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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울 짧은 두 아이 육아 만 3년째. 정신이 너덜너덜해질 즈음 4박 5일 여행 제안을 받았다. 결혼하자마자 가족들과 매달 6만 원씩 5년 모은 돈으로 괌에 가자는 얘기였다.

어른 다섯 명의 왕복 비행기 삯만 3백만 원인 거한 나들이를 고작 먹고, 자고, 노는 데 쓰자니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족여행비를 노는 데 쓰지, 일하는 데 쓸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지난달 괌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서는 못할 특별한 경험을 바라면서 말이다.

상상 속 휴양지와 현실의 휴양지는 달랐다. 깔끔한 수영장과 더 깔끔한 리조트만 즐비할 줄 알았다. 리조트 정문을 나서면 세련된 인테리어로 꾸며진 디저트 카페나 패밀리 레스토랑이 죽 늘어선 거리를 꿈꿨건만, 이게 웬걸. 꾸밈에 대한 무념무상, 투박함을 제대로 만났다.

간판 색이 바랜 건 기본. 벽에 살짝 금 간 건 애교. 닳고 닳아 울퉁불퉁해진 식당 테이블 위에 덧바르고 다시 바른 니스칠도 익숙해졌다. 박스형 낮은 단층 건물에 하얗게 페인트 칠하고, 얇은 유리 창문을 달아 놓았다. 시어머니는 괌의 거리를 보며 유년의 부산 골목길을 회상하실 정도였다.
 
괌의 골목길. 시간을 거슬러 온 듯 정겹고 투박하다.
 괌의 골목길. 시간을 거슬러 온 듯 정겹고 투박하다.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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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건 건물뿐만이 아니었다. 옷차림도 마찬가지였다. 수영장에서 최신 래시가드를 입은 사람들은 죄다 한국어를 썼다. 반면에 비키니든, 원피스 수영복이든, 티셔츠에 반바지든, 취향껏 옷 입은 사람들의 언어는 모두 달랐다. 남들처럼 입기보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괌에서는 유행 따윈 아무 상관 없어 보였다.

내가 사는 한국은 어떤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 옆 건물 모양새로 상가를 짓고 옆 사람처럼 옷을 입어야 한다. 유행을 따르는 시선은 지난해의 예쁨과 올해의 예쁨을 구분 짓는다. 멀쩡하던 600L 상하형 냉장고도 900L 양문형 냉장고가 나온 뒤론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다. 새로운 유행은 지난날의 물건을 초라하게 만든다.

그러나 30년 전 건물 스타일에 30년 전 패션이 흔한 괌에서는 유행보다는 저마다의 스타일이 있었다. 못난 사람도, 뒤처지는 사람도 없었다. 대신 친절한 사람, 표정이 편안한 사람, 웃으며 농담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어딜 가나 돋보이고 아름다웠다. 좋은 물건보다 사람이 주인공인 듯했다.

좋은 옷을 입거나 신형 차를 몰아야 돋보일 것만 같은 한국의 소비문화는 비행기로 4시간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멀어졌다. 상상하던 휴양은 아니었지만, 노동과 소비가 없는 나날 속에 안락했다. '역시 삶의 행복은 돈 말고 여유로운 마음에 있지'라고 생각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쇼핑센터의 굴욕
 
쇼핑몰
 쇼핑몰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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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풀 살짝 인 허름한 티셔츠에 검은색 리넨 반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구겨 신더라도 마음 편한 나날이 계속됐다. 소비 문화에서 벗어나니 자유로웠다. 여행 3일째 아침. 바로 그 '흐물거리는 낡은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숙소를 나섰다. 한국에 계신 어른들께 드릴 선물을 사러 쇼핑센터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아울렛에 들어섰다. 매끈한 빨간 가죽가방을 보자 잊고 있던 감성이 되살아났다. 쇼핑몰 밖에서는 새 물건 없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여기에선 달랐다. 아름답고 질 좋은 물건들의 주인이 되는 순간 비로소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숙소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새 가방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고, 수중에 고급 브랜드의 가방을 살 돈도 없었다. '어차피 난 못 사'라는 생각에 돌연 피곤해졌다.

잘 차려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다. 쇼핑몰에서의 당당함은 2019년에 걸맞은 패션에서 우러나왔다. 유행을 타지 않는 티셔츠와 반바지는 쇼핑몰의 그 어떤 물건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아무도 내게 관심조차 없겠지만, 이미 나는 자의식 과잉 모드로 돌입한 상태였다. 긴장되고 뻣뻣해졌다.

