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26 10:23최종 업데이트 19.02.26 10:23
권동진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드물게 무관(武官) 출신이다. 증조부 권필이 무과에 급제한 뒤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하면서 무인 가문을 열었다. 그의 백부와 부친 역시 무과 급제자 출신으로 백부 권재유는 절충장군, 부친은 경상도 중군(中軍)을 지냈다. 또 그의 셋째, 다섯째 형도 1880년 경진무과에 나란히 급제하여 무관의 길을 걸었다. 특히 셋째형 권형진은 갑오개혁에 참여하였으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대원군과 함께 명성황후 축출 모의에 가담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기도 했다. 권동진이 무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집안내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권동진(權東鎭)은 1861년 충북 괴산에서 권재형과 경주 이씨의 6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호는 우당(憂堂), 도호는 실암(寬菴)이다. 천도교인들의 도호는 대개 교주 손병희가 지어주었는데 그는 자신이 지었다. 당초 그는 우당이라는 호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3.1혁명 건으로 옥살이를 하고 나와 보니 주변사람들이 모두 '암(菴)' 자 돌림의 도호를 쓰고 있는데다 오세창이 자꾸 그에게도 바꿀 것을 권하였다. 생각 끝에 그는 뭐든지 실속 있고 또 실지로 일을 해야겠다는 뜻으로 '실(實)' 자를 따다가 '실암(實庵)'이라고 지었다. 그의 옛 친구들은 우당이라고 부르거나 실암 또는 실옹(實翁)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천도교에 입교한 무관 출신
 

권동진

권동진의 집안은 대대로 본향인 안동에서 살았다. 그의 부친 대에 괴산으로 이거했는데 그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참고로 그의 출생지를 두고 어떤 논문에는 경기도 포천이라고 하고, 또 권동진 신문조서에는 '경성부 정동(貞洞)'으로 나와 있는데 이는 모두 사실과 다르다) 8세 때인 1869년 무렵 집안이 서울로 이사하면서 소년기를 서울에서 보냈다. 1919년 3.1혁명 거사에 연루돼 취조를 받을 당시 그는 경성부(서울시) 돈의동 76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19세 때인 1880년 훈련도감 산하의 하도감(下都監)에서 사관학교를 설립하자 그는 1기생으로 입교했다. 1기생은 총 108명, 교육연한은 2년이었다. 1882년 봄 졸업생 10명이 배출됐는데 그는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 남행부장(南行部將)에 임명됐다가 임오군란 뒤 100명으로 편성된 초(哨) 통솔자인 초관(哨官)에 임명돼 좌우영의 교련을 맡았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박영효가 거느린 전후영 소속으로 있다가 무관학교 출신 5인과 함께 대궐에 번(番)을 들어가 고종을 호위하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김옥균 등 개화파 세력과 자주 접촉하면서 교류를 가졌던 것 같다.


육군 참령(參領·현 소령)으로 승진하여 별군직(別軍職)으로 있던 그는 1885년 무렵 경남 함안군수로 임명돼 1년 남짓 근무하였다. 이후 함경도 안무중군(按撫中軍) 겸 토포사(討捕使)로 있다가 중추부(中樞府) 내금장(內禁將)을 거쳐 1894년에는 거문도 첨사(僉使) 겸 수방장(守防將)으로 근무하였다.

