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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정상회담이 열린 28일 오전 베트남 하노이에 마련된 국제미디어센터에서 김정은-트럼프의 정상회담이 중계되고 있다.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28일 오전 베트남 하노이에 마련된 국제미디어센터에서 김정은-트럼프의 정상회담이 중계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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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북미정상회담장인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은 역사가 깊은 곳이다. 프랑스가 지배할 때인 1901년 세워져 1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한다.

긴 역사만큼 투숙객들의 일화도 많다.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1936년 신혼여행차 이곳을 방문했다. <달과 6펜스> 등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윌리엄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년)은 이곳 객실에서 작품을 썼다. 반전운동가이자 미국 가수인 존 바에즈(Joan Baez, 1941~)는 1972년 미군이 폭격할 당시 이 호텔 지하 방공호에 숨어 지냈고, 이때의 경험을 <내 아들 지금 어디 있나(Where Are You Now, My Son)>란 노래에 담았다.

북베트남(현 베트남의 전신)의 적이었던 미국 고위인사들도 방문했다.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존 매케인 상원의원(베트남전 당시 포로) 등과 더불어 도널드 트럼트 대통령도 방문한 적이 있다.

'전쟁과 평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의미 깊었던 손님이라면,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1916~2009년)을 들 수 있다. 1961년부터 7년간 국방장관으로서 베트남전쟁을 지휘한 인물이다. 케네디 행정부(민주당) 및 존슨 행정부(민주당) 2대에 걸쳐 전쟁을 총괄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1997년 6월 20일부터 4일간 메트로폴 호텔에 머물며 '하노이 대화'라는 유명한 토론회를 진행했다. 베트남전쟁을 주제로 베트남과 미국이 회고와 반성의 시간을 갖는 대화였다.

메트로폴 호텔에서 지난날 앙금 털어낸 미국과 베트남
 
로버트 맥나마라.
 로버트 맥나마라.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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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대화에는 베트남전 당시의 당사자들이 출동했다. 양국 공히 13명씩 나왔다. 미국팀은 맥나마라 전 장관이 이끌고, 베트남팀은 전쟁 당시 외무차관이었던 응우옌 고 탁이 이끌었다.

이 대화는 양국 정부의 위임을 받은 공식 회담은 아니었다. 그러나 20년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1995년 국교를 체결한 두 나라가 수교 2년 만에 벌이는, 베트남전을 결산하고 앙금을 터는 대화였다. 이런 모임을 메트로폴에서 진행했으니, 호텔 입장에서는 이미지 제고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 26명은 베트남전이라는 비극을 사전에 막을 수 없었는지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다. 서운했던 문제에 대한 발언도 거침없이 나왔다. 일례로, 베트남이 독립을 목표로 프랑스와 전쟁할 당시인 1945년에 호치민(호찌민) 주석의 우호관계 요청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거절한 것에 대해 베트남 측이 서운함을 표시하는 발언도 있었다. 그때 우리를 도와줬더라면 싸울 일이 있었겠느냐는 식의 발언이었다.

하노이 대화를 정리한 히가시 다이사쿠 조치대학 교수의 <적과의 대화>에 그 발언이 소개돼 있다. 이 책은 번역가 서각수의 손으로 한국어판으로도 나와 있다. 베트남전 당시 외무부 대미정책국장이었던 쩐꽝꼬의 입에서 나온 발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처음부터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도 있었건만,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대목이다.
 
"최초의 '놓쳐버린 기회'는 1945년부터 1946년 사이에 있었습니다. 만약 트루먼 대통령이 1945년 9월에 호치민 주석이 보낸 편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는 프랑스에 반대했더라면, 베트남의 독립은 미국·프랑스와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달성되었을 것입니다."
 
다 지난 얘기 뭐하러 하나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대화가 그간의 앙금을 털어버리는 데 도움이 됐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960년에 북베트남 지원 하에 베트콩(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전위부대)과 남베트남 정부군의 싸움으로 시작된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통킹만 사건(1964. 8. 4.)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북베트남과 미국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하노이의 외항인 통킹만을 순찰하던 미국 구축함 매독스호 및 터너 조이호가 공해상에서 공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미국은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했다.

미국의 전면 개입 명분이 된 통킹만 사건도 하노이 대화의 의제가 됐다. 허심탄회한 대화 끝에 맥나마라는 '북베트남이 공해상에서 공격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964년 당시에는 진실을 전혀 몰랐다는 식으로 맥나마라는 말했다.

<적과의 대화>에 따르면, 그는 "베트남 측의 증언을 역사적 사실로서 존중한다"는 자세를 보였다. 일선 미국 장교들이 허위 보고를 했고 미국 정부는 전혀 몰랐으니 양해해달라는 식으로 문제를 마무리한 것이다.

'적과의 대화'에서 '친구와의 대화로' 
 
1965년 남베트남을 방문한 로버트 맥나마라(사진 중앙).
 1965년 남베트남을 방문한 로버트 맥나마라(사진 중앙).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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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간의 대화 막판에 맥나마라는 후회 섞인 발언으로 하노이 대화를 마무리했다. 처음부터 잘못된 전쟁이었다는 탄식을 내뱉었다.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을 공연히 벌여서 인명손실만 봤다며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다.

맥나마라는 양국이 서로를 오해했기 때문에 사태가 불거졌다고 말했다. 당신네 베트남은 우리를 프랑스와 동일시했고, 우리 미국은 당신들을 소련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1964년의 확전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적과의 대화>에 따르면, 마무리 발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러한 미국·베트남 쌍방의 오해가 1961년부터 1968년 사이에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오해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싸우지 않았을 우리 둘이 공연히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식으로 발언했던 것이다. 100% 진실한 말들은 아니지만, 이 같은 하노이 대화를 통해 베트남과 미국은 비공식적 형식을 통해서나마 상호간의 앙금을 풀고자 했다.

하노이 대화는 양국이 과거의 앙금을 풀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전진하는 데 도움이 됐다. 이런 역사적인 대화가 메트로폴 호텔에서 열렸으니, 전쟁을 평화로 바꾸는 마술사 이미지가 호텔에 따라붙을 만도 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도 메트로폴에서 성공적 결실을 맺는다면, 두 사람의 회담 역시 하노이 대화 못지않게 이 호텔에 큰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메트로폴 호텔.
 메트로폴 호텔.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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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대화와 달리, 이번 정상회담은 국가 최고지도자 간에 이뤄지는 만남일 뿐 아니라 최첨단 무기인 핵무기를 놓고 벌어지는 세계적 담판이다. 유엔 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만 합법적으로 갖고 있어 세계 패권을 좌지우지하는 핵무기를 소재로 하는 담판이므로, 하노이 대화는 근접할 수 없는 세계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이런 역사적 회담에서 북미 양국이 70년간의 앙금을 상당 부분 풀고 미래지향적 관계를 만들어낸다면, 이제까지 매트로폴에서 있던 그 어떤 일보다도 더 큰 역사적 의의를 산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미 정상이 '적과의 대화'를 '친구와의 대화'로 바꿔놓고 떠난다면, 이 호텔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그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태그:#메트로폴 호텔, #북미정상회담, #맥나마라, #김정은, #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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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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