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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의 사진은 모두 네거티브 필름을 이용해 촬영 후 직접 스캔하였으며 사이즈 조정 등 기본적인 보정만 했음을 밝힙니다. 사진마다 기종 및 필름의 종류를 괄호 내에 표기하였습니다. - 기자 말

나의 여행은 다른 이보다 길다. 여정 자체의 길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현상을 맡긴 후, 갈색의 필름을 한 장씩 사진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다 보면 보통, 애초 여정의 두 배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1월 7일부터 16일 동안 제주에 머물렀고 그 후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필름 작업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또 다른 여행이며 본 여정의 연장선이다. 그 날의 공기와 중력이 훨씬 숙성된 상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심화학습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나의 여행은 다른 이보다 길다.
 
중형필름 두 컷 중형 파노라마 포맷이라 필름이 크다. 한 컷을 이미지로 만드는 데에 약 10분이 소요된다. ⓒ 안사을
 
이번 제주도 여행의 일정에는 매우 중요한 연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전라북도 교육청 산하 '학생인권교육센터'에서 함께 인쇄물을 만들던 팀을 주축으로, 평화와 인권을 주제로 한 연수였다. 4.3사건의 이야기가 담긴 지역들을 주로 탐방하고 야간에는 토론이 이어졌다.

이 연수는 전체 여행의 감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라산의 눈부신 설경, 중산간 지대의 한가로운 풍경, 에메랄드 색의 투명한 바다까지, 제주도의 경치는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 이면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선흘리 도틀굴 입구 (LX/RHP3)4.3사건 당시 총포를 피해 이곳으로 숨었던 주민들은 결국 총살을 당했다. ⓒ 안사을
 
파랗고 투명한 제주 바다

최근 국내 여행지에 대한 회의적인 말들이 많다. 바가지 물가임에도 경치는 그저 그렇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하지만 소문난 맛집을 찾기보다 약간의 실험정신을 발휘한다면, 익숙한 경치에서도 조화와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여행지가 많다. 

제주도에서 싸고 맛있는 집을 찾는 방법에 대해 필자가 드리는 소소한 팁은 '동네의 청과를 찾아가라'는 것이다. 일단 제주도의 '비상품 귤'은 기가 막히게 맛있다. 다 익어버린 뒤에 딴 귤들이 주로 그렇게 팔리는데, 미리 따서 유통한 것들보다 훨씬 맛있다. 게다가 값도 싸서 5천원어치를 담으면 3일 동안 심심할 때마다 귤을 까먹을 수 있다.

값을 치르면서 판매원께 드리는 간단한 질문 하나면 식당 선택이 보다 쉽다. 동네 분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식당에 대해 묻는 것이다. 이런 방법 덕에 여정 내내 1인 기준 8천 원이 넘는 식사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7천원짜리 고기국수 (LX/RHP3)고기의 양이 넉넉하여 한 그릇 만으로도 충분한 저녁 식사가 된다. ⓒ 안사을
 
제주 바다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에메랄드 색 물빛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되어 있지만 그런 색을 발하지 못한다. 해변을 이루는 입자의 종류 때문이다. 진흙이나 모래로 되어 있는 해변은 색이 탁하다.

제주 바다는 조개껍데기로 되어 있는 해변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먼지가 일지 않아 물이 투명하다. 하얀 조개껍데기는 파란 하늘을 그대로 반사하고, 물에서 특히 많이 반사되는 연녹색 빛이 함께 어우러져 에메랄드 색이 완성되는 것이다.
 
함덕해변(1) (SW612/Pro400H)오른편으로 보이는 곳은 서우봉. 우도의 홍조단괴 해변을 제외한다면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을 가진 해변일 것이다. ⓒ 안사을
   
함덕해변(2) (SW612/Pro400H) ⓒ 안사을

함덕해변은 물이 들어오나 빠지나, 날이 좋거나 흐리거나 변함없이 아름다운 물빛을 자랑한다. 그런데 이곳을 방문한다면 바다를 보는 것 외에 서우봉의 산책길을 돌아보기를 권유한다. 그곳에는 일본군이 만들어놓은 진지동굴이 있다.

