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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초등학생이 교실에서 학교 급식 시간에 젓가락으로 음식을 찍어먹고 있다.
 한 초등학생이 교실에서 학교 급식 시간에 젓가락으로 음식을 찍어먹고 있다.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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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점심시간. 교실에 있는 20여 명의 학생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젓가락 위쪽이 아닌 아래쪽을 잡고 있다. 11자 형태가 아닌 X자로 젓가락질을 틀리게 하는 아이도 절반에 이르렀다. 분명 젓가락인데 포크처럼 반찬을 찍어먹는 아이도 눈에 보인다. 서너 명의 아이는 아예 젓가락을 책상 위에 놔둔 채 숟가락으로만 밥과 반찬을 떠먹고 있다.

젓가락을 포크처럼... 젓가락 팽개친 아이들

서울 Y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점심 급식 먹는 학생들의 모습'이다. 이 아이들의 공통점은 어른들이 쓰는 21cm 젓가락을 손에 쥐고 있다는 것. 시중에서 파는 아동용 16cm 크기의 젓가락은 없었다.

이런 사정은 전국 5000여 개에 이르는 초등학교가 비슷하다. 학생이 대부분인 학교에서 어른용 젓가락만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부 초등학교 병설유치원도 마찬가지. 유치원생에게도 어른용 젓가락을 주는 학교가 상당수라는 게 유치원 교사들의 설명이다. 인천의 한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서 일하는 A교사는 "우리 유치원에도 초등학생과 똑같은 크기의 젓가락이 급식에 나오는데, 바로 어른용 젓가락"이라면서 "그래서 포크 등을 집에서 갖고 오도록 학부모에게 요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예비 초등학교 학부모들을 위한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어김없이 당부한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어른용 수저 사용법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는 어른 수저만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초등학교 예비 학부모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자녀에게 어른 수저 잡는 법을 연습시킨다. 아이들 손 크기에 수저 크기를 맞춰야 하는데 수저 크기에 아이들 손을 맞추는 거꾸로 된 상황이 벌어지는 것.

이런 형편을 학교 안에서 바꾸기 위해 노력하던 한 초등교사가 지난 12월 11일 국가인권위에 "초등학생들에게 아동용 수저를 제공해 주세요"란 제목의 진정서를 냈다. 바로 오문봉 교사(인천가원초)다.

오 교사는 이 진정서에서 '피해자 정보'란에 '전국 초등학생들'이라고 적었다. '인권침해자'로는 '교육부장관'을 지목했다. 오 교사가 '인권침해나 차별행위'라고 신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재 전국 초등학교에서 교직원들과 초등학생들에게 제공되는 수저 길이는 숟가락 20~22cm, 젓가락 21~22cm다. 교직원과 초등학생 1~6학년이 동일한 (어른용) 수저를 제공 받아 사용하는 것이다. 왜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신체조건에 맞는 수저를 제공하지 못하고, 교직원의 신체조건에 맞는 수저를 제공하는 것인가? 오히려 시중에 판매되는 식품들 중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많이 애용하는 식품에 제공되는 수저는 아동용에 맞춰져 있다." 
 
오문봉 교사가 인권위에 낸 진정서 내용.(원문을 바탕으로 기자가 재편집한 것임).
 오문봉 교사가 인권위에 낸 진정서 내용.(원문을 바탕으로 기자가 재편집한 것임).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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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교사는 기자와 만나 "교사로서 교육운동을 하면서 2006년까지는 줄곧 학교에서 수저 제공하기 운동을 펼쳤는데 그때는 웃음거리가 됐을 정도"라면서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학교가 학생들로 하여금 수저를 갖고 오도록 했는데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러던 것이 2006년 7월 한국소비자보호원이 '초등학생 수저집에서 식중독균을 대거 검출했다'고 발표하면서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대부분의 시도교육청이 전격적으로 학교에서 학생용 수저를 제공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오 교사는 "이제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 손 크기에 맞는 수저를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며 당연한 것 아니냐"고 강조했다.

진정서 낸 오문봉 교사 "아이들 손 크기에 수저 맞추는 건 당연"

여느 학교와 달리 서울 S초등학교는 1~2학년에겐 작은 젓가락, 나머지 학년은 작은 젓가락과 큰 젓가락 가운데 하나를 고르도록 하고 있다. 학생들 손 크기에 젓가락 크기를 맞춘 것이다.

이 학교 관계자는 "의사표현을 명확하게 할 수 없는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유치원생에게 큰 수저만을 제공하며 밥을 먹도록 하는 것은 학생들에 대한 폭력이자 인권침해"라면서 "우리 학교 상황을 볼 때 작은 젓가락을 제공한다고 해서 돈이 훨씬 많이 들거나 급식관리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최근 국가인권위는 오 교사가 낸 '초등학생 맞춤형 수저' 신청 건을 정식 진정사건으로 배당했다. 전국에 있는 수백만 초등학생들의 고사리손. 이 손에 커다란 어른 수저만을 강요하는 일이 사라질 것인지 그 결과가 궁금하다.

태그:#초등학교 급식, #어른용 수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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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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