돈에서 자유로워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쇼핑몰은 절약가에게 편한 공간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잘 놀며 지냈는데, 갑자기 소비와 절약 사이에서 팽팽한 갈등이 일었다. 면 좋은 나이키 티셔츠를 보니 오래된 내 셔츠 때문에 불행해졌다. 새 티셔츠를 진열하지 않는 해변에서는 못 느꼈던 감정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선물 몇 개만 사서 허겁지겁 쇼핑몰 현관 밖을 나와버렸다. 온갖 물건이 안 보이고 나서야 비로소 편해졌다. 괌에선 '패션'은 없고 '스타일'만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어디로 간 건가. 뭘 입든 제멋에 겨워 당당해도 될 텐데 쇼핑몰에선 왜 그랬던 걸까.
 
상점이 드문 남부의 언덕에서는 절약 의지를 다질 필요조차 없었다.
 상점이 드문 남부의 언덕에서는 절약 의지를 다질 필요조차 없었다.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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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몰에서 굴욕을 느낀 다음 날, 언덕에서 자유를 느꼈다. 다시 패션 말고 스타일만 남았다. 여긴 절약에 무해한 공간이었다. 즐거움은 오직 땅에 떨어진 야자 열매를 돌에 부딪쳐 깨부순 후, 빨대를 꽂아 코코넛 주스를 마시는 일뿐이다. 소비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물건을 살까, 말까 갈등조차 일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점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품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절약해야겠다는 결심조차 서지 않았다. 운명처럼 내 눈앞에 나타난 빨간 가죽 가방을 애써 외면해야만 할 때 절약이 필요했다. 절약도 물건에 대한 욕망이 강할 때 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매일 한 달 예산에서 남은 돈을 헤아리며 살았다. 절약 의지를 다져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마치 거대한 쇼핑몰이나 다름없었다. 발 디디는 걸음마다 돈을 쓰면 뭐든 살 수 있는 곳. 카드만 주욱 긁으면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 그 기적이 행복으로 치환되는 세계. 여기가 한국이었다.

쇼핑이냐, 구매냐

우리는 온갖 상품에 둘러싸여 사는 탓에, 필요한 물건을 필요할 때 '구매(purchase)'하는 게 아니라, 우연히 마주치는 멋진 물건을 욕망하며 '쇼핑(shopping)'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필요해서 소비하기보다는, 눈 앞에 보이는 물건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어 지출하게 된다.

'집 밖으로 나가면 다 돈이다'라는 뻔한 말이, 집 밖에서 돈 쓸 일 없던 괌에서 더욱 와닿았다. 소비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는 '쇼핑'인지, 필요해서 구할 뿐인 '구매'인지 생각하며 돈을 쓰고 싶다. 물론 구매자로서 살고 싶지만, 물건 말고 다른 즐거움을 알아버린 사람은 더 이상 물건에 매력을 잘 못 느낀다. 좋아하지도 않는 물건 때문에 쇼핑몰에서 쭈뼛거리는 건 더 이상 그만하려 한다.
 
산책만 해도 좋은 세상을 '쇼핑몰 한국'이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산책만 해도 좋은 세상을 "쇼핑몰 한국"이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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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쇼핑 센터나 다름없는 거리에서 쇼핑을 안 하는 건 쉽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물건이나 돈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다. 삼시 세끼 밥 잘 먹고, 잘 자고, 책 읽고 산책하기만 해도 좋은 세상을 '쇼핑몰 한국'이 가리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괌이 아름다운 이유는 쇼핑 센터가 특정 장소나 건물에만 모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괌의 평범한 거리에서는 물건을 전시한 상점보다 넓은 하늘과 자연, 소소한 동네의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약간의 노력을 들인다면 괌의 여유를 한국으로 가져올 수 있다. 씀씀이와 상관없는 즐거움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2030년, 2040년에도 유행을 타지 않는 티셔츠와 바지를 입어도 주눅들지 않으며 살아가고 싶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산책과 대화, 아름다운 자연환경만으로 즐거운데 구태여 쇼핑과 물건으로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다. 소소한 산책은 제멋에 겨운 옷만 입어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http://blog.naver.com/dahyun0421)에도 실립니다.


태그:#최소한의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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