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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그래서 벼와 보리의 생장 과정이 내겐 익숙하다. 농사꾼의 아들이었으니까. 그런데 밀과 메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아버지와 들판을 거닐던 어느 날, 기다란 보리처럼 생겼네, 저게 밀이란 얘길 얼핏 들은 기억이 전부이다.

새삼스럽지만 밀을 가공하여 가루로 만든 게 밀가루다.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처음 들은 메밀의 생김새는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둘은 우선 모양이 다르다. 밀은 타원형이고 메밀의 열매는 검은 세모 모양이다. 밀은 전분보다는 단백질인 글루텐(gluten)을 많이 함유해서 면, 빵, 과자, 술, 간장, 된장의 원료로 쓰이고, 메밀은 전분(녹말)이 많아 국수나 냉면, 묵 따위를 만들어 먹기에 좋다.

밀가루로 만드는 수제비의 어원이 궁금하지 않은가? 손(手)으로 접었다(摺)고 해서 '수접이'라 부른 데서 나왔다고 한다. 단어 자체는 조선 중기에 만들어졌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밀이 귀해서 양반들만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수제비가 서민 음식으로 자리 잡은 계기는 미군정 이후 미국이 원조로 들여온 밀가루가 싼값에 유통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수제비에 들어갈 주꾸미, 밀가루 반죽, 애호박 등등 재료입니다.
▲ 수제비 재료 수제비에 들어갈 주꾸미, 밀가루 반죽, 애호박 등등 재료입니다.
ⓒ 임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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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이제 아이들을 위한 수제비를 만들 시간이다. "아빠 수제비 언제 해줄 거야?" 토요일 오후 퇴근하자마자 딸아이가 물었다.

"응? 그게 김치 칼국수 한 지 얼마 안 돼서... 다음 주에 하려고 생각하는데."

밀가루 반죽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선뜻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먹고 싶은데, 그냥 오늘 해주라. 응?"

"그거 밀가루 반죽해서 하루 정도는 냉장고에 숙성을 시켜야 먹고 나서도 배가 안아프다고 치과 실장님이 귀띔해줬어."

시간차 방어를 시도했다.

"그럼 내일 저녁에 수제비 해주면 되겠네. 우리 예전에 많이 먹던 낙지항아리수제비 참 맛있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딸아이를 거든다.

"내일?"

"그럼 여보 일단 수제비 반죽부터 해놔."

아내의 채근에 나는 맥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밀가루 반죽하는 방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밀가루에 달걀 두 개를 깨트려 넣고 올리브유 약간에 소금을 넣어 밑간하고 숟가락으로 조금씩 섞어준다.' 반죽에 식용유나 올리브유를 넣어주면 면에 찰기가 생기고 삶았을 때 불지 않는다.

근데 왜 달걀 물을 넣어 반죽을 치대는 걸까? 이유가 궁금해졌다. 수제비를 끓일 때 반죽에서 전분이 흘러나와, 반죽이 흐물흐물해지고 국물이 걸쭉해지기 쉬운데, 달걀 물을 넣어주면 끓여도 반죽이 퍼지지 않고 쫄깃쫄깃하다. 감자를 갈아 넣는 방법도 같은 맥락이다.

위에서 준비된 밀가루에 2/3 컵 정도의 물을 조금씩 넣어 손으로 치대 가며 반죽했다. 치과 진료실에서 환자 입안에서 본을 뜰 때 자주 쓰는 알지네이트라는 재료가 있다. 생긴 게 밀가루랑 비슷하다. 이 재료를 섞을 때는 혼수비(물/분말 혼합비율)를 잘 지켜야 한다. 너무 묽으면 환자 입안에서 쉽게 흘러내려 조작이 불편하고 쉽게 찢어진다. 너무 되면 빨리 굳어버려서 입안에서 재료를 조작할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밀가루에 물을 조금씩 넣으면서 섞다 보니 생각이 났다.

육수를 내기 위해 다시마와 멸치, 양파 한 개를 넣고 20분 이상 끓였다. 멸치는 손질하지 않고 그냥 넣었다. 멸치 안에 검은색 내장을 제거해야 쓴맛이 덜하다는데, 그 점을 간과했다. 손질한 멸치를 달궈진 프라이팬에 노릇하게 볶아주면 비릿한 맛을 없앨 수 있어 금상첨화다.

