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버나움>의 포스터

영화 <가버나움>의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

 
"사는 게 개똥같아."

열받은 12살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부모를 고소한다. "왜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비참한 인생으로 살게 하냐"고, 그 책임을 부모에게 묻기 위해서다. 세상에 무책임한 부모는 많다. 자인이 살고 있는 레바논보다 훨씬 잘 사는 한국에서도 부모 노릇을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자격을 묻는다면 나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부모 있을까? 자인의 분노는 열두 살 만큼 타당하다. 하지만 관객이나 감독의 분노도 그리로 향해야 하는 걸까? 이상하게도 나의 분노는 자인과 같은 지점에 가닿지 못했다.
 
정말 부모가 원죄일까?
  
 <가버나움>의 한 장면

<가버나움>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자인의 부모는 형편없이 무능하다. 자인의 아빠(파디 유세프)는 자신도 부모 잘 만났으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을 거라 항변한다. 정말 그랬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집세를 낼 수 없어 어린 딸을 팔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인의 엄마(카우사르 알 하다드)는 인생의 대부분을 임신한 채로 보낸 듯하다. 아이가 매우 많다.

피임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녀는 임신하면 낳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자인은 엄마가 더는 아이 낳지 않기를 바라지만, 엄마에겐 임신을 중단할 아무 수단이 없다. 이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아이를 신이 주신 선물이라 생각한다. 자인의 부모가 아무리 한심하다 한들 턱없이 많은 아이들의 호구지책과 가난이 만든 존엄의 부재를 부모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자인의 동생 '사하르'(하이타 아이잠)가 위기에 처했다. 고작 11살인데 곧 신부로 팔려갈 판이다. 오갈 데 없는 자인네 식구들의 사정을 이용해 11살짜리 어린 소녀를 그 대가로 취하는 인면수심은 사하르 부모의 무책임보다 사악하다. 레바논에서는 어린 신부와 결혼하는 일이 당연한 혹은 자랑스런 일쯤으로 전시된다. 즉 11살짜리 사하르를 신부로 둔갑시켜 성폭행하고 임신하게 만드는 심각한 인권침해가 레바논에서는 큰 문제도 아닌 일이 된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신의 가호는 약자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결혼 문화' 속에서 오직 자인의 부모만 유죄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 범죄인데 법적 처벌을 받지 않도록 구성된 사회의 관습, 국가의 방관은 왜 책임지지 않는가? 누구도 그가 속한 사회의 규범, 문화와 상관없이 단독으로 정의롭기란 쉽지 않다. 범죄가 '그래도 되는 일'로 구성될 때, 야만은 문화가 된다. 야만이 '문화상대주의'에 갇혀 '그곳에서는 그래도 되는 일'로 묵과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준수해야 하는 규범과 법이 된다.
  
 <가버나움>의 한 장면

<가버나움>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자인은 학교에 가지 못한다. 식료품점에서 배달 일을 해야 한다. 식료품 따위로 임금을 대신 받아 가족의 생계를 돕는다. 동생들과 거리 행상도 한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생활에 보태기 위해서다. 아이를 학교에 안 보내고 노동을 시켜도 부끄러울 일이 아닌 나라에서, 가난에 찌든 어떤 부모가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에 대한 의무감을 가질 수 있을까?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의 기치를 내건 영국은 19세기까지 10살도 채 안 된 어린아이들의 노동이 허용됐다. 아이들은 섬유 노동 심지어 광산 노동까지 감당해야 했다. 아동 노동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나서야 반인권 행위가 주춤할 수 있었다.

한국은 어땠나? 전후 우리나라 산업화를 이끈 노동자 상당수가 10대였다. 1980년대 초까지 저임금 섬유 노동에 배치됐던 여공들 대부분은 10대였다. 당시 어린 노동자들은 '산업 역군'으로 칭송되며 조국의 경제를 견인했다. 한국의 경제 발전은 부끄럽게도 아동과 청소년의 노동 착취에 기대어 가능했지만, 당시의 '반인권'은 '그래도 되는 일'이었다. 이런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러니 자인의 노동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동 노동을 착취해도 죄가 되지 않는 나라에선 '그래도 되는 일'로 무마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노동을 착취해도 어느 누가 감시하지 않고 법으로 제재하지 않는 곳에서, 하루 끼니를 근심해야 하는 부모가 선한 의지의 담지자이기만을 기대한다는 것이 과연 합리적이냐고 묻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이 만들어 전 세계에 판매하는 축구공, 운동화, 옷, 커피 등은 아시아 빈민 아동들의 눈물겨운 노동의 결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짐짓 모른 체 하며 소비한다. 다국적 기업의 약탈적 이익 추구와 우리의 무심한 소비는 자인의 부모보다 윤리적인가?
 
국가는 왜 국민의 존엄을 지키지 않는가?
 
 <가버나움>의 한 장면

<가버나움>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분노로 가출한 자인은 떠돌며 굶주린다. 그러다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불법체류자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을 만나 신세를 진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잘 곳도 없는 자인의 가족과 달리 자동차를 타고 놀이공원에 놀러 올 수 있는 사람들이 '가버나움'에 동시에 존재한다. 먹을 걸 구걸하는 자인에게 라힐은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고, 자인은 그 대가로 라힐의 아기 '요나스'(요르다노스 시프로)를 돌본다.
 
