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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는 지금까지 살얼음판을 딛듯 조심스러웠다. 정권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는 정책 탓으로만 돌리기엔 상처가 깊다. 같은 민족을 넘어 불과 70여 년 전까지 혈육이던 북한 사람과 철천지원수로 산 세월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2018년 4월 27일, 이날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책임자가 3번째로 한자리에 선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 기자의 눈엔 낯익은 작품 한 점과 서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 두 작품은 각각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위원장의 극적인 만남을 더 돋보이게 했다.
 
산운(山韻) 김준권 작가의 산운은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은 위원장이 방명록을 쓰던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작품이다. 지난해 글을 쓸 생각으로 받아 두었는데 이제야 소개한다. ⓒ 김준권
 
산운(山韻), 높이 160cm×길이 400cm의 이 작품을 2017년 4월 중순부터 5월 5일까지 곁에서 보며 아침을 맞이하고 잠이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사송2길의 맨 끝자락에 자리한 '한국문판문화연구소' 김준권 작가의 작업실에서다. 연작 '산에서'와 '꽃비(花雨)'를 비롯해 청산도의 보리밭 풍경 등 엄청난 크기의 대작 판화를 두루 만날 기회였다.
 
예술가들 좌로부터 김준권 판각인, 김진하 아트디렉터, 류연복 판각인 ⓒ 정덕수
 
최근 김준권 작가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변화 속에서 그동안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의 현대판화를 선보이는 전시를 마련했다. 3월 20일부터 5월 31일까지 국내 유일의 판화 미술관인 진천군립 생거판화미술관에서 '평화, 새로운 미래-북한 현대판화전'이란 이름으로 전시된다. 북한 작가의 판화를 이번처럼 대규모로 외부에 전시되기는 처음이다. 60여 명에 이르는 작가들의 110여 작품이 한자리에 전시되니 규모로도 대단히 큰 전시다.
 
평화 새로운 미래 북한의 판화가 대규모로 전시됨을 알리는 리플릿 ⓒ 정덕수
   
평화 새로운 미래 북한의 판화작품이 최초로 국내에 대규모로 전시된다. ⓒ 정덕수
 
김준권 작가는 "잘 아시다시피 고래로부터 우리나라의 판화문화의 전통은 깊고도 넓다. 돌이켜보면 휴전선 너머 그 곳도 한울타리였지 않았는가? 하지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 온 반세기 이상의 세월은 많이 달랐던 듯싶다"며 남과 북의 판각문화가 한울타리에서 태동되어 전승되어 왔음을 힘줘 말한다. 그리고 "언제나 예술이 그 사회의 반영이었다면 이제 신한반도 시대를 여는 마당에, 닮은 듯 다른 북녘 땅의 삶을 좀 더 이해하려는 첫걸음"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로서 새로운 이 땅의 변화를 마중하려는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 대해 "중국 "랴오닝 아시아문화발전공사" 이광군 박사의 전폭적인 협조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덧붙여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들도 이를 통해 서로 평화와 번영의 시대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라며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서울 인사동에서 나무화랑을 운영하는 김진하 아트디렉터는 도록에 북한의 판화가 외부에 전시된 사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동안 북한의 판화는 우리에게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2008년 9월 뉴욕에서 Korean Society 주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판화전람회>가 있었는데, 판화장르만의 첫 국외전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2011년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이상향의 끝에 선 북한의 모습 North Korean Images at Utopia's Edge> 이란 전시명으로 니콜라스 본너란 수집가에 의한 24작품의 작은 전시가 있었다. 

출품된 작품은 대개 북한주민의 일상생활이나 자연풍경 등을 묘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외에 북한의 판화가 대외 선전지인《朝鮮》1960년 46호에, 사진화보집인《朝鮮畵報》1966년 4호와, 1984 년 8호에 『現代版畵』란 제목으로 지상전의 형태로 소개된 경우도 있었다.

우리나라에 직접 소개된 북한판화는 2018. 8월 '경기도 문화의 전당 소담한갤러리'에서 열린 <한·중수교 25주년 기념판화 전-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展에서의 한국과 중국작가들이 중심이 된 전시에, 북한의 판화 개척자인 배운성·정현웅·김건중·손영기·함창연 외 현역작가 등 28명의 판화 70여 점이 선보인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런 간헐적이고도 단편적인 소개로만 보자면 그동안 북한의 판화는 외부로는 거의 알려진 게 없었다는 뜻이 된다. 북한판화의 2, 3, 4세대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는 115점이 대거 선보이는 이번 전시가, 아마도 북한 판화가 밖으로 소개되는 가장 큰 규모일 것이다.

김준권 작가와 김진하 아트디렉터의 허락을 받아 전시되는 북한의 작품 몇 점을 소개한다. 전시되는 작품 전체를 받아 기자가 임의로 선택했음을 먼저 밝혀둔다.
  
백련담 리은희 작가의 판화 ⓒ 정덕수
 
리은희 작인 백련담은 풍경으로 미뤄 금강산의 백련폭포에 있는 담(潭)이 아닐까 싶다. 설악산에도 이와 유사한 소와 담이 즐비하기에 낯설지 않다. 화강암 바위를 타고 흘러내린 옥빛 물은 그곳도 풍경은 이쪽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봄인지, 아니면 가을인지 계절은 구분하기 어렵지만 막 신록이 핀 봄에 가장 가깝다.
  
