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14 08:40최종 업데이트 19.04.08 14:10
  [기사 수정: 14일 오후 2시 8분] 

겨울에 눈이 소복이 쌓이면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떠올린다. 그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시어들은 한 편의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지기도 하고, 한 폭의 그림처럼 애틋하게 가슴에 묻히기도 한다. 옛 사람이 말한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말이 다름 아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의 이 아름다운 시는 1938년 <여성>이란 잡지에 실린 것이다. 이 시가 잡지에 실릴 때에는 활자로만 발표된 것이 아니고, 글자의 배경에 아련한 서정을 보이는 삽화가 깔려 있었다. 이국적인 한 여인의 옆모습이 검은 색 선묘로 그려져 있고, 여인의 앞으로 주황색 색조에 둘러싸인 당나귀 한 마리가 고독한 표정으로 걷고 있다. 

여인과 당나귀는 모두 외로운 존재처럼 보이고, 감각적인 삽화는 시의 정서를 잘 대변하여 보여준다. 이 삽화를 그린 이가 바로 한국 근대미술가 중에 다재다능하기로 손꼽히는 서양화가 정현웅(鄭玄雄, 1910-1976)이다. 빼어난 언어감각을 가진 시인과 뛰어난 솜씨를 가진 화가가 만나 이루어낸 한국 근대 예술사의 명장면이다.

정현웅을 다시 생각하다  

한동안 월북한 화가라는 굴레에 묶여 있던 화가 정현웅은 근대기의 대표적인 서양화가이다. 특히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화가였는데, 말 그대로 서울 토박이이다. 경복궁 옆 서촌 궁정동에서 태어나 결혼하여 분가할 때까지 산다. 그의 집안은 8대를 계속해서 서울에서 살아온 선비 집안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필운동 자락에 있는 매동보통학교를 다닌 후 역시 집 근처에 있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를 다닌다.

경성제2고보 재학할 때 일본인 미술 선생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에게 배우며 화가로서의 꿈을 키운다. 고보 졸업 후에 화가에 대한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 들어갔으나 갑자기 집안의 형편이 기울어 학비를 대줄 형편이 못되었다. 더군다나 몸이 허약해 일을 할 형편도 못되어 6개월 만에 돌아오고 만다. 그러나 정현웅은 화가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미술을 공부한다.

이때부터 그는 화가 지망생들의 등용문인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며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구축한다. 1927년 제 6회 미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이후 계속해서 1940년 19회 미전까지 출품하여 상을 받는다. 그에게 있어 조선미전은 화가로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화가로서의 입지가 구축되자 그는 신문사와 잡지사 등에 취직하여 표지 장정과 삽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온화하고 섬세한 성품과 잘 어울렸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공간에 이르는 기간에 출판된 책 중에 가장 많은 표지 장정을 그린 이가 바로 정현웅이다. 

정현웅은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18일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기장으로서 친일미술인들 10여 명을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작업의 중심 역할을 한다. 1948년에는 좌익계열인 조선미술동맹 간부로도 활약한다. 그는 해방공간의 혼탁한 남한 미술계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는데, 마침 일어난 6.25전쟁 중 남조선미술가동맹의 서기장 직책을 맡는다. 그러나 국군의 9.28수복으로 인해 자신이 꿈꾸었던 사회주의 세상이 무산되자, 급히 가족들을 남쪽에 남겨두고 월북하고 만다. 

정현웅의 표지화와 삽화

정현웅의 단행본 장정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당대 최고의 작가였던 이광수의 작품 <사랑>, <무정> 등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에서 시작하여, 박태원의 <천변풍경>, 채만식의 <탁류> 등 수없이 많은 책의 장정을 맡아 하였다.