비단 이곳뿐이겠는가. 송악산의 내부에는 커다란 트럭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동굴이 엄청난 규모로 건설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절벽이 있는 거의 모든 해변에 진지동굴이 있고, 한라산의 곳곳도 예외는 아니다. 어승생악 정상에 있는 동굴은 일본 최고사령부가 경계를 위해 건설한 곳이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제주도 전체를 병참기지로 사용했다.

탄압과 수탈은 오죽했으랴. 저 푸른 바다의 뒤편에는 누군가의 붉은 눈물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이 바다의 푸름이 더욱 눈이 시리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무심히도 아름다운 것인지, 그 아픔을 덮어주기 위해 푸르른 것인지.

화산지형과 바다의 조화

제주도의 해변이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다양한 화산지형이 제주 바다만의 풍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돌과 물은 그 성질이 반대이면서도 함께 있으면 아름다운 조합이 된다. 그래서 글자의 받침이 같은가 싶기도 하다.

제주 해변에서 볼 수 있는 화산지형은 쉽게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용암이 급격히 식어 만들어진 현무암 지대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수성화산의 작용으로 화산탄과 화산재가 쌓여서 만들어진 지형이다. 아래는 현무암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돌과 바다(2) (SW612/Pro400H)용암이 흐르면서 먼저 식은 부분에 막혀 주름이 지고, 그 형태로 굳은 모습. 현재의 파도와 과거 용암 파도와의 만남. ⓒ 안사을
 
제주의 색 (SW612/Pro400H)까만 현무암으로 된 방파제는 제주만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 안사을
 
위 사진은 한림읍 월령리의 바다이다. 월령리는 선인장 마을로 유명하다. 선인장이 이곳에 자생하게 된 이유에 대해 많은 추측이 있지만, 스페인에서부터 선인장의 씨앗이 해류와 파도를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이다.
 
월령리 선인장마을 (SW612/Pro400H)일주도로를 달리다 색다른 풍경에 잠시 걸었다. 자주색 열매가 눈을 간지럽혔다. ⓒ 안사을

위의 풍경들이 현무암과 바다의 조화로운 모습이라면, 아래의 풍경에서는 응회암과 바다의 상호작용을 볼 수 있다. 응회암은 화산 쇄설물이 쌓여서 만들어진 암석이다. 해변에 있는 응회암 지대는 파도의 침식으로 인해 웅장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응회암 퇴적층을 자세히 보면 참 재미있다. 다양한 크기의 입자들이 고루 섞여 하나의 층을 이룬다. 이런 모습은 수월봉 근처 해안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절벽 가까이서 가만히 걷다 보면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같아 슬며시 웃음이 지어지곤 한다. 
 
수월봉 지층 (645N/RDP3)다양한 크기, 색깔의 입자가 모여 땅을 이루고 그 위에 꽃이 피어나듯. ⓒ 안사을
 
아래의 사진들은 응회암 퇴적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관광지, 용머리 해안의 모습이다. 이곳은 물때와 날씨를 잘 맞춰서 가야 입장이 가능하다. 밀물 때나 파도가 심할 때는 입장이 통제된다. 수월봉의 절벽과 비교하면 입자의 크기가 비교적 고르고 미세한 것을 볼 수 있다. 화산탄이 포함되지 않은, 수증기와 함께 멀리 날아온 화산재가 쌓여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용머리 해안(1) (SW612/Ektar100)응회암층을 올려다 본 모습. ⓒ 안사을
   
절벽과 바다 (SW612/Ektar100)응회암 절벽은 일반적인 퇴적 지층과 보다 풍화된 모양새가 다양하다. ⓒ 안사을
  
용머리해안(2) (SW612/Pro400H)간단한 해물을 파는 분들. 이 분들은 이미 용머리 풍경의 일부분이다. 호객행위 거의 없고, 있더라도 정겨운 수준. ⓒ 안사을
   
용머리해안과 산방산 (SW612/Pro400H)용머리해안 산책의 가장 극적인 순간. 절벽을 돌아 만나는 산방산의 모습. ⓒ 안사을
 
용머리해안을 방문했을 당시 공사가 한창이었다. 위치를 보아하니 몇 해 전 완성한 쌩뚱맞은 교량이 놓인 곳이었다. 지난 달 31일,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기존의 철재 교량을 인조응회암 교량으로 대체하여 자연친화적으로 새단장했다고 밝혔다.

