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서툴지만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성공조차도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계속해서 비범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의 첫 영화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떡잎부터 달랐을까? - 기자 말
 
 <바틀 로켓> 영화 포스터

<바틀 로켓> 영화 포스터 ⓒ Columbia Pictures Corpora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완벽한 세트, 정제되고 철저하게 계산된 카메라의 움직임, 무기력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가진 정서적으로 결핍된 인물들, 등등등.

그의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 스타일을 알아챌 만큼 그는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그의 남다른 스타일은 필모그래피가 하나, 둘 채워짐에 따라 (특히 형식면에서) 구체화되고 유려해지는 했으나,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처음부터 확실히 알고 있었던 감독이다. 

그의 첫 영화 <바틀 로켓>은 대학 때부터 절친한 친구이자 룸메이트였던 오웬 윌슨과 함께 시나리오를 쓴 작품으로 개봉 당시 흥행에는 참패했으나 거장 마틴 스콜세지의 극찬과 함께 영화 마니아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문제작이다. 방황하는 두 청년이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험을 담은 이 영화에서 웨스 앤더슨의 영화적 특징들은 이미 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침입부터 도주까지, 치밀한 계획을 세운 청년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Columbia Pictures Corpora

 
요양원에 입원해 있던 앤소니(루크 윌슨)가 퇴원 하는 날, 그는 자신이 퇴원이 아닌 탈출을 하는 것이라고 믿는 친구 디그넌(오언 윌슨)을 위해 침대 시트를 엮어 밧줄처럼 타고 내려오는 연기를 펼친다. 그 모습을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던 디그넌의 눈에는 흥분과 즐거움이 가득하고, 두 사람의 재회는 마치 <덤 앤 더머>의 두 친구처럼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고 불안하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디그넌은 자신의 75년 인생 계획이 적힌 노트와 그들이 합류할 드림팀 사진을 앤소니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는데, 드림팀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그럴듯한 강도짓에 성공해야한다. 또 다른 친구 밥(로버트 머스그레이브)이 합류하고, 강도를 마치 영화 속 영웅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이들은 운동선수가 경기 전 연습을 하듯 권총 쏘는 연습을 하고, 침입부터 도주까지 나름의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이들이 야심차게 준비한 첫 번째 범죄 장소는 한방을 노리는 강도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서점이다. 게다가 변장이랍시고 복면 대신 코에 테이프를 붙이고, 손에 권총만 들었다 뿐이지 엄마 지갑에 손을 대는 십대와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어설픈 강도짓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들의 첫 번째 범죄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한적한 모텔로 도피한 이들이 성공의 축배를 들며 상황이 잠잠해 지기를 기다리는 동안(누구도 이들을 쫓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앤소니가 파라과이에서 온 청소부 이네즈와 사랑에 빠지고, 밥이 형의 체포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디그넌의 계획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대도'가 되겠다는 디그넌의 꿈이 그의 계획대로 진행될 리는 처음부터 만무했다. 디그넌과 그의 친구들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강도짓이라도 해서 무언가에 열중할 필요가 있었던, 몸은 성인이지만 정신은 아직 덜 성장한 상태와 다름없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강도라는 직업(?)이 가져올 결과들(실패했을 시에는 감옥에 가고 성공하더라도 명예롭지는 못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자기 인생의 목적을 몰랐던 청년의 선택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Columbia Pictures Corpora

 
자신이 병원에 입원한 이유가 과로 때문이었다고 에둘러 설명하는 앤소니에게 그의 여동생은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오빠는 일을 한 적이 없잖아?" 하고 되묻는다. 그렇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그는 직업을 가져본 적도 없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어느 날 아침, 수상스키를 타러 갈 것인지, 그냥 쉬면서 썬탠을 할 것인지 묻는 여자 친구의 질문에 자신은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으며 앞으로 그 어떤 질문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3일 동안 미친 사람처럼 사막을 돌아다니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말하는 그의 얼굴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을 얘기하듯 덤덤하다.

일상의 사소한 선택과 질문조차 제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그에게는 거대하고 중대하게 다가와 그를 피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디그넌의 허무맹랑한 인생계획이 일종의 도피처로 여겨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네즈와의 만남, 그녀를 향한 사랑은 그를 몽상에서 깨우고,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앤소니가 무기력하고 바닥 깊이 가라앉아 있는 사람이라면, 디그넌은 공중에 둥둥 떠서 두 발을 바닥에 내딛지 못하는 몽상가다. 그가 대도를 꿈꾸게 된 것은 부자가 되겠다는 욕망에서가 아니라 그가 말하는 드림팀의 리더 헨리(제임스 칸)를 인생의 스승이자 아버지로 여겼기 때문이며 마치 어린 소년이 아버지를 우러러보고 그를 존경하는 것처럼 그는 헨리를 동경하고 그처럼 되고자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마음이 일방통행이라는 것이다. 헨리는 디그넌과 그의 친구들을 자식 대하듯 하나 그에게 디그넌 일당은 너무도 다루기 쉬운 애송이들이자 이용해먹을 먹잇감에 불과하다. 헨리에게 된통 당하고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된 디그넌은 면회를 온 친구들에게 갑작스런 탈출 계획을 알리며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에서 두 다리는 감춘 채 가능하지도 않은 날갯짓을 한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Columbia Pictures Corpora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에서부터 어떻게 살아야할지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선택의 순간들을 잊고,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성취 욕구, 가족들에게 존중받고자 하는 인정 욕구를 채우고자 했던 '도둑질 프로젝트'가 실패했음에도 디그넌은 거기에 굴복하지 않은 것 같다. 앤소니가 사랑으로 무기력을 극복하기는 했으나 그와 친구들은 여전히 대안 없이 떠도는 청춘들이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것이다. 

<바틀 로켓>은 장조처럼 보이지만 실은 단조인 코미디 영화다. 밀려오는 시간, 인생을 어찌하지 못하는 청춘의 방황을 영화는 하나의 모험으로 가볍게 그리고 있다. 우울과 쾌활을 오고가면서도 그 안에 불안은 없다. '우리 요즘 젊은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얘기해보고 거기에 대한 대안을 생각해보자.' 해서 만든 영화가 아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1996년만의 청춘이 아니라 2019년의 청춘이기도 하고, 2030년의 청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Columbia Pictures Corpora

 
마틴 스콜세지가 무명의 영화인들이 만든 이 영화를 보고 환호를 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만큼 <바틀 로켓>은 매력적인 영화다. 소재나 내러티브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으나 역시 스타일, 그리고 첫 장편임에도 그것을 다루는 자연스러운 연출은 보는 사람의 눈을 확실히 사로잡는다.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컷을 나누는 효과를 줌으로써 프레임과 한 컷을 하나의 그림이 아닌 만화의 한 페이지처럼 보일 수 있도록 다양한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것, 빈티지한 소품과 의상 활용, 뮤직비디오로 활용해도 될 만큼 적절한 음악의 사용(이 영화에서는 1960년대 팝 음악을 사용했다)등, 모두 이 영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2~3년을 주기로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 오고 있는 그의 스타일은 더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소위 '대박' 난 영화는 없지만 그의 영화들은 누구보다도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패션, 광고계에서도 그의 감각적인 스타일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열 번째 장편영화를 촬영 중이다. 그의 신작을 기다리고 있다면 결코 <바틀 로켓>을 놓쳐선 안 될 것이다.

추신. 디그넌을 연기한 오웬 윌슨은 이 영화는 물론이고 앤더슨의 초기작들, <로얄 테넌바움>까지 시나리오 집필에 함께 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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