방목공 처녀 정현웅 작가의 판화 ⓒ 정덕수
 
여기 소개한 작품들 가운데 유일하게 전시장에서는 볼 수 없으나 도록으로는 만날 수 있는 작품임을 먼저 밝힌다. 정현웅 작가의 '방목공 처녀'는 오래 전 우리 농촌에서 만나던 풍경이다. 그런데 남자도 두 마리의 소를 다루기 어려운데 처녀가 두 마리의 소를 다루는 모습을 보니 '남남북녀'란 말이 북쪽의 여자들이 예쁘다던 옛말은 어쩌면 북쪽 지방의 여자들이 생활력이 강하다는 말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작품에서 관심을 끈 부분은 처녀의 치마저고리와 고무신으로 보이는 차림이 아니다. 한 마리는 우리가 황소로 부르는 누렁이가 분명한데 검은색의 소는 '칡소'거나 '흑우'가 아닐까 싶다. 일반적으로 한우를 말하면 누런 색의 황우만을 생각하는데, 젓소가 없던 강원도 산골에서 오래 전 칡소와 흑우를 봤다. 우린 최근에서야 우리의 소인 한우 가운데 칡소를 되살리기 시작했다.

북한에 칡소와 흑우가 아직 농촌에 남아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물론 흰소도 보존되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린 한우의 우수한 종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북한의 농가들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구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동물성사료를 비롯해 비육을 위해 개량된 사료를 먹이는 현대 축산업의 현실에서, 전통적인 먹이인 목초나 지푸라기나 옥수숫대, 콩대를 먹었을 북한의 토종한우는 중요한 유전자원이겠다.
  
고향의 봄 황인제 작가의 판화 ⓒ 정덕수
 
황인제 작가의 '고향의 봄'은 동요 고향의 봄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로 노래되는 그 고향의 봄 말이다.

매화나 자두나무, 복숭아나무로 보기엔 나무의 굵기로 미뤄 무리다. 그러나 살구나무라면 한아름에 다 안을 수 없을 정도로 큰 나무가 얼마든지 있다. 연분홍 꽃비가 날리는 봄들에서 나물 캐는 두 명의 처자와 멀리 풀을 뜯는 누렁이 두 마리는 예전 우리 산촌의 풍경 그대로다.

며칠 전 1970년 초반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동무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걸 지켜봤다. 명순이란 친구가 영춘화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인 카카오톡에 올렸는데 대부분 "개나리가 피었네"라 했다. 그런 친구들에게 구태여 "그 꽃 개나리가 아니고 영춘화야"라고 아는 척 할 수는 없어 조용히 대화를 지켜봤다.

상화 : 나도 어제 꽃집 지나가다가 게발선인장 사 왔다. 꽃을 보니까 마음이 설레더라. 마음은 청춘~
명순 : 우린아직  소녀랍니다.
상덕 : 개나리 꽃이구나. 꽃은 다 이쁘다.
상화 : 그래, 맞다. 그리고 명순이 마음도 소녀 같네~
상덕 : 애구 얘들아 꿈에서 얼른 나와~
명순 : 상화야 개발선인장 꽃봉오리가 많이 맺혔네. 어렸을 때 이맘때 달래 냉이 캐서 팔아 연록색  바지 사 입던 생각난다. 왕생이 친구들 다 입었었지.
상화 : 그러게나, 왕생이골 명순네 밭에 달래 냉이 씀바귀 많았는데~ 딱 이맘 땢다. 그립네~ 어릴 적 추억~
명순 : 추억이 새록새록 상덕이가 추억을! 5월엔 나물 뜯는 거 너무 늦지?
상화 : 나물이 다 쇨 거야.
상덕 : 달래 냉이는 좀 더 있어야 나오는 거야.
명순 : 상덕아 여자애들은 언 땅에서도 캤다. 마른 싹 보고 달래 캐는 데는 도사들!
상덕 : 달래 냉이를 그렇게 일찍 캤다고? 그리고 산나물은 덕수한테 물어봐야 돼. 덕수는 어디서 뭘 하기에 대꾸도 안하지?

3월은 돼야 달래 냉이를 캐는 줄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설을 쇠면 여자 아이들은 싸리나무로 만든 다래끼 하나씩 챙겨 들고 호미로 산밭을 휘돌았다. 그렇게 캔 달래와 냉이는 모아 두었다가 양양 읍내에 서는 장날 내다 팔았다. 그런 돈으로 소녀였던 친구들은 맘에 드는 옷을 사 입었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금강산의 겨울 황인제 작가의 판화 ⓒ 정덕수
 
마지막으로 공개하는 작품은 황인제 작가의 '금강산의 겨울'이다. 이 작품은 겨울철 눈이 덮인 금강산 풍경인데, 소나무 가지에 비낀 붉은색의 빛으로 미뤄 석양 무렵 아닐까 싶다. 낮은 산자락엔 햇살에 눈이 녹아 암릉이 드러났고, 먼데 높은 산은 마치 만년설에 갇힌 듯 바로 앞 소나무와 대비를 이룬다.

저 풍경도 이젠 서서히 봄이 깆 드는 계절이다. 엄혹한 계절을 넘겨야 온갖 풀과 나무는 더 곱게 꽃을 피워낸다. 그렇게 겨울은 겨울다워야 봄이 보다 더 또렷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같은 겨레 한 핏줄은 아무리 부인해도 분명한 사실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같은 방향으로 서로의 미래를 위해 나갈 줄 알 때 더 큰 희망과 번영이 기다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태그:#김준권, #북한의 판화, #김진하, #생거판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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