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드라마 <최고의 이혼> 포스터

KBS2 드라마 <최고의 이혼> 포스터 ⓒ KBS

 
'이혼' 이후 가장 가까운 관계라는 '부부 관계'를 끝내면, 관대해진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까? 바짝 붙어있다가 좀 떨어져서 보니, 오히려 대상의 요모조모를 파악하게 됐던 경험은 한 번쯤 있을 것이다. 가까이 두는 순간, 내밀한 감각이 탄생하기도 하지만 시시한 디테일은 안 보이는 일도 있다. 사람마다 개인 차는 있겠지만, 초지일관 치밀하기만도 허술하기만도 어려운 존재다.

상대를 치밀하다고만 혹은 허술하다고만 생각했던, 이혼한 커플이 이혼 후에야 비로소 서로를 다시 탐색하게 된다는 KBS 2TV 드라마 <최고의 이혼>은 제목과 달리 해피엔딩이었다. 김 팍 샜지만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왜? 전자는 '최고의 이혼' 공식을 제시하지 않는 기만적 타이틀이라서. 후자는 나는 왜 이혼하지 않는가에 대한 궁색한 변명을 대신해주고 있어서.

일본 드라마를 리메이크 했기 때문일까. 일본 정서가 간간히 느껴진다. '혼밥' 하는 식당, 독거노인 할머니의 온기 있는 달관, 감정을 지나치게 착취하지 않는 대사 등. 일본 영화를 보는 느낌이 살짝살짝 났다. <최고의 이혼>은 두 커플인 네 '어른 아이'의 성장기다. 나는 유영(이엘)과 장현(손석구)보다 휘루(배두나)와 석무(차태현)에 끌렸다. 그들의 평범함이 좋았다.
 
근거 없는 전설, '상처받은 자 반드시 상처 준다'를 재현하는 유영(이엘)과 장현(손석구) 커플. 이 둘의 근원을 파헤치는 일은 지루하다. 일단 이들의 상처가 결혼을 파국에 이르게 할 만큼의 극단의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크고, 사람을 아프게도 하지만 성숙하게도 하는 상처를 침소봉대하는 서사가, 질소로 과대 포장된 과자 봉지처럼 지나치게 빵빵해서이다. 그런 이유로 유영(이엘)과 장현(손석구)은 패스.

일상을 투닥거리게 만든 희루와 석무의 차이
 
 KBS 드라마 <최고의 이혼>

KBS 드라마 <최고의 이혼>의 한 장면. ⓒ KBS

 
휘루와 석무의 결혼생활은 일상이 '투닥거림'이다. 휘루는 석무의 과도한 지적질에 지친다. 석무는 '이거 아니다 싶은 데'를 발견하는 즉시 달려들어 그 문제점을 짐짓 설명하려 들지만 결국 가르치는 형상이 되고 만다. 반면 석무는 휘루의 지나친 털털함에 싫증이 난 상태다. 휘루는 뭐든 꼼꼼히 계획하고 정리하는 게 잘 안 되기 때문.
 
휘루와 석무의 잦은 투닥거림은, 실은 이들이 쪼잔해서라기 보다 삶을 무척 진지하게 대하기에 일어난다. '무심함을 가장한 진지함'은 이 커플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는 소심한 사람들이 삶을 사랑하는 법 아닐까. 이혼 후 휘루와 석무의 '뜻밖의 탐색'을 가능하게 한 건, 각자 거처를 마련하기 전까지 한 집에 기거하기로 하면서부터다. 좀 별난 이 설정은 매우 흥미롭다. 이혼 후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며 당장 헤어지는 보통의 풍경과 사뭇 다르기 때문일 터다. 휘루와 석무가 서로의 진면목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경위는 홧김에 한 이혼 탓인 듯 싶기도 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사람의 꽤 성숙한 인격에 기인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최고의 이혼'은 쉬이 일어나기 어렵다.

이혼이 어디 쉽기야 한가

영화 <완벽한 타인>은 아무 문제없는 척 연기하며 살아가는 '쇼윈도 부부'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네 커플 누구도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들이 이혼하지 않는 이유는 부부, 가족이 더 이상 정서공동체가 아니라 '경제적 이익 공동체'로 기능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온기를 잃은 서늘한 눈빛을 교환하면서도, 이들은 결코 이혼하지 않는다. 이를 비춰보면, 더 나은 삶을 위한 휘루와 석무의 '최고의 이혼'은 용감한 선택이기도 하다.

휘루와 석무는 부부관계를 절단 내도 크게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다. 아, 물론 잃을 게 없는 커플이 이혼을 쉽게 한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 마시라. 휘루와 석무는 고가의 세간을 갖추고 시작한 것이 아니니 나눌 것도 복잡하지 않다. 조금 더 갖겠다고 으르렁대지도 않는다. 이혼하면서 재산은 물론 공유하던 물건까지 분할하느라 아웅다웅한다는 세간의 이혼담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의 가난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세간을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재산이나 세간으로 벌이는 다툼은 실은 이게 '얼마짜리인데'에서 기인할 테니 말이다. 없으면 의도치 않게 좀 쿨해질 수 있다.
 