점차 단행본뿐만 아니라 잡지의 표지도 많이 그렸다. <문장>, <여성>, <소년>, <소학생> 등 잡지 표지의 그림을 그렸고, 특히 <반도의 빛>이라는 잡지의 장정은 그가 도맡아 하여 훗날 친일 행위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그가 장정을 한 책이 유난히 인기가 있자 더욱 많은 표지의 청탁이 들어왔다. 정현웅이 화가로서 이름이 있었음에도 화가의 본령인 유화를 제대로 그리지 못하게 된 것도 이런 장정 그림에 매몰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현웅은 어느새 장정 전문가가 된 자신의 모습에 회의를 느끼곤 하였다. 그는 자신이 장정했던 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싶다 하거나, 새로 만들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 그는 자신이 장정한 책을 보관하기를 싫어했다. 어떤 책은 꼭 필요한 한 권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나마 표지를 검정색으로 칠해 버리기도 하였다. 그가 평소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의 부탁을 받고 하는 것이 수치스러워 그랬을 것이다. 점차 장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생각이 바뀌기도 하였지만 역시 장정을 하는 일은 늘 마뜩치 않은 일이었다. 
                  
정현웅이 장정과 함께 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35년 이무영의 소설 <먼동이 틀 때>의 삽화를 그리면서부터이다. 마침 삽화를 그리던 이가 병으로 입원하게 되어 대신 그리게 된 것이다. 처음 해보는 일이기도 하고 평소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 정성과 열정을 쏟아 능력을 인정받게 되어 계속해서 수많은 삽화를 그리게 된다. 그는 삽화 그리는 일의 어려움과 자신의 재능에 대해 늘 반성하며 삽화 그리기에 매진하였다.

신문소설의 삽화는 늘 바삐 그려야 하기 때문에 특히 실수가 많았다고 한다. 한 번은 계절이 겨울인 줄 알고 외투를 입은 모습을 그렸는데, 글을 다시 보니 봄이 배경이라 곤란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주인공이 40대 여성인 줄 알고 그렸는데, 다음 날 소설을 읽어보니 20대 여성이라 낭패한 적도 있었다. 또한 양장 옷이려니 짐작하고 그렸더니, 나중에 보니 빛깔과 맵시의 세밀한 설명까지 붙어 있는 조선 의복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모두 삽화 그리기의 어려움을 잘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정현웅의 만화   

다양한 정현웅의 작업 중에서 근래에 새로이 관심을 받는 분야가 만화이다. 그동안 만화는 순수 미술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갈래로 취급되어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 미술사에서 디자인과 응용미술에 관심이 높아지며 만화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그러나 한국 근대기에 만화 작품을 남긴 이가 많지 않아 세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정현웅의 그림 세계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편의 장편만화와 잡지 등에 게재한 단편만화가 발견되어 한국만화사를 새로 쓰게 되었다. 

정현웅의 그린 만화로는 <콩쥐팥쥐>, <홍길동>, <아리바바>, <노지심>, <베-토-벤>, <뀌리-부인> 등 여러 작품이 전한다. 한 개인의 작품으로는 많은 편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정현웅의 만화들은 거의 온전한 형태로 전하는데, 초창기 한국 현대만화의 모습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그동안 자료가 적어 거의 접근할 수 없었던 초창기 한국 현대만화의 본질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발견이다. 어느 갈래보다도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해방 공간에 발간된 만화의 자취를 온전하게 만나볼 수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정현웅의 유화 작품 <소녀>
                 
본격적인 유화, 표지화, 삽화, 만화 등 수없이 많은 작품을 한 정현웅이었지만, 현재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실물은 극히 드물다. 정현웅보다 관심을 받지 못하던 작가들의 작품도 적지 않게 전하는 현실에 비해 그의 실물 작품이 거의 전하지 않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세상과 소통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작품이 한 곳에 모여 있다 소실된 것도 아니고, 작품에 서명이 없어 알아보기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렇게 전하는 작품이 없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현재 그의 작품 세계를 엿볼만한 완전한 상태의 도판으로 전하는 작품은 기껏해야 세 점 정도이다.

유화로는 한 젊은 여성을 그린 작품 <소녀>가 전한다. 한 때 유족 소장으로 알려졌지만 현재 그 소재를 명확히 알 수 없다. 이 작품은 1928년에 여동생을 모델로 하여 그린 것으로, 채색이 그대로 살아 있어 그의 작품의 색채 감각을 미루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전통적인 한복을 입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다. 한복을 입고 의자에 팔을 걸고 있는 구도는 당시 문부성전람회 등 일본의 관전에서 유행하던 화풍으로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유학한 서양화가들이 자주 그렸으며, 조선미전에 출품되었던 상당수의 작품이 이와 유사한 구성의 그림이었다. 

