 할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제에서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았던 영화들, 그러나 개봉 혹은 올해 연말 상영회를 통해 볼 수 있는 영화 3편을 엄선해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 중, <벌새>는 내년 정식으로 극장 개봉을 할 때 제대로 된 리뷰 기사를 쓸 수 있길 바라며, 영화제에서 만난 올해의 영화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사령혼: 죽은 넋>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
 
 중국 다큐멘터리스트 왕빙의 <사령혼:죽은 넋>(2018) 한 장면

중국 다큐멘터리스트 왕빙의 <사령혼:죽은 넋>(2018) 한 장면 ⓒ 부산국제영화제

 
전 세계 '씨네 필'들이 주목하는 다큐멘터리스트 왕빙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의 영화 또한 여느 다른 감독의 작품처럼 2시간 안팎의 러닝타임으로 만들어지지만, 마치 4~5시간의 영화를 본 만큼의 압박감과 피로도를 선사한다. 2시간짜리 영화로 마치 4~5시간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엄청난 마법을 부리는 왕빙이 <칠서구>(2003) 이후 15년 만에 다시 러닝타임 9시간에 육박하는 어마무시한 영화를 들고 나타났다. 

러닝타임 총 496분. 이 엄청난 길이를 자랑하는 <사령혼: 죽은 넋>(2018)은 총 3부작으로 기획된 전체 <사령혼>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즉슨 <사령혼: 죽은 넋> 같은 8~9시간짜리 영화를 2번 더 봐야 사령혼 전체를 본다는 말과 같다. 

촬영 분량 600시간, 영화에 참여한 인터뷰이 수백 명을 고려한다고 해도, 구태여 8~9시간짜리 영화를 세 개나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일단 <사령혼: 죽은 넋>을 보게 되면 왕빙 감독이 무척 긴 러닝타임을 고집하게 된 이유에 공감할 것이다.

<사령혼: 죽은 넋>은 1950년대 말 중국에서 반 우파 운동이 일어날 당시, 억울하게 우파로 몰려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던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했다. 영화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먹지 못해 굶어 죽기 직전 상황까지 놓였던 참상을 또렷이 기억하는 생존자들의 육성 증언만으로도 마치 그 당시 현장에 있는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감을 안겨 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들의 육성 증언을 담은 클로드 란즈만의 <쇼아>(1985)와 비견될 만한 역작이다. 1950년대 말 밍수이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끔찍한 기억을 담은 <사령혼: 죽은 넋>은 오는 23일, 29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주최하는 '2018 사사로운 영화리스트'에서 만날 수 있다. 

<행복한 라짜로> 착취의 악순환 속 성인의 기적은 가능할까 
 
 제71회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행복한 라짜로>(2018) 한 장면

제71회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행복한 라짜로>(2018) 한 장면 ⓒ 부산국제영화제

 
올해 열린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이탈리아 출신 여성 감독 알리스 로르바허(로르와처)의 <행복한 라짜로>(2018)는 성인 혹은 신의 시선에서 인간 세계를 바라보는 것 같은 서늘한 우화다. 악명 높은 후작 부인의 담배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라짜로는 그를 우습게 아는 다른 소작농들의 무리한 장난과 요구에도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린 적이 없다. 그는 마치 태생적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섬김을 실천하는 성인을 보는 것 같다. 

후작 부인과 마을 사람들의 괴롭힘과 착취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던 라짜로는 어머니 후작부인에게 반기를 들고 싶은 탕크레디의 가짜 유괴 계획에 동참하게 되고, 그 때문에 후작 부인의 농장 또한 산산조각 나게 된다. 십수 년이 지난 후,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농장을 떠나 뿔뿔이 흩어진 마을 사람들에 앞에 나타난 라짜로. 마을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은 후작 부인의 악행이 널리 알려져 무사히 농장을 떠날 수 있었지만, 오히려 소작농 시절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과거 마을 사람을 앞에서 라짜로는 기적을 행할 수 있을까. 

마을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후작 부인은 이런 대사를 남긴다. "인간은 가축이다. 자유를 풀면 자신이 오히려 노예인 사실을 깨닫는 존재다. 그리고 인간은 계속 착취하는 동물이다." 후작 부인의 주장처럼 <행복한 라짜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강한 존재에게 끊임없이 착취 당하고,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끊임없이 착취하고자 한다. 마을 사람들을 소작농처럼 부린 마님의 착취는 끝났지만, 하층 계급 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며 지탱하는 자본주의의 위력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착취의 악순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어 보이는 현실 속에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신뢰와 믿음, 유대가 가능할까. 현재 유럽 영화를 이끄는 여성 감독의 독특하면서 예리한 시선이 돋보이는 <행복한 라짜로>는 오는 22일부터 1월 6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2018 사사로운 영화리스트' 상영회에서 관람할 수 있다. 

<벌새> '82년생 김지영'과는 또 다른, 1980년대생 여성들의 성장담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상 수상작 <벌새>(2018) 한 장면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상 수상작 <벌새>(2018) 한 장면 ⓒ 콘텐츠판다

 
김보라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영화 <벌새>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 서울 강남 대치동에 살았던 15살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성장 영화다. 공부를 못해서 다리 건너 학교에 다니는 날라리 첫째 언니와 공부를 잘하지만 폭력적인 성향이 있는 둘째 오빠 틈바구니 속에 호된 성장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는 은희(박지후 분)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유일한 어른 김영지(김새벽 분)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2000)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벌새>는 <하나 그리고 둘>에서 카메라를 통해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뒷모습을 열심히 찍었던 양양이 그랬던 것처럼, 15살 소녀 은희의 눈으로 김일성이 사망하고 성수대교가 무너진 당시 시대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1990년대 강남에서 살았던 여중생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영화는 그 디테일한 설정에 있어 같은 시대를 겪었던 비슷한 또래 여성들의 무한 공감을 자아낸다. 

방앗간 장사로 바쁜 부모의 방치 속에서 늘 외로웠던 은희는 영지 선생님을 통해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터득하게 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며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 어린 벌새에서 자기 자신의 중심을 잡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성숙한 존재로 변모하게 된다. 여성의 시선에서 여성의 삶을 바라보는 성숙한 시선과 태도가 빛나는 올해의 발견이다.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상 수상작 영화 <벌새>(2018) 한 장면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상 수상작 영화 <벌새>(2018) 한 장면 ⓒ 콘텐츠판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과 KNN관객상을 수상하고,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새로운선택상, 집행위원회 특별상(배우 김새벽)을 수상한 <벌새>는 내년 개봉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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