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 편 방송 화면 갈무리. 이 방송에서는 독립투사들의 행적과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 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내용을 방영하면서 대표적 친일파인 홍난파의 '봉선화'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 편 방송 화면 갈무리. 이 방송에서는 독립투사들의 행적과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 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내용을 방영하면서 대표적 친일파인 홍난파의 '봉선화'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 MBC

  
 MBC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 편 방송 화면 갈무리. 이 방송에서는 독립투사들의 행적과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 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내용을 방영하면서 대표적 친일파인 홍난파의 '봉선화'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 편 방송 화면 갈무리. 이 방송에서는 독립투사들의 행적과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 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내용을 방영하면서 대표적 친일파인 홍난파의 '봉선화'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 MBC

 
지난 16일 주말 오후. 가족들이 각자의 일정으로 바빠 집에 혼자 남아 TV채널을 돌리고 있다가 내 눈을 사로잡는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그것은 MBC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편 4회' 재방송이었다.
 
스타 역사 강사인 설민석 선생과 함께 전현무, 문근영, 유병재, 다니엘 린데만 등이 출연하여, 일제강점기 '적의 심장부'였던 도쿄에서 조국의 독립위해 싸웠던 투사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내용이었다.
 
'2.8학생독립선언'의 배경과 과정, 이봉창 의사와 김지섭 의사의 숭고한 의거와 희생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현장을 찾아가는 과정은 몰랐던 사실을 알게 했고, 울분을 차오르게도 했으며, 내 눈시울을 뜨겁게도 했다.
 
뿐만 아니라, 식사를 하면서 패널들이 나누던 '유치원'과 '수학여행' 등 친일잔재언어를 청산해야 한다는 대화는 나에게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프로그램 마지막 즈음, 최근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박열'의 여자주인공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한 배우 최희서씨가 특별 출연해 전현무·다니엘과 함께 관동대지진 때 희생된 조선인 추모비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왔다.
 
이 추모비는 2009년 니시자키 마사오 씨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관동대학살로 희생된 조선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돈을 모아 사유지에 세운 추모비다. 이곳에서 니시자키 씨를 만난 이들은 추모비를 세우게 된 동기에 대해 묻고, 선한 일본인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추모비를 세운 이 단체의 이름이었다. 이 단체의 이름은 '봉선화'였다. 니시자키 씨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조국을 그리워하며 불렀던 노래 '봉선화'를 따 단체이름을 지었다며 자신들의 활동도 언젠가는 봉선화처럼 꽃피길 바라는 이름으로 지었다고 소개했다.
 
이 때 배경음악으로 '울밑에선 봉선화야~'로 시작하는 봉선화가 배경음악으로 깔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봉선화'는 대표적인 친일음악가 '홍난파'의 곡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투사'와 그들의 행적,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방송을 내보내면서 '친일파'의 음악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프로그램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봉선화'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경음악이 아닌 성악가가 부른 다른 버전의 '봉선화'였다. 코끝이 찡해지던 감동은 온데 간데없어졌졌고, 제작진에게 화가 났다. '독립투사'들을 욕보이는 무책임한 행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 편 방송 화면 갈무리. 이 방송에서는 독립투사들의 행적과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 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내용을 방영하면서 대표적 친일파인 홍난파의 '봉선화'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사진은 관동대지진 대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추모비'를 세운 일본단체 '봉선화'의 대표 니시자키 마사오 씨.

MBC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 편 방송 화면 갈무리. 이 방송에서는 독립투사들의 행적과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 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내용을 방영하면서 대표적 친일파인 홍난파의 '봉선화'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사진은 관동대지진 대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추모비'를 세운 일본단체 '봉선화'의 대표 니시자키 마사오 씨. ⓒ MBC

   
나는 '혹시나'하며 내 기억을 의심했다. 봉선화가 친일파의 곡이 아니었던가? 홍난파의 곡이 아니었을까? 공영방송 MBC에서 어떻게 '항일행적'을 소개하면서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친일파의 곡을 배경음악으로 쓸 수 있을까?
 
그래서 친일인명사전을 찾아봤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봉선화'는 홍난파의 곡이 분명하며, 홍난파는 '친일파 99인'에 들어간 대표적인 친일음악가로 소개되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홍난파에 대한 친일행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홍난파(洪蘭坡, 본명 홍영후, 창씨개명 모리가와 준, 1898~1941)는 서울 또는 경기도 남양 출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청년학과 중학과를 졸업했고, 일본 도쿄음악학교를 수료했다.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와 이화여전 음악강사 등을 지냈다.
 
미국 유학중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이 시기를 전후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내용의 가요를 작곡하는 한편,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1937년 11월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다. 자필로 쓴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에서 그는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맹한 적이 있는 필자는, 그 동기여하와 그 활동유무를 막론하고 후회가 막급할 뿐 아니라, 민중의 지도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차제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상전향을 결의하고, 나의 그릇된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꿔 과거를 청산하고, 금후는 일본제곡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관찰로써 국가에 대해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라고 밝혔다. 이때부터 그는 친일 음악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1938년 6월에는 동우회 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대동민우회'에 가입하면서 '조선민중의 행복은 내선(內鮮) 두 민족을 하나로 하는 대일본 신민이 되어 신동아건설에 매진함에 있다'는 취지의 '전향성명'을 발표했다.
 