임관 후 10여 년을 무관으로 근무해온 그는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그 무렵 집안에 상(喪)을 당해 서울에 머물고 있던 그는 새로 재편된 훈련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셋째형 권형진(權瀅鎭)은 경찰·감옥업무 및 왕궁 경비업무를 관장하던 경무청의 수장인 경무사(警務使)로 있었다. 권형진은 1895년 10월 대원군의 명성황후 축출 획책에 가담하였는데 이때 그의 동생인 권동진도 경복궁 급습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일본 낭인들의 명성황후 살해 음모와는 별개로 대원군의 모략에 동원된 것이었다. 이를 기화로 주한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명성황후 살해를 두고 '훈련대가 대원군과 결탁하여 행한 쿠데타'로 사건을 조작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는 사건 후 훈련대 해산과 함께 이에 연루된 군부대신 조희연, 경무사 권형진,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과 이두황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권동진 역시 이 사건에 연루돼 쫓기는 몸이 됐고 결국 그해 12월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주일특명공사 이하영을 통해 일본정부에 권동진, 유길준 등 6명의 소환을 요청하였다. 이어 1904년에도 한국인 망명객 14명의 출송(黜送)을 요청하였으나 일본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당시 일제는 이미 조선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일본 망명 시절의 모습. 앞줄 오른쪽부터 오세창, 손병희, 권동진 (자료사진)

 
당시 일본에 망명한 사람은 그의 동지들인 조희문, 이범래, 우범선, 이두황, 신응희, 정난교, 오세창 등이었다. 망명 초기에 그는 일본 도쿄의 근위사단에서 병학(兵學·군사학)을 공부하는 한편 3연대에서 실습을 쌓고, 또 일본 육군성에서 경리사무를 익혔다. 그러는 동안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 조희연, 장박, 유길준, 유세남 등과 교류하면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해 논의하였다. 얼마 뒤 1900년 그의 셋째형 권형진은 국내에 들어갔다가 참형을 당하였다.

그 무렵 권동진은 오사카에서 손병희를 만나면서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손병희는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가려다 중도에 사정이 생겨 오사카에 눌러앉게 되었다. 당시 손병희는 문명개화를 통해 동학을 개혁코자 하였으며, 권동진은 동학의 세력을 이용해 정권을 되찾고 정치적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였고, 권동진은 동학(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5년 8월 조선정부는 유길준, 권동진 등을 사면하였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1906년 1월 5일 손병희 등과 함께 망명생활 11년 만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천도교(동학은 1905년 12월 1일부로 천도교로 개칭됨)의 조직정비에 나섰다. 손병희는 천도교의 헌법 격인 대헌(大憲)의 규정에 따라 대도주(大道主)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손병희는 천도교의 교권을 장악하였는데, 대헌은 권동진과 오세창, 양한묵 등이 작성한 것이었다. 그는 손병희를 보좌하며 도집(都執), 도사(道師)를 맡아 전제관장, 포덕 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용구, 송병준 등에게 넘어간 교세를 다시 회복하면서 그는 천도교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이에 앞서 권동진은 귀국 직후 중추원 부참의(副參議)에 임명되었으나 2개월여 만에 그만두었다. 그는 1906년 5월 박문사(博文社)라는 인쇄소 겸 출판사를 인수하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였다. 당시 그는 출판사업 등을 통해 계몽운동에 앞장섰는데 주 활동무대는 대한협회였다.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1907년 11월 설립됐다. 권동진은 대한협회 실업부장과 부회장을 맡아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을 통한 부국강병에 힘썼다. 그가 <대한협회회보> 제10호(1909.1.25.)에 기고한 '상무(商務)의 개념'의 도입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商務는 營利的 作用이라. 商務에 本來 經濟的 活動도 有며 非經濟的 活動도 有나 何者이던지 利益收得의 觀念을 包有 者인 故로 貨物의 賣買에도 有며 又 賣買의 誘導에도 有야 皆 此 看念을 存치 아니 者ㅣ 無니 此 營利的 作用에 秩序를 與야 基準을 附 者 人類의 利己心 及 良心이니 利己心은 人으로 야금 最少의 犧牲으로써 最大의 效果를 收得랴고 務 者로 特히 商業에 在이 其 本然 性質上 收益을 主야 利益의 存을 隨야 活動 者ㅣ라 然니 … "