기본적인 화풍의 기조는 서구 인상파의 기법을 따르고 있다. 빛에 따라 음영이 드리워진 여인의 모습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얼굴 표현의 가장 기본이 되는 묘사가 매우 자연스럽다. 꼭 다문 입술, 발그스레한 뺨의 표현, 자연스런 눈매의 묘사가 정현웅의 화가로서의 능력을 가늠케 한다. 남색 저고리에 하얀 동정, 붉은 색 옷고름을 한 한복은 식민지 시대에 사는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까만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한 전통적인 의상은 나약해 보이는 조선 한복에 비해 생동감을 준다. 나름대로 한국적 정조를 지닌 독특한 서양화의 양식을 보이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조풍연 결혼기념 축화
       
정현웅의 '삼사문학' 이후 오랜 동료이자 '문장'의 편집을 도맡고 있었던 조풍연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김용준, 길진섭, 김환기 등 동료화가들이 만들어준 기념화첩 속에 들어 있는 그림이다. 이 화첩 속의 작가들은 대부분 같이 활동하던 서양화가들이다.

그런데 이들 모두 동양화 형식의 수묵화를 그려준 것이 이채롭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화가들의 전반적인 풍조였다. 당시만 해도 경사스런 일에 화첩을 꾸미는 일이 자주 있었고, 이 때 그리는 축하 그림은 대부분 모필로 동양화 형식의 그림을 그렸다. 이는 아직 조선조 전통이 남아있는 이유도 있었고, 일부 일본 문화의 영향도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도 경사스런 자리에서 모인 서화가들이 서화첩을 꾸미는 일은 늘 보는 일이었다. 

이 작품의 당사자인 조풍연(趙豊衍, 1914-1991)은 세련된 문장력의 수필을 쓴 작가이었다. 그는 수필가였지만 출판 편집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변에 문학가들과 서화가들이 많았다. 당대의 저명한 김용준, 이태준, 김환기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두 그의 친구들이었다.

이 작품은 정현웅이 조풍연의 결혼을 축하하며 부부의 화목을 기원하는 내용을 그린 것이다. 자식 둘 정도 낳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렸다. 평상에 앉아 있는 두 부부의 모습이 정겹고, 주변에서 뛰어 노는 두 아이의 활달한 모습이 한 가정의 평화스런 모습을 보는 듯하다. 달빛 어린 소나무 아래 즐거운 순간을 향유하는 가족의 모습이 정겹기 이를 데 없다. 먹으로 그린 대상의 모습이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고, 옅은 담채를 사용한 화면이 단정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어 좋다.

금강산 그린 수묵화
 

정현웅 '금강산 소견' 1940년 경 ⓒ 황정수

  
정현웅이 그린 작품 중에서 현재 실제 작품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40년경에 그린 <금강산 소견> 한 점 뿐이다. 이 작품은 금강산의 기이한 봉우리를 감각적인 필치의 새로운 감각으로 그린 것이다. 중국에서 생산된 좋은 종이에 먹을 중심으로 전체 산의 모습을 그리고, 연한 채색을 이용하여 담담하게 그렸다. 맑은 수채화 같은 수묵화이다. 전체적으로 거칠고 두드러진 표현은 절제하고, 세밀한 감각을 잘 살려 그리고 있다. 섬세한 감각이 그의 화가로서의 재주를 짐작케 한다. 

이 작품은 당시 화가들 사이에 가장 많이 유행하였던 금강산 그림의 전형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한국 화단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 중의 하나가 금강산을 그리는 일이었다. 특히 일제강점이 견고해지고 경원선 철도가 완성되자 일본인 화가들이 한국을 찾아 금강산을 그리는 일이 많아졌다. 이들은 일본에는 없는 바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금강산을 그리기를 좋아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많은 화가들이 금강산을 그렸다.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화가 중에 금강산을 그리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나의 문화현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 작품도 그러한 현상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대화가 중에서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르는 정현웅의 남아 있는 작품이 이렇듯 적다. 그의 작업 대부분이 책의 표지화와 삽화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가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소실된 것도 많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다른 이가 따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작업을 하였으니, 어딘가에 그의 작품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의 작품이 더 많이 발견되어 그의 작품 세계를 폭 넓게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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