1937년 5월 창립된 친일문예단체 조선문예회에 김억, 이광수, 최남선, 현제명 등과 함께 위원으로 참여해 활동했다. 조선문예회는 조선의 가요를 정화해 일본의 국체와 전시체제의 선전물로 전화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외곽단체로 조직한 단체다.
 
그는 또 같은 해 9월 매일신보사가 주최하고, 조선문예회가 후원해 일본군의 중국 바오딩 점령을 축하하고 '황군(皇軍)'에 감사하자는 목적으로 경성부민관에서 열린 '바오딩함락 축하 황군감사 대음악회'에서 자신의 작품인 '정의의개가(최남선 작시)'와 '공군의노래(스기모토나카오 작시)'를 작곡해 발표하는 한편, 제2부에서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1938년에는 천황의 분부를 받들어 '팔굉일우(八紘一宇)'로 대아세아의 대공영권을 건설하여 일장기 날리면서 자자손손 만대의 복 누릴 국토를 만들자는 '희망의 아침(이광수 작사)'을 작곡해 '가정가요' 제1집에 발표했다.
 
1940년 7월 7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사변3주년과 반도문화의 여명-지나사변과 음악'에서 그는 "과거에 있어서 '국민가(國民歌)'다운 국민가를 가지지 못했던 우리로서는 애국행진곡 같은 신국민가를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이번 사변이 일억 국민에게 보내준 선물로 우리는 영원토록 언제나 이 노래를 고창함으로써 새로운 감격과 불타는 애국열을 고조시킬 것이 아닌가...(중략) 이번 선업이 성취되어 국위를 천하에 선양할 때에 그 서곡으로 그 전주적 교향악으로 음악 일본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낼 날이 1일이라도 속히 오기를 충심으로 비는 바이며,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을 기울여서 총후국민으로서 음악보국운동에 용왕매진할 것을 자기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41년 1월에는 조선음악협회 결성대회에서 평의원에 선출되었고, 1941년 8월 30일 경성요양원에서 사망했다.

 
인터넷을 통해 좀 더 찾아보이 그의 대표곡은 우리가 익히 아는 곡이 아주 많았다. '봉선화' 외에도 '고향의봄', '낮에 나온 반달', '햇볕은 쨍쨍', '퐁당퐁당', '옥수수 하모니카', '작은 별', '옛동산에 올라', '봄 처녀', '고향생각', '성불사의 밤', '사랑', '그리움', '고향생각', '금강에 살으리랐다', '사공의 노래', '성불사의 밤' 등이 있었다.
 
홍난파는 또 우리나라 '민족음악'을 무시하고 서양음악을 숭상하면서 '민족음악개량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고 노동은 중앙대 교수에 따르면, 홍난파는 1936년 '동서양 음악의 비교'에서 "조선음악 대부분이 극히 지완(遲緩, 더디고 느려서)하여 해이하고, 퇴영적인(뒤로 물러나서 움직이지 않는) 기분에 싸여 있지마는 서양의 음악은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개 경쾌 장중하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가 독립기념관 입구에 있는 홍난파 기념비 앞에 세운 '홍난파 단죄문'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가 독립기념관 입구에 있는 홍난파 기념비 앞에 세운 '홍난파 단죄문' ⓒ 장명진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 운영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가 20일, 독립기념관 입구에 있는 홍난파 기념비 앞에 홍난파 단죄문을 설치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가 20일, 독립기념관 입구에 있는 홍난파 기념비 앞에 홍난파 단죄문을 설치했다. ⓒ 장명진

 
이러한 이유로 지난 2015년 9월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는 독립기념관 홍난파 기념비 앞에 '단죄문' 세웠다. 천안시가 1987년 독립기념관(천안시 목천면) '광복의 동산'에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나무와 비석을 세웠는데, 이 곳에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한용운 선생 등과 함께 홍난파를 기리는 나무와 비도 서 있는 것.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는 "이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모독"이라며 홍난파의 친일행적을 기록한 철판으로 된 '단죄문'을 세운 바 있다. [관련기사 : 독립기념관 홍난파 기념비 앞에 '단죄문' 세웠다]

뿐만 아니라 2013년 9월, 작곡가 류재준씨는 '난파음악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홍난파가 친일파 음악인이라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한 적도 있었다. [관련기사 : 류재준, 홍난파상 거부 "친일파 이름으로 받기 싫어"]
 
이처럼 대표적인 친일음악가의 곡이 독립투사들의 행적을 소개하고 일제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것은 분명 잘못이다. '몰랐다'는 말은 변명에 불과하다. 보다 더 철저히 검증했어야 했다. 이제라도 제작진은 시청자에 사과하고, '봉선화'는 친일파 홍난파의 곡임을 분명하게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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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 향을 묻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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