그는 상무(商務), 즉 상업(경제) 활동은 이익 획득이 본질이라며 '최소의 희생으로써 최대의 효과를 획득'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봤다. 무관 출신인 그가 어떻게 이같은 식견을 갖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그는 상업 활동의 중요성과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상업의 발달을 인류의 발달과 동일선상에서 놓고서 상업 발달이 장차 조선이 강대국으로 나가는 지름길임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노동자에 대한 정당한 보수 지급이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며 사용주의 권한을 법률적으로 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무렵 국운은 이미 경각에 달해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데 이어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었고, 1910년 한일병탄으로 국권이 상실되었다. 그의 앞에는 해외로 망명할 것인가, 국내에 남을 것인가 두 갈래 길이 주어졌다. 고민 끝에 그는 후자를 택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국내에 남아 천도교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로 했다. 1912년 천도교 조직개편 때 그는 교육과장을 맡아 일단 포교 사업에 진력하였다.

3.1혁명 준비 초기부터 개입한 천도교 핵심 인사

1912년 10월 천도교는 민족문화 수호와 유지를 위한 범국민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민족문화운동본부를 결성하였다. 총재는 손병희, 회장은 이종일이 맡고 권동진은 제1분과 위원장을 맡았다. 겉으로는 민족문화수호를 표방하였지만 실상은 민중시위를 도모하기 위한 비밀결사체였다. 1913년 4월 이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지방조직 확대강화 대책을 논의하였다. 당시 회원은 1백여 명에 달했는데 민중동원을 위해 수차례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 시도했던 생활개선운동에 이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였다. 이를 계기로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체코, 유고, 폴란드 등도 잇따라 민족자주를 외치고 나섰다. 국내외의 민족진영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예의주시 하였다. 앞서 손병희를 비롯해 권동진, 이종훈,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 지도부는 5월 5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 3대 원칙(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정하였다. 이들은 9월 9일 소위 '무오(戊午)시위계획'을 세웠으나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제 때 준비하지 못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이념을 민족운동의 이념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민족자결 조항의 범주에 식민지 조선도 포함되는지 여부를 검토하였다. 이어 윌슨이 국제연맹 회의에서 민족자결 문제를 다룬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12월 말경 오세창, 최린 등과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3인은 논의 끝에 의견일치를 본 후 이를 조선독립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 인식하였다. 3인은 각자 역할 분담을 했다. 그와 오세창은 교단 내부의 일을, 최린은 대외업무를 맡기로 했다. 그는 손병희를 설득하는 한편 양한묵, 나용환, 나인협, 임예환 등에게 독립선언서 서명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아냈다. 그가 3.1혁명을 추진한 초기의 상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작년(1918년) 11월 중에 대판(大阪)매일신문 지상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평화회의에 제출한 의제 14개조 중에서 민족자결의 한 조항을 보고 조선도 이 문제의 범위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뒤 위의 결의가 미국정부에 접수되어 상원 외교조사부에 회부되었다는 것이 모두 일본신문에 나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나는 민족자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운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뜻을 세우고 우선 동지를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작년 12월 초순경에 먼저 오세창을 방문하였더니 동인도 신문을 보았던 것으로 내가 의견을 말했더니 같은 의견이라고 해서 한 사람의 동지를 얻었던 것이다. 거기에 최린이 왔으므로 동인에게도 의견을 말했더니 역시 같은 의견이라고 해서 세 사람이 동지가 되었으니 이 운동에 대해서는 동지가 세 사람이면 충분하므로 이 세 사람이 자결 문제를 해결하자고 약속하고..."(1919년 4월 8일자 신문조서)
 

권동진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2.) (매일신보)

