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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편집자말]
언젠가 나로서도 참 이해할 수 없는 꿈을 꾸다 잠에서 깬 적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시스젠더'(태어날 때 사회로부터 부여 받은 지정성별과 자신의 성별정체성이 일치하는 경우)와 '성적 지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친구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말을 듣던 누군가가 두 단어가 너무 낯설다고, 내가 말을 너무 어렵게 한다고 말하자 문제는 발생했다. 그 반응에 내가 불쑥 화를 내버린 것이다. 꿈에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너희는 이 단어들이 필요가 없으니까 모르는 거잖아. 평생을 시스젠더나 성적 지향이라는 말을 쓸 일도, 그런 단어가 있어야지만 자기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둔 적이 없잖아. 그런 삶을 산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내 말이 어려운 거잖아. 우리를 다 안다고, 관심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봐. 관심이나 제대로 있었던 적이 있어?"

그렇게 화를 내다 잠에서 깼을 때, 나는 찜찜한 감정에 휩싸였다. 성적소수자 혹은 페미니즘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내가 사용하는 개념들이 낯설고 어렵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다. 사람들은 부가적인 설명을 요청하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내가 먼저 썼던 단어의 의미를 적어두기도 했다.

이 과정은 다소 귀찮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억울하거나 분통이 터지는 경험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나를 포함해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의 모든 분야에 세세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 역시도 어떤 말을 듣거나 글을 읽으며 용어에 대한 설명을 요청한 때가 심심치 않게 있었다.

꿈속에서 내가 화를 냈던 이유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내가 꾸었던 꿈을 계속 곱씹다 결국은 깨달았다. 나에게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운동은 단순히 하나의 '분야'가 아니었고, 그것과 나는 결코 분리될 수 없었다. '그런 삶을 산 적이 없잖아'라는 말에서 이를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사람들이 몰라서 내게 설명을 요구했던 '그 분야'는 나와 내 동료들의 삶 그 자체였다. 어쩌면 나는 무의식 중에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낯설구나. 사람들은 인생 내내 자신의 일상과 무관해서 어쩌면 불필요한 지식을 배우기도 하지만, 결코 옆에 있는 우리는 몰라도 괜찮았구나.

그것이 페미니즘이건 퀴어 이론이건 간에 소수자들이 자기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알아간다는 것은 무척 행복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이름을 찾는 일과 같다. 이름이 없는 존재는 공동체 안에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어떤 이도 그 사람을 부를 수 없고 거꾸로 당사자 역시 누구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수자들은 줄곧 일상에서는 당연히 마주칠 수 없는 외부의 예외적인 존재들로 은유되어 왔다. 페미니스트들은 마녀였고 성소수자들은 변태 혹은 괴물이었다. 하지만 정확한 지식을 배우고 이름을 알게 된다면 일상 밖으로 밀려나 있거나 혹은 죽어있던 나의 일부는 생명을 얻게 된다. 나는 동성애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혹은 누군가는 트랜스젠더로서 페미니스트로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로 산다는 것

하지만 '보편적'이지 않은 말들은 결국 '일상'에서 멀리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편견의 벽을 넘고 무지의 간극을 건너서 그 말들을 쫓아간다. 도서관 서가의 구석진 곳이나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웹페이지와 같은 곳 말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을 때 깨닫는다. 이 사회에서 '보통의 사람들'로 지목되는 이들과 내가 멀리 떨어져 있음을. 나는 그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가지만, 내가 찾아낸 나의 소중한 이름과 스스로를 설명할 언어들이 기껏해야 난해한 외국어 취급을 받는 광경을 마주한다. 소통이 불가능한 언어가 과연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아니, 그 언어는 말하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안길까. 소외와 고독 그리고 좌절감이 아닐까.

어느 순간부터 성소수자 공동체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람을 만날 때, 나는 내가 정말로 하고 싶고 관심이 있는 이야기를 하길 멈췄다. 나의 이름이 그리고 나의 존재가 다시 생경하게 여겨지는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누구도 관심없는 설명을 반복하는 것은 지치는 일이다.

작가 데버라 리비의 자전적인 에세이 <알고 싶지 않은 것들>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당신 작가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받지만 대꾸를 하지 않는다. 속을 밝히기도 멋쩍고 답도 장황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리비는 마음속에 담았던 대답을 이렇게 책에 남긴다.
 
"여성 작가가 문학적인 고찰 (혹은 숲속) 한가운데로 여성 등장인물을 진입시켰는데 이 인물이 예상치도 못한 주변의 온갖 명암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쳐요. 이때 작가는 언어를 새로 발굴해 내야만 하는데, 이 언어란 그 스스로 망상이 아닌 주체가 되는 법을 배우는 과정, 그리고 애초 '사회 구조'가 그를 직조해낸 방식의 매듭을 풀어헤치는 과정과 관련된 언어일 수 밖에 없어요.

이러한 과정을 시도할 때 작가는 몹시 신중하게 움직여야만 해요. 본인부터가 이미 여러 가지 망상을 지니고 있을 테니까요. 실은 신묘하게 접근하는 게 가장 좋은지 몰라요. 작가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에 더해 주체가 되는 법을 터득하기란 무척이나 어렵고 진 빠지는 일이랍니다."

