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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철기시대부터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적
▲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발견된 "붓" 한반도에서 철기시대부터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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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창원 다호리 유적지에서 다섯 자루의 붓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5세기 경부터 기원후 1세기경까지 한반도에서 문자가 사용되고 있음을 밝히는 중요한 유물이었다. 그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문자 사용의 증거'가 나타나 다행이면서도 나를 서글프게 했다.

역사시대는 '문자'의 등장과 함께 시작한다. 문명의 시작을 알린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 중국의 갑골문자와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한 나라의 시작점을 붓으로 가늠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현실이 아쉽다.

문자의 의미

역사에서는 왜 문자의 등장이 중요할까? 당연하게도 정보를 누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문자가 없던 과거에도 기억을 누적하는 '기억술'이 존재했다. 한 사회의 법과 규범을 전승하기 위해 몸에 문신을 새기는 방법이 간접적 사례에 해당한다. 한반도 남부에서도 어린아이의 두개골 모양을 외부적 압력을 통해 납작하고 긴 모양으로 만드는 '편두' 풍습을 통해 인간 신체에 사회 규범을 새기어 전승하곤 했다.

고대 로마나 그리스에서 사용했던 '기억의 궁전'이라는 기억술 역시 문자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 사람들이 정보를 보관하고 전달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건축물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동선을 계획한 후, 그 동선을 따라 기억해야 할 사실들을 하나씩 배치하는 방법이다. 이는 인간의 공간 추상화 능력과 과거 기억을 연계하는 방법으로, 자신이 상상한 건축물이 명료할수록 망각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술로는 개인의 정보를 보관할 수 있어도, 집단 정보의 누적도 어렵다. 

문자의 등장은 한 집단의 지적 능력을 극대화하는 가장 효율적 도구이다. 실제로 문자 등장 이전 구석기 시대가 200만 년 동안 쌓아온 지식의 총량은 문자가 등장한 이후 신석기 시대 1만 년 동안 쌓은 지식과 비견할 수 없다.

기록과 보관의 중요성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은 1145년에 집필된 <삼국사기>다. 기원전 600년경 정리된 중국의 <서경>과 712년 완성된 일본의 <고사기>와 비교하면 기록 연대가 늦은 편이다. 물론 <삼국사기>에는 약 4세기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고구려의 <유기>라는 고대 역사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기>의 원본이 발견되지 않는 한 한국사의 역사적 사실들을 직접 뒷받침하는 근거들은 확보하기 어렵다. 

반만년까지 소급하기는 어렵더라도 수천 년에 달하는 역사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 아쉽다. 이와 같은 큰 아쉬움이 남게 된 이유가 결국 제대로 지키지 못한 탓이라는 것도 안타깝다.
 
1972년 박병선 박사의 연구로 프랑스에서 발견된 직지심경
▲ 직지심경 1972년 박병선 박사의 연구로 프랑스에서 발견된 직지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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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침략과 병인양요

무엇보다 9번에 걸친 몽골의 집요한 침략이 원인이었다. 황룡사 9층 목탑, 초조대장경 등 건축물과 방대한 유산들이 방화로 소실됐다. 이 과정에서 소량 제작된 필사본을 후대에 전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대의 역사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현실에서 한국사 연구자들은 '비석'과 '고분'에 의존해 고대사의 조각들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교훈 덕분인지 조선은 <왕조실록>을 5곳으로 나눠 안전한 장소에 보관했다. 임진왜란 당시 한반도 전역이 황폐화되었음에도 왕조실록을 지켜낸 것은 보관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가 침입했을 때는 도리가 없었다. 배 운용에 취약했던 그간의 기마 민족들과 달리 대양을 건너다니던 프랑스는 강화를 침공해 외규장각 속 도서를 약탈했다. 박병선 박사가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할 때까지 한국은 강화에서 빼앗긴 도서가 무엇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광개토대왕비와 신라 민정문서

남아있는 책과 문서가 없었던 한국에 마지막 남은 희망은 비석이었다. 여러 왕의 무덤은 이미 도굴로 부장품 상당수를 찾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비석은 대부분 남아있었다. 그중에서도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전성기 사회와 문화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 이 비석을 발견한 사람은 일본인 장교였다. 당시 비석의 내용 일부가 일본에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현재 광개토대왕비를 관리, 감독하는 나라가 중국이라 한국의 역사 연구자가 비석을 연구하기란 제한적인 상황이다.
 
1931년 일본의 '서도전집' 6권에 실린 광개토대왕비
▲ 광개토대왕비 1931년 일본의 "서도전집" 6권에 실린 광개토대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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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창원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의 <민정문서>는 더욱더 서글프다. 신라의 정교한 행정력을 보여주는 <민정문서>는 8세기 중반에 신라 중앙 행정부가 각 지역의 인구, 재산 등을 꼼꼼히 정리한 자료다.  

그러나 이 <민정문서>는 일본의 정창원이라는 고문서 보관소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제라도 발견되어 다행이라 말하기에는 일본 책싸개에 감싸져 있던 민정문서의 신세가 지난 한국사의 아쉬운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일본 정창원에서 일본 고문서를 감싸는 '책싸개'로 발견된 통일신라 서원경의 행정문서
▲ 신라민정문서 일본 정창원에서 일본 고문서를 감싸는 "책싸개"로 발견된 통일신라 서원경의 행정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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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행사와 집단 기억

기록과 기념은 한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전승하는 핵심 도구다. 물론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인위적으로 왜곡·훼손될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비교 분석을 위한 기존 자료 보존과 비판적 해석이 중요하다. 특히 3.1운동, 임시정부 수립과 같이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변곡점을 집단으로 기념해 온 방식과 태도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는 '내'가 속한 사회의 지향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사의 출발점을 '붓'으로 가늠해야 하는 현실을 반성하고, 국가의 주요 문서가 타지에서 '이면지'처럼 대우받지 않도록, 체계적인 기록과 기념물 관리가 필요하다.

태그:#기록물 관리, #직지심경, #광개토대왕비, #민정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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