라힐은 불법체류자 신분이라 늘 불안하다. 신분증을 위조하는 브로커는 라힐의 막막한 사정을 알고, 요나스를 넘기라고 종용한다. 아이를 팔라는 얘기다. 요나스의 아빠는 라힐이 임신해 요나스를 낳았는데도 그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 요나스의 생존은 오직 라힐에게만 절박하다.

임신과 출산, 양육의 책임을 오직 약자인 여성에게만 떠넘기고, 이 도시의 남성들은 제 살길만 찾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아기를 시장에 팔아먹으려 한다. 가버나움에서는 '부정의'가 일상이다. 양심을 지키게 하는 수단이 신의 가호나 인간의 선한 의지 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자인의 나이를 지나면 누구나 깨닫는다. 아이를 낳는 책임에서 남성은 자유롭다. 유아 매매 같은 심각한 반인도적 행위가 일상적인 전쟁터 같은 삶에서 누가 양심을 지키려 할까?
 
자인은 시장에서 만난 '메이소운'(파라 하스노)에게서 '스웨덴 드림'을 듣는다. "스웨덴에서는 아이들이 병에 걸려야만 죽어." 아이를 학대하지 않고 잘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는 그런 꿈의 나라가 있다니. 그 꿈의 나라로 가려면 존재를 증명할 서류가 필요하다. 자인은 서류를 찾으러 떠나왔던 집에 가지만, 그런 게 있을 턱이 없다. '벌레'에게 누가 증명서를 주느냐는 아버지의 말은, 그들의 존재가 벌레만큼이나 하찮다는 현실을 아프게 일깨운다. 때문에 자인의 불행이 단지 부모가 원래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비롯된 것인지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영화 <가버나움> 스틸컷

영화 <가버나움>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

 
한때는 '중동의 파리'라고 불렸다는 레바논은 이제 전쟁터가 됐다. 내전으로 고통받는, 자인의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 빈민으로 전락한 것은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자인의 부모에게 모든 잘못을 돌려 책임을 묻는 일은 나쁜 사회가 저지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이들을 악당으로 만들면, 사회나 국가 더 나아가 인류는 그 책임에서 멀찍이 떨어질 수 있는 면죄부를 얻게 된다. 국제 정세를 자국의 이익에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중동을 화약고로 만든 미국과 이스라엘의 '자국 우선주의'는 은폐되고, 국민이야 어찌 살 건 아랑곳 않고 권력 싸움이나 벌이고 있는 집단들의 극악함도 가려진다.
 
<가버나움>은 자인의 불행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악의 축들을 소거한 채, 자인의 입을 빌려 부모만을 비극의 원죄자로 지목한다. 자인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국민을 '벌레'쯤으로 여기는 나라에서 자인이 부모보다 나은 어른이 될 전망은 슬프게도 희박하다. 자인의 불행을 부모의 탓이라면 영화는 다른 결말을 제시해야 한다. 자인의 부모를 개과천선 시키거나 다른 부모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가버나움에서 이런 가상현실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니 영화는 '스웨덴 드림'으로 우회하며, 자인이 행복할 수 있는 전망을 개인이 아닌 스웨덴으로 '엑소더스' 시키려는 모순에 빠진다. 마치 스웨덴이 '유토피아'라도 된다는 듯이.
 
아동 인권 감수성이 뛰어난 나라로 알려진 스웨덴이 처음부터 아동 천국이었을까? 아니었다. 2차 대전 이후 정부 책임을 강화해 아동학대를 뿌리 뽑으려는 사회적 노력이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아동 최선 이익의 법칙'을 세워 아동인권의 독립적 지위를 부여한 것은, 개인의 삶의 질이 '집단적 책임'에 있다는 무거운 깨달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스웨덴의 인권 존중은 증명하고 있다. 좋은 부모나 윤리적인 시민을 만드는 것은 그 국민의 '선한 의지'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법적 시스템이 국민들을 단단히 붙들고 견인하는 것임을. 자인의 고소는 부모가 아니라 국가로 향해야 한다. 국민에게 인간의 존엄을 지킬 아무런 수단을 제공하지 않은 국가가 바로 유죄이다.
 
타인의 고통
 
타인의 불행을 연민의 시선을 거두고 바라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인의 불행 또한 그렇다. 기아로 뼈만 남은 아이들, 의료혜택을 누리지 못해 아파 죽어가는 아이들, 전쟁의 참화로 몸과 마음을 상실한 아이들, 전투를 치르느라 총을 든 아이들, 성폭행 당하고 생명의 위협에 처한 아이들은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 아이들의 참혹한 현실을 전시하는 사진과 영상물을 수시로 접하지만 우리는 곧 잊는다. '타인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시리아 난민 행렬에 끼어 탈출하다 죽은 채 해변에서 발견된 아기, '에이란 쿠르디'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에이란을 잊고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주민들이 일자리를 뺏었어요. 난민들은 범죄를 저지를 위험한 사람들이니 받아들여서는 안 돼요." 우리가 타인의 불행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가버나움의 수많은 자인은 곧 어른이 된다. 그 자인들은 난민이 될 수도 이주민이 될 수도 있다. 오늘 <가버나움>을 보며 어린 자인의 불행에 마음 아플 수는 있다. 하지만 자인을 이 땅에서 만날 때도 그럴 수 있을지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최소한 자인의 부모를 심판할 수 있으려면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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