정말로 길다. 하지만 이 문단에는 여성 작가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불필요한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두 번째 문장에서 하품을 하거나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때로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눈을 하고 누군가의 가슴을 할퀸다. 나는 리비가 침묵한 이유를 어쩌면 알 것도 같았다.

초월적인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데버라 리비 <알고 싶지 않은 것들>
 데버라 리비 <알고 싶지 않은 것들>
ⓒ 플레이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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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알고 싶지 않은 것들>에서 데버라 리비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종분리 정책이 한창이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여기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어느 날 밤 경찰에 끌려간다.

어린 리비는 아버지가 감옥 어딘가에서 고문을 받고 결국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임을 안다. 나는 당시 남아공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인종분리 정책에 반대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이 사건이 '소수자'가 단지 '적은 숫자의 사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끌고 가든 무지의 장막을 씌우던 사회는 소수자들을 통제하고 존재를 숨기다 결국 사라지게 만든다. 그들이 실제로 숨을 쉬고 같은 땅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이후 리비는 말을 거의 하지 않게 된다. 그녀는 글을 모르지 않지만 소통을 거부한다. 언어에 거부반응을 일으킨다고 보는 게 정확할지 모르겠다. 왜 안 그러겠는가. 지성과 언어로 신념을 지키고 표현했던 아버지가 어떻게 됐는지를 똑똑히 보았는데 말이다.

이후 어린 리비는 숙모의 집으로 보내져 수녀원 부속학교에 다니게 된다. 말을 하지 않으니 그녀가 언어를 모르리라 생각한 수녀들은 리비에게 알파벳부터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중에 조언 수녀는 리비가 사실은 글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리비가 학교를 떠나는 날 묻는다. 읽고 쓸 줄 안다고 왜 말하지 않았냐고. 어린 리비는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리고 그녀는 책에 조언 수녀가 했던 답을 이렇게 옮겨 적었다.
 
"난 모르겠다고 답했고, 수녀님은 읽고 쓰기처럼 '초월적인'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은 통찰력이 있었다. 내 안에는 글쓰기의 힘을 두려워하는 부분이 분명 있었으니까. 초월적인 것이란 '너머'를 뜻했고 내가 만일 '너머'를 글로 쓸 수 있다면, 그게 정확히 무얼 의미하든 간에, 그럼 난 지금 있는 곳보다 더 나은 곳으로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오늘도 내일도 용감해야 할 이유

이 책의 후반부에 리비는 작가로 사는 것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앞서 나는 중국인 가게 주인에게, 작가가 되고자 나는 끼어들고, 소리 내어 말하고, 목청을 키워 말하고, 그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하고, 그러다가 종국에는 실은 전혀 크지 않은 나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노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누구인지 인식하고 정확한 언어로 명명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문장을 빌려서 말하자면, 소수자들에게 이 과정은 초월하는 일이자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인식의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다. 공동체 내부에 분명 있음에도 여전히 낯설게 여겨지는 존재들에게 이는 필연적인 일이다.

다시금 익숙한 두려움이 느껴진다. '보통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다. 소통이 좌절될 말을 향해 나아가고 싶지도 않고 이를 일상으로 가져오기도 싫다. 소수자로서 나를 그리고 우리를 드러내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쓰고 싶지 않다. 글을 쓰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마주할까 두렵다. 사람들에게 닿기 위해 내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할지 알려주는 표지판을 본 느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려움에 무너져 안주하길 선택한다면 나와 나의 동료들은 여전히 낯설고 불가사의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그런 존재들은 쉽게 오해받고 편견에 갇힌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런 삶은 온전하지 않다.

리비의 아버지가 경찰에 잡혀가고 유모인 마리아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빼앗긴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의 부모도 인종차별에 반대하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나는 역사를 배우고 앞선 세대에도 나와 같은 성소수자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우리가 그들의 삶을 발견하고 이름을 되찾아 주기 전까지 그들은 가십거리나 철저한 외부인 혹은 유령처럼 취급됐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 역시도 엄연히 존재했지만 사회에서 밀려나 은폐되고 사라진 이들이었다. 마리아는 어린 리비에게 말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용감해야 한다, 너뿐 아니라 다른 많은 아이가 용기를 내야해. 그 아이들도 아버지나 어머니를 빼앗겼을 테니까."

오독과 비약을 섞어 말하자면, 나에게 마리아의 이야기는 지금껏 이름이 없어서 존재할 권리를 빼앗기고 사라져 있던 우리를 위해 용기를 내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먼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책에서, 여러 현장에서, 일상에서 마주쳤던 가깝거나 아주 먼 성소수자들을 생각했다.

그래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다만 용감해져야만 하는 이유가 명확히 보였다. 물론 나는 꿈속에서 또 다시 왜 시스젠더 모르냐며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런 꿈을 꾸기 까지 나는 성적소수자인 우리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낯선 존재인지 다시금 확인할지 모른다. 마음에 실망과 좌절이 쌓이면 그런 우리에 대한 말을 하고 글을 쓰기가 꺼려질지 모른다.

하지만 계속 이 문장을 기억하고 싶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용감해야 한다. 용감하게 쓰고 말해야 한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

데버라 리비 지음, 이예원 옮김, 박민정 후기, 플레이타임(2018)


태그:#알고 싶지 않은 것들, #데버라 리비, #성소수자, #언어,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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