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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진주문화연구소 등 단체에서 마련해, 3월 22일 오후 진주시 봉래동 진주교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발제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진주문화연구소 등 단체에서 마련해, 3월 22일 오후 진주시 봉래동 진주교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발제했다.
ⓒ 진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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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3·1혁명'이라는 올바른 이름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거기에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분수령을 이룬 일대사건으로 평가받는 '3‧1운동'의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기에는 '운동'이라는, 뜻이 분명하지 않은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경남 진주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3·1운동'을 '3·1혁명'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고 했다. 이 관장은 22일 오후 진주시 봉래동 진주교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발제했다.

이 관장은 오래 전부터 '3·1혁명'을 강조해 왔다. 그는 "3·1운동은 민국 곧 민주공화국 출범의 계기였다. 1910년 강제병합 당시만 해도 황제가 권력의 유일한 주체이던 대한제국이 불과 9년 뒤에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인민이 주권자인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독립운동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그에 뒤이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의 수립을 지향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독립운동은 민족혁명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며 "독립운동은 민족혁명과 동시에 국민주권주의의 실현 곧 민주혁명을 지향했다"고 덧붙였다.

또 이유가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3·1혁명'으로 부르는 게 보편화됐다고 한다. 이 관장은 "3·1운동 직후만 해도 '운동', '독립선언', '만세시위', '혁명'이라는 용어가 혼재했다"며 "어떤 하나의 용어가 절대적 우위를 갖지 못했고, 독립운동 진영의 3·1운동 평가가 서로 달랐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중반 이후 점차 '3·1혁명'으로 부르는 것이 정착되었다고 이준식 관장은 설명했다. 그는 "임시정부는 1944년에 마지막으로 헌법을 개정했는데 이때 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 서문에는 '삼일대혁명'이라는 다섯 글자가 분명히 적혀 있다"고 했다.

제헌헌법 초안에도 '3·1혁명'이었던 것. 이 관장은 "해방 이후 첫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가 제헌헌법을 제정할 때 헌법 초안에는 '3·1혁명'으로, 그리고 수정안에는 '3월혁명'으로 되어 있었다"고 했다.

'3·1운동'으로 바뀐 것에 대해, 이 관장은 "헌법 조문을 축조심의하는 과정에서 일부 의원들이 독립운동을 '혁명'으로 부르는 것이 맞지 않다는, 다소 황당한 주장을 했다"며 "당시 국회의장이던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이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면서 갑자기 '3·1혁명'이 '기미3·1운동'으로 격하되었다"고 했다.

이어 "흥미로운 것은 정작 이승만 본인은 미국에 체류하던 동안 미국인에게 '3·1운동'을 혁명으로 부르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에도 이승만정부에서 3·1혁명이라는 표현을 계속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며 "혁명이냐 운동이냐 하는 문제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라고 했다.

3·1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독립'이라는 일차적 목표를 이루는 데는 실패했지만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 관장은 "만세시위는 원인이고 임시정부는 결과"라고 했다.

'3·1운동과 민주주의'에 대해 설명한 이 관장은 "3·1운동은 분명히 자주독립을 목표로 한 민족혁명이었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3·1운동의 의미가 여기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3·1운동은 동시에 국민주권론을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을 이루기 위한 민주혁명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아니 3·1운동을 포함한 독립운동 자체가 그랬다"고 덧붙였다.

이 관장은 "헌법 전문에 나와 있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란 오늘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진 민주혁명의 계승자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관장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이 단순히 독립운동 곧 민족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 평등, 