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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생명체와 같아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며 변화를 거듭한다. 그래서 그럴까? 한글의 변화 속도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세상의 중심축이 디지털로 이동한 이래 눈부신 속도로 변해가는 사회상을 고스란히 빼닮은 모양새다. 특히 SNS 등이 텍스트의 간결화를 요구하면서 축약어나 외계어 같은 신조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는 훈민정음을 빗댄 '야민정음(글씨체를 비슷한 모양의 글자로 바꾸는 놀이)'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즐겨 사용되곤 한다. 이를테면 명작을 '띵작'으로 한다거나 멍멍이를 '댕댕이', 그리고 대한민국을 '머한민국'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한글 단어를 비슷하게 보이도록 하는, 다른 글자로 응용하여 표현하는 일종의 놀이문화다.

35주년 기념 제품 '괄도네넴띤' 불티나게 팔려

이와 관련, 최근 팔도가 비빔면 출시 35주년 기념으로 내놓은 '괄도네넴띤'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팔도비빔면을 야민정음식 표기로 바꿔 '괄도네넴띤'이라는 해괴한 제품 이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에 일부 소비자들이 열광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팔도 비빔면의 한정판 '괄도네넴띤'이 지난 19일 한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판매를 시작한 지 불과 23시간 만에 7만5000세트 전량이 완판된 것이다. 팔도는 당초 일주일 판매 분량을 준비했으나, 출시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포털 실시간 검색어로 등극하면서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간 내에 마감됐다.
 
팔도 비빔면 출시 35주년 기념 제품 '괄도네넴띤'
 팔도 비빔면 출시 35주년 기념 제품 "괄도네넴띤"
ⓒ 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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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둘로 극명하게 갈린다. 한쪽에서는 해당 상품명이 '기발하다'거나 '재미있다'는 의견이 많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놀이문화를 넘어선 뻔뻔한 상혼'이라고 하거나 '한글 파괴'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은 한글파괴인가 언어유희인가.

한글을 비튼 유희 내지 일탈은 현실의 삶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일종의 기제다. 지나친 경쟁 속에서 삶이 팍팍해지고 희망을 찾기 어렵다 보니 말초적인 자극을 통해 즐거움과 위안을 얻으려는 놀이 행위에 가깝다. 이러한 놀이가 SNS라는 파급력이 월등한 매체를 만나 문화로 자리 잡게 된 것이고, 여기에 대중매체의 부추김과 상업성이 더해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결과를 빚게 된 것이다.

축약되거나 비틀어진 한글은 SNS에서 가장 먼저 활용되고, TV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재활용되어 확대재생산 과정을 거친다. 여기에 일부 기업이 상업적으로 활용하면서 어느덧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안착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단순한 재미와 유희를 앞세운 언어 일탈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사회 문화적 현상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유희로 활용되는 언어는 결국 사회적 약속의 틀을 깬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파괴되고 왜곡된 언어를 진실로 아는 젊은 계층이 요즘 적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한글 고유의 아름다움을 해치고 세대 간 소통을 가로막게 한다는 점도 큰 문젯거리다. 일부 계층에서는 신조어나 줄임말 사용을 세련됐다거나 단순한 유행이자 놀이로 치부하는 인식도 존재한다. 일부 언론 및 예능을 중심으로 한 TV 매체가 사회적 공기로서의 책임감을 무시한 채 언어 일탈 행위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도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다.

"기업 제품명, 놀이문화 차원 넘어서"
 
축약되거나 비틀어진 한글은 TV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재활용된다
 축약되거나 비틀어진 한글은 TV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재활용된다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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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비빔면 이슈는 이러한 사회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기업이 사회적 책임과 가치를 무시하고 오로지 이윤만 앞세우다 보니 벌어진 결과물에 가깝다. 한글문화연대가 27일 논평을 통해 "누리꾼들이 개인 수준에서 즐기는 놀이문화 차원이 아니라 돈 버는 일이라면 한글 파괴도 서슴지 않겠다는 뻔뻔한 상혼에 걱정을 거둘 수 없다"고 꼬집은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히는 지점이다.

우리말을 말살하고 어떻게든 조선을 제국주의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의 혼이 깃든 한글을 보살피고 살리기 위해 모진 고초를 이겨냈던 조선어학회 회원과 당시 그들을 물밑에서 그림자처럼 도왔던 민초들의 이야기, 즉 영화 <말모이>는 아직 상영관에서 상영 중인 작품이다.

우리가 지금 숨을 쉬고 물을 마시듯 일상 속에서 아무런 의식 없이 편하게 활용하고 있는 한글이 사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식인들뿐 아니라 우리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는 민초들의 지난한 노력과 희생이 근간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새날이 올거야(https://newday21.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팔도 비빔면, #괄도네넴띤, #언어유희, #한글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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