차귀도와 섭지코지의 저녁 풍경

수월봉은 제주에서 가장 서편에 위치한 곳이다. 석양의 명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방위 상 수월봉에서 일몰을 바라보면 차귀도의 윤곽을 잡을 수 없다. 조금 더 북쪽으로 걸어가면 차귀도를 정서 방향로 바라볼 수 있는 주차장이 나온다.

겨울이라 남중고도가 낮아 해는 섬의 왼편으로 떨어지지만 붉은 수평선을 배경으로 차귀도의 유려한 곡선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한 구도가 된다. 이 날은 구름이 많아 타오르는 석양은 없었지만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빛내림을 담을 수 있었다.
 
차귀도를 바라보며(1) (SW612/Pro400H)일몰 두 시간 전. ⓒ 안사을
   
차귀도를 바라보며(2) (SW612/Pro400H)일몰 40분 전의 모습. 구름층이 너무 두터우면 이런 풍경을 볼 수 없다. ⓒ 안사을
 
섭지코지는 보통 일출을 보는 곳이다. 성산 일출봉에서 멀지 않은, 제주 동편에 위치한 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녁의 붉은 빛을 등지고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일출과 일몰 시 반대 방향을 바라보면 또 다른 색채감을 느낄 수 있다.
 
저녁, 섭지코지 (SW612/Ektar100)저녁 햇살을 받고 있는 섭지코지의 모습. 예전에 있었던 올인하우스는 과자집으로 바뀌었다.주변과의 조화는, 글쎄. ⓒ 안사을
 
사라진 마을, 무등이왓

마지막은 슬픈 이야기로 장식하려 한다. 본 기사의 마지막이자, 총 세 편으로 구성한 제주도 여행기의 끝막이다. 슬픔은 아름다움을 더욱 깊게 하니, 많은 여행객들이 제주도를 더 슬퍼하고 더 아름다워하기를 바란다.

4.3사건을 바라보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상당히 대립된 시각으로 이데올로기를 펼친다. 하지만 필자는 상실과 아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사건의 도화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잠시 뒤로 하더라도, 죄 없이 희생당한 넋의 억울함은 명백하다.

무등이왓은 '터'로 남아 있다. 마을을 돌아보면 조금 의아한 풍경이 보인다. 대나무로 어떤 경계는 지어져 있으나 그 안쪽에는 아무 것도 없다.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한꺼번에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근처의 자연동굴 '큰넓궤'로 숨었다. 120여 명이 50여 일 동안 그곳에서 숨을 죽였다. 
 
큰넓궤 입구 (LX/RHP3)마을에서 약 4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연동굴 ⓒ 안사을
 
만장굴처럼 넓은 동굴을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배를 땅에 대고 기어야만 지날 수 있는 통로가 계속되기에 40여 미터를 들어가는 데에 15분이 넘게 걸린다. 게다가 현무암질로 된 용암동굴이라 사방이 뾰족하니, 맨손 맨무릎으로 다녔던 사람들은 피딱지가 성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 결국 발각은 됐지만 동굴에서 죽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피신 동굴은 그 자체가 학살터가 되었다. 하지만 역시 발각된 후에는 뿔뿔이 흩어져 한라산에서 총살되거나 서귀포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무등이왓터에서 (LX/RHP3)해설을 듣고 있는 연수팀 일원들. ⓒ 안사을
 
그래서 이 마을에는 아무도 없다. 대신 돌담을 움켜 쥔 나무줄기와, 아직도 사람의 피를 머금고 있는 듯 한 붉은 토양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광합성을 해대는 풀들만이 무성히 자라고 있을 뿐이다.

아래 사진은 집 터 중 하나를, 세 번의 다중노출로 담은 것이다. 맑은 날 누군가의 눈에는 아담하고 한가로운 잔디밭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삶을 송두리채 빼앗긴 한 가족의 유적이다. 부디 많은 이들이 제주의 아픔을 바로 알아, 평화와 화합의 섬을 이룰 수 있도록 함께 나아가길 기원한다.
 
무등이왓터 중 (LX/RHP3)이곳엔 누가 살고 있었을까.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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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눈 귀한 겨울... 열흘 기다렸더니 한라산에 드디어
② 제주도는 흐려도 아름답다
태그:#제주도, #4.3사건, #바다, #필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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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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