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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5일 밤 대구지방법원.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 적막한 중에도, 유독 형사법정 앞은 삼삼오오 무리지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복도에 쪼그려 앉아 기도하는 사람들, 초조한 나머지 법원 건물 앞에서 줄담배를 태우는 사람들. 다들 표정은 밝지 못했다. 한참 뒤, 법정 경위가 소리쳤다. (관련기사:"아버지는 한국자동차산업을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판결 선고합니다. 다들 입장하세요."

다들 황급히 법정에 입장했다. 다들 숨죽이며 긴장하는 가운데, 재판장의 판결서 낭독이 시작되었다.

"피고인들은 현대자동차 2차 협력업체 경영진들로서, 회사 경영이 악화되었음을 이유로 부품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1차 협력사를 협박하였고, 기업인수대금 명목으로 거액을 취득하였다."

지난 여름날 어느 지방법원에서의 이례적인 판결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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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진 형량 선고 "배심원들의 평결 결과, 피고인들은 유죄." 사람들의 탄식이 뒤따랐고, 가족들은 울기 시작했다.

"피고인들에게 각각 징역 2년 6개월, 징역 3년을 선고한다."

피고인석에 서 있던 피고인들의 다리가 풀리는 것이 보였다. 가족들은 소리 높여 울었다. 그런데, 재판장이 말을 이었다.

"다만, 국민참여재판 취지에 따라 배심원들의 양형 의견을 고려하여, 피고인들에게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하기로 한다."

그 순간 방청석 가득히 "와!" 하는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피고인 한 명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고, 가족들과 변호인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했다. 배심원들 중 몇은 법정을 나가면서 작은 소리로 가족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반면 공갈죄 고소인 자격으로 법정에 있던 1차 협력사 관계자와 대형 로펌 변호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법정을 빠져나갔다. 공갈죄 무죄 판결도 아니고 단지 형 집행을 유예하는 유죄판결인데도, 피고인측은 환호하고 고소인 측은 침울한 분위기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검찰과 법원이 유사 사례들에 대해 기계적으로 실형을 선고해왔기 때문이다. 종래 자동차 제조업 2차, 3차 협력업체(하청업체)들의 납품 중단 및 보상 요구 행위에 대하여, 검찰과 법원은 기계적으로 공갈죄(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를 적용하고 집행유예 없는 실형을 선고해 왔다.

거의 수학공식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는 집행유예가 선고된 것이다. 국민참여재판으로 배심원단이 평결했기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그러나 그 판결은 냉정히 말해 잘못된 판결이다. 실형이냐 집행유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사안에 공갈죄를 적용하는 자체가 옳지 않다는 뜻이다.

대기업 갑질에 유독 취약한 자동차산업, 이들에 관대했던 검찰과 법원

 
자동차공장 생산라인에서 한 노동자가 작업하고 있다.
 자동차공장 생산라인에서 한 노동자가 작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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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6일 고용진, 성일종, 추혜선 국회의원 공동 주최 학술세미나에서도 형사법학자들이 같은 취지의 발제를 한 바 있다. 중소 하청업체들이 대기업의 갑질을 견디다 못해 납품을 중단하고 보상을 요구하는 행위는 기업간의 거래 협상에 불과한데, 그처럼 민사재판으로 해결할 일을 사법부가 나서 공갈죄로 감옥에 가두는 것은 국가 형벌권의 남용이라는 요지였다.

하청업체라면 다들 대기업의 갑질에 시달려 본 경험이 있겠지만, 자동차 제조업 하청업체들은 특유의 전속거래구조와 직서열생산방식(JIS,Just In Sequence)로 인하여 대기업의 갑질에 유독 취약하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완성차업체의 비용절감을 위해 하청업체들을 마치 자회사처럼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국내 자동차업계에서는 심지어 하청업체 직원 월급마저도 대기업이 정해주다시피 하여 하청업체에는 최소한의 이윤만 주어지는 반면, 부품 재고 부담은 하청업체에 전가되기에 자동차산업 피라미드의 상층부에 있는 대기업들만 더 많은 이윤을 누리게 된다.

일례로 2018년 국정감사에 출석했던 현대자동차 관계자와 2차 하청업체 관계자의 증인신문 과정에서 충격적인 증언이 나왔다. 전속거래와 직서열생산방식(JIS) 체제 아래서, 현대자동차가 하청업체들의 납품 차질로 인한 생산라인 정지시 부과하는 클레임이 '1분에 1백만원'이라는 것이었다. 비용절감을 위해 현대차 스스로 재고 부담을 최소화하다 보니, 하청업체들에 과도한 페널티를 부과해야만 생산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기형적인 구조인 셈이다.

더 큰 문제는 대기업인 1차 하청업체들조차 부품 재고 부담을 2차 하청업체들에 전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천재지변을 감안해서라도 부품 재고는 미리미리 쌓아두어야 할 터인데, 비용절감을 위해 재고를 최소화하고, 하청업체들이 노예처럼 바로바로 납품하기만 바라다 보니 결국은 사고가 발생한다.

하청업체 사장들이 억울하게 공갈범으로 내몰리는 원하청 구조

 
자동차공장  생산라인에서 한 노동자가 작업 도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자동차공장 생산라인에서 한 노동자가 작업 도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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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 대기업의 하도급 불공정행위에 시달려 한계를 맞은 2차 하청업체들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부도를 낼 경우 종업원들이 일자리를 잃는다. 기업회생절차는 경영진의 주식이 휴지로 변하며, 자칫하면 최대 채권자인 1차 하청업체에 회사를 공짜로 바치게 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여전히 1차 하청업체의 노예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2차 하청업체들로서는 납품 중단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보상이나 기업인수를 요구하는 방안이 가장 현실적이다.

그러자 1차 하청업체들은 현대차 생산라인 중단시 부담할 페널티를 피하기 위해, 부품 생산 설비의 핵심인 금형(金型)을 강제로 빼앗기도 하고, 몰래 새 금형을 만들어 다른 하청업체에 넘겨준 뒤 기존업체에 거래 중단 선언을 했다. 거래 중단을 당한 하청업체 사장이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2차 하청업체들도 납품 중단시 공장문을 폐쇄하고 금형을 지키기 시작했는데, 1차 하청업체들은 대형 로펌 자문을 받아 일단 2차 업체에 원하는 돈을 준 다음, 공갈을 당했다며 형사고소하는 수법을 동원했다.

그 바람에 법률 문외한이던 2차 하청업체 경영진들은 줄줄이 실형 선고를 받아 공갈범으로 감옥에 갇혔고, 지금도 여러 명이 재판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그들의 억울함을 구명하고자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기기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뜻있는 시민단체, 언론, 국회의원들이 여러모로 자동차 제조업 2차 하청업체들을 도와주고 있지만, 대법원의 전향적인 판례 변경 없이는 그런 노력도 무위에 그칠 수 있다는 걱정이 마음을 짓누른다. 왜 그리 부정적이냐고?

처음에 소개한 피고인들도, 국민참여재판이 아닌 일반 항소심 재판에서는 결국 실형을 선고받고 현재 감옥에 있기 때문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덧붙이는 글 | 서보건 기자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로, 민변 민생위원회 공정경제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자동차 산업, #납품단가 후려치기, #대기업 갑질, #원하청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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