 
이후 천도교는 기독교, 불교 측 인사들과 연대하여 총 33인으로 민족대표를 구성하였다. 당초 거사일은 3월 3일로 정하였으나 이날은 고종의 인산일이어서 불경(不敬)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또 3월 2일은 일요일(주일)이어서 결국 3월 1일로 변경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였으며, 인쇄는 천도교가 경영하던 보성사에서 맡았다. 2월 28일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열린 최종모임에서는 장소를 당초의 파고다공원에서 명월관 지점(태화관)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만에 하나 소요사태를 우려한 때문이었다. 3월 1일 오후 2시 예정대로 독립선언식을 열렸고, 식이 끝날 무렵 일경이 들이닥쳐 참석자 전원을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그는 33인 가운데서도 초창기부터 관여한 핵심인사였다. 그런 만큼 일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신문하였다. 따라서 그의 신문조서는 다른 민족대표에 비해 분량 또한 훨씬 많다. 신문조서 가운데 일부 발췌해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피고는 일한병합에 대하여 어떤 감상을 품고 있었는가.
답: 일본은 청국과 싸워 조선을 독립국으로 했으나 조선의 정치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또 러시아와 싸우게 되어 그 결과로 조선을 보호국으로 한 것은 시세의 형편상 부득이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병합에 대해서는 표면상으로는 주권자 사이에서 원만한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다수 조선 인민의 의사가 아니고 병합은 시대사조에 그릇되고 정책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여 나는 병합에는 불찬성이었다.
(1919년 4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문: 일본정부나 귀족원, 중의원 양원에 청원서를 제출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답: 그것은 이러한 상황이니 잘 고려해 보아 달라는 의미이다. 고려해 보아 달라는 것은 바로 독립을 하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문: 그러면 국제연맹의 힘에 의지하고 일본정부에는 청원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
답: 나는 현재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서 승인을 해 주지 않는다면 국제연맹만으로는 독립을 시켜 주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가장 가까운 곳의 일본이 이의 없이 독립을 승인해 준다면 대단히 좋을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문: 그런 생각이라면 다만 일본정부에만 청원서를 내면 될 것으로 구태여 강화회의나 국제연맹에까지 청원서를 제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답: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만 반쯤 장난이 되고 말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결연히 선언을 발표하고, 이어서 민족자결을 어디까지나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 국제연맹이나 강화회의에까지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문: 독립선언서는 무엇 때문에 발표했었는가.
답: 그것은 동포 곧 조선민족에게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문: 무엇을 알리는 것인가.
답: 지금은 일본과 병합되어 있으나 독립하는 것이 좋다고 모두 다 생각하고 있다는 그것을 알리는 것이다.
(1919년 8월 20일, 고등법원에서)


경성복심법원은 1920년 10월 30일 선고공판에서 손병희를 비롯해 권동진·최린·오세창·이종일·이인환(이승훈)·함태영·한용운 등 핵심 8명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 33인 가운데는 이들이 최고형을 받았다. 이들은 서대문감옥을 거쳐 경성감옥으로 이감돼 모자를 만들거나 그물 짜기 노역을 하며 옥고를 치렀다.

수감 중에 그는 위병(胃病)으로 고생하였다. 한동안 병감(病監)에 수감돼 있었으며, 영양보충을 위해 사식을 차입해 먹기도 했다. 그를 포함해 7명은 만기를 두 달여를 앞두고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했다. (이승훈은 1922년 7월 22일 33인 가운데 최후로 출옥하였다)

사회주의 표용한 독립운동가

그가 출옥할 무렵 조선사회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로 인해 민족진영이 자유주의 대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다. 당시 사회주의는 주로 젊은 지식층이 선호하였으나 그는 60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하였다. 그는 사회주의야 말로 모든 주의(主義) 중에서 인류애가 가장 이상적인 사상이라고 여겼다. 그는 또 사회주의만이 인류를 위한 진리, 복리에 기반하고, 천부의 평등·자유를 지향하는 인류주의라고 정의했다. 그는 사회주의는 금권 만능주의의 해독을 지닌 사회조직의 결함을 개조할 수 있는 선견(先見)이라고 여겼다.

1922년 5월 교주 손병희가 세상을 떠나면서 천도교는 내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신파의 최린과 구파의 권동진·이종린 등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정치적인 입장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당시 타협적 민족우파 계열의 김성수, 이광수 등과 교류하던 최린은 자치론을 주장하였다. 반면 권동진 등은 자치론에 반대하며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1926년 6.10만세항쟁 당시 그가 중심이 된 천도교 구파는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뒤에서 적극 지원하였다.