다시마와 멸치를 한꺼번에 넣고 육수를 끓인 점은 아쉽다. 다시마는 오래 끓이면 좋지 않으니 10분 미만에서 꺼내야 한다고 한다. 얼른 '검색 신공'을 발휘해본다. 다시마를 오래 끓이면 국물에서 일간신이라는 끈적한 물질이 나오는데, 이게 국물을 탁하게 하고 쓴맛을 내기 때문이다. 다시마를 넣고 물을 끓이다가 물이 끓으면 다시마를 제거하고 볶아놓은 멸치를 넣어 끓여서 육수를 완성한다. 육수 하나를 내는 데도 정성이 필요하다.

치과 환자들의 입안에서 이가 부분적으로 없거나 하나도 없는 경우, 부분 틀니나 완전 틀니라는 보철물이 필요하다. 틀니는 일회성 방문이 아니라 여섯 번 이상 치료받기 위해 병원을 방문해야 하는 정밀한 치료다.

진료실에서 본을 뜨는 재료가 태생적으로 가진 수축과 팽창의 오차부터 시작해서 틀니를 제작하는 기공소에서 생기는 오차들이 단계별로 누적이 되다 보면 최종적인 결과물의 오차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일어날 수 있는 오차의 범위까지 고려하며 보철물을 제작해야 한다. 음식의 풍미를 좌우하는 육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맛있는 육수를 만들어 내는 과정도 작은 부분까지 정성 들여 챙기지 않으면 안 되는 거구나'. 또 하나 배웠다.

수제비에 들어갈 애호박, 표고버섯, 대파, 고추, 마늘, 감자와 주꾸미를 준비했다. 아내가 낙지항아리수제비를 먹었던 기억을 소환하는 통에 낙지 대신에 주꾸미를 한 팩 샀고 감자는 빨리 익히기 위해 채를 썰어 준비했다.
 
갓김치와 깍두기와 함께 차려낸 주꾸미 수제비 식탁입니다.
▲ 주꾸미 수제비 갓김치와 깍두기와 함께 차려낸 주꾸미 수제비 식탁입니다.
ⓒ 임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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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두 아이가 학원을 마치고 돌아왔다. 육수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해 밀가루 반죽과 주꾸미를 제외한 재료들을 넣었다. 이제는 냉장고에 보관 중이던 밀가루 반죽을 꺼내서 넣기만 하면 된다. 어린 시절, 밀가루 반죽을 부뚜막 가마솥에 날렵하게 떼어 넣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뚝, 뚝. 그땐 참 쉬워 보였다.

반죽한 밀가루가 아까워 남김없이 다 떼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 손질해둔 주꾸미를 넣었다. 주꾸미는 내장과 입을 제거한 후 밀가루와 소금을 넣어 빨판에 남아 있는 불순물을 빡빡 문질러서 깨끗하게 손질해두었다. 지난번 주꾸미를 데쳐 먹을 때 예습해둔 게 도움이 됐다.

전기레인지 불을 끄고 달걀 푼 물을 부었다. 드디어 수제비가 완성됐다.

수제비를 담을 면기를 꺼내고 김치냉장고에서 지난해 김장 때 담가 온 갓김치를 깍두기와 함께 담아냈다. 수제비를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으며 시선은 아이들과 아내의 표정을 살핀다.

"수제비 맛이 어때?"

"이거 수제비야, 떡국이야?"

최근 아빠의 요리에 매번 엄지 척을 올리던 딸의 말이었다. 오늘 아침에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목소리 톤을 한껏 울리며 혼을 내서 그런가?

나름 밀가루 반죽을 얇게 떼어낸다고 했음에도, 진심 수제비 반죽을 떼어 넣는 게 귀찮은 건 아니었는데, 반죽이 두꺼웠다. 반죽을 얇게 떼어내는 감이 없었다. 이어지는 식구들의 구시렁거림. '반죽이 너무 두꺼워서 가운데는 안 익었다', '안에 밀가루가 씹히는 거 같다' 등. 가족 음식평가단이라고 그냥 넘어가는 법은 없다. 밀가루 반죽을 뚝뚝 뜯어 넣는 대신 밀대로 반죽을 밀어서 얇게 펴서 뜯어 넣을 걸.

입안에 수제비를 오물거리면서 큰 딸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빠가 해주는 탕수육 먹어보고 싶어."

다음 요리는 탕수육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 개인 블로그와 <치의신보>에도 실립니다.


태그:#수제비, #낙지항아리수제비, #밀가루 반죽, #육수, #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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