이혼 후 알게 된 속마음, 이혼 후 연애담
 
휘루와 석무는 각각 꿈이 있다. 휘루는 꾸준히 동화를 쓰고 있고 석무는 음악을 열망해 한때 밴드를 했다. 덤벙대기 일쑤인 휘루는 알고 보면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짜내는 열정의 소유자였고, '프로 불편러'인 석무는 아름다운 곡을 쓰고 감수성 짙은 노랫말을 붙이는 감성의 담지자였다. 두 사람은 이를 서로 이혼 후에야 알게 된다. 연애를 하면서도 서로 키워왔던 숨겨뒀던 꿈을 얘기하지 않았다는 혹은 못했다는 것이, 이들 연애 서사의 결정적 허점이었다. 즉 서로에 대해 보이는 대로 두었을 뿐, 제대로 볼 도구를 마련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부부가 되기 전 역사와 그로 인한 속내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서로에 대한 진지한 탐색을 결여한, 남들 한다는 대로만 따라한 어설픈 연애는 '최악의 이혼'으로 흘러갈 공산이 다분하다.
 
일상에 개입하는 서로의 잔상을 밀어내지 않고 끌어안으며 성찰하는 휘루와 석무의 이혼 후의 모습은, 득도하는 수행자의 행위를 닮아 있다. 결정적으로 이들의 이혼담이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서로의 깨달음을 나누는 데에 있었다. 서로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이 성숙의 완성이야말로 훌륭한 인격을 보여준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꽤 성숙한 인격을 담보한 휘루와 석무의 '최고의 이혼담'이 쉬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이혼 후에야 비로소 다시 연애를 시작한 셈이다.

이혼하고도 잘 살 수 있어
  
 KBS 드라마 <최고의 이혼>

KBS 드라마 <최고의 이혼>의 한 장면. ⓒ KBS

 
휘루는 동화 작가로 일단 성공하게 되지만, 전업 작가가 되는 길은 아직 요원하다. 하지만 휘루의 담백한 됨됨이와 치밀하진 않아도 유연하고 단단하게 난관에 대처하는 자세는 미래를 기대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석무는 감춰두었던 보물 상자인 음악을 다시 꺼내들면서 공연히 벌주고 있던 지나간 자신과 대면하고 화해한다. 그리고 휘루에 대한 사랑을 다시 발견한다.
 
미숙한 결혼이긴 했지만 세속적 욕망 만을 채우려 작정한 것은 아니었기에, 휘루와 석무는 이혼하고도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그럼 여기서 묻자. 이혼은 휘루와 석무처럼 '최고의 이혼'이어야만 하는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이혼은 그냥 이혼이다. 같이 살 수 없어 헤어지는 것이다. 다만 이혼으로 돌진하더라도 최소한의 완충재를 탑재하고 통과한다면, 서로에게 지독한 상실만 남지 않으란 법도 없지 않겠냐고. <최고의 이혼>은 넌지시 충고를 건네고 있다. 물론 충고란 그 상대가 받을 마음이 있을 때에만 유효하지만.
 
<최고의 이혼>에서 발견한 재미
 
끝으로, <최고의 이혼>을 즐기게 만든 미덕 몇 가지를 언급해보고 싶다. 우선, 고미숙 할머니(문숙)가 보여준 '노인 여성관'에 대해서이다. 고미숙은 '이혼한 자, 불행하다'는 오래된 관념을 간단히 무너뜨렸다. 그녀는 '이혼했음에도'가 아니라 '이혼했기에' 그녀다움을 잃지 않았다. 혼자되어서도 별다를 것 없이 일상을 살아냈고 관계를 만들어 갔다. 이혼한 여성이 파랑새를 쫓다 다시 불행해지는 진부한 설정 따위는 없다. 거리낌 없이 자존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젊은 싱글만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은가.
 
다음은,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정말 대수롭지 않게 제시했다는 점이다. 석무의 누나, 조석영(윤혜경)은 이혼 후 취업을 하게 되면서 초딩 아들 성빈(고재원)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럴 때 보통 드라마들은 친정 어머니에게 손자를 맡기며, 이를 매우 훈훈하게 처리한다. 그러나 <최고의 이혼>은 이런 클리셰를 가볍게 제거한다.
 
휘루의 동생 마루(김혜준)와 동거인 친구 수경(하윤경)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옥탑방에서 마침 이사하려던 참이었다. 이 둘은 애초 일면식도 없으면서 '월세 반띵'이라는 경제적인 이유로 동거를 시작한 가난하지만 발랄한 여성들이다. 석영은 성빈을 같이 돌봐줄 사람이 절실했고, 마루와 수경은 가성비 좋은 주거가 필요했다.

이들은 윈윈 차원에서 쌍방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것이 이들이 식구가 된 이유의 전부이다. 혈연만이 가족을 이룬다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이들은 하나도 심각하지 않게 툭 차버린다. 구성원 누구에게도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서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말끔히 해낸다. '서로에게 우선이 되는' 가족, 신선한 상상력 아닌가?
 
마지막으로 휘루와 석무의 부부 갈등을 다룬 방식을 보자. 이 둘은 '여자가(남자가) 왜 그래?'를 가지고 다투지 않는다. 이들은 갈등의 원인인 서로의 '차이'를, '젠더'가 아닌 서로의 '입장'으로만 다툰다. 또한 남녀 간 삼각, 사각 치정을 얼키고설키게 만들어 스토리를 억지로 끌고 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막장까지 내닫지 않을 수 있었다.

<최고의 이혼>은 사랑스러운 희루와 석무의 이혼 후 연애담뿐 아니라, 무겁지 않게 던지는 '대안적 상황'과 그 안에서 맺어지고 풀어지는 '관계'들을 흥미롭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면서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줄 가장 큰 힘은 '유머'라고 말 건넨다. '인생 뭐 있나요? 너무 그렇게 악바리처럼 살지 말자구요'라고. 듬성듬성 던지는 유머에 간간히 웃음을 터뜨리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리지널 <최고의 이혼>은 어땠을까. 일본판도 한 번 볼까 생각 중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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