6.10만세운동 직후 그는 천도교 구파 인사들과 함께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신간회 본부 창립 부회장, 1929년 6월에는 '복(複)대표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신간회 활동에 열정을 쏟았다. 그해 11월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규명을 위해 광주에 사람을 파견하는 한편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하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학생 탄압을 알리고 학생운동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신간회 원로로서 대회 당일(12.13) 연설을 할 예정이었는데 사전에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그는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협회에서 처음 만난 이후 28년간 그를 동지이자 스승으로 받들며 고락을 함께 한 이종린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세상에 그의 벗, 그의 동지가 많겠지만 그를 아는 점에 있어서 나를 따를 이 없다고 자신하는 바이다. 그의 성미는 오직 '일'에 있을 뿐이요, 명예나 재물에 마음이 없으며, 그의 특성은 오직 나아감이 있고, '함'에 있을 뿐이요. '뒷걸음'과 '못함'이 없음을 나는 잘 아노라... 그런 까닭에 일을 잘 벌여 놓고, 간혹 수습을 잘 못하는 결점이 그에게 있다. 그리고 28년 동안 권동진씨에 사심(私心)이 없는 일사(一事)를 나는 경험으로 알고 존경하기를 불이(不已)하였다… 일상 술을 가까이 하지 않고, 담배도 안 피운다. 더구나 여색이나 금전이랴. 칠십 평생 깨끗한 뜻과 청빈(淸貪)으로 시종하였다." ('일점 무사심(無私心)의 권동진', <삼천리> 제7권 제3호, 1935.3)

이종린에 따르면, 그는 실천하는 독립운동가였으며, 명예나 재물을 탐하지 않고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다고 한다. 특히 그는 민중의 지도자로서 용기와 덕성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도맡았던 가인 김병로(金炳魯)는 그가 1929년 광주학생사건 후 민중대회 건으로 체포돼 검사국 송치될 때 눈물을 훔쳤노라고 회고한 바 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민족진영 인사들에 대해 극심한 탄압과 회유공작을 벌였으나 그는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아들이 의사여서 생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8.15 해방 당시 85세의 고령임에도 신생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섰다. 그는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임정세력을 건국의 주체로 인식하였으며, 1945년 12월 신탁통치의 소식이 전해지자 신탁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여 독립국가 수립에 힘을 쏟았다. 또 정부수립 문제를 놓고 좌우세력이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분열, 대립하자 신한민족당을 결성하여 통일정권 수립을 촉구하였다. 그에게 건국운동은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었던 셈이다.
 

권동진 동상(청주 삼일공원) ⓒ 33인유족회

 
무관으로 관직에 진출한 이래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바친 그는 1947년 3월 9일 경기도 장호원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향년 87세. 빈소는 천도교 중앙총부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15일 천도교당 광장에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치러졌다. 장의위원장을 맡은 백범 김구가 식사(式辭)를, 벽초 홍명희가 애도사를 했다. 영결식 후 유해는 홍제원 화장으로 옮겨져 화장한 후 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62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1966년 4월 국무회의 의결로 유해가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20번)으로 이장되었다. 1980년 청주 3.1공원에 그를 포함해 충북지역 출신 민족대표 33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987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권동진 편', 2007.3
- 권동진, '3.1운동의 회고', <신천지> 제1권 제2호, 1946.3
- 김주용, '3·1운동과 천도교계의 민족대표-권동진과 이종훈을 중심으로', <제3회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 논문집>, 33인유족회, 2005.2.28.
- 장석흥, '권동진의 생애와 민족운동', <한국학논총> 제30집, 2008.2,
- 장승순, '충북 독립운동가 열전-권동진', <충북일보>, 2015.3.8.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자유신문, 경향신문, <대한협회보>, <삼천리> 등 기사 참조)



3.1 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정운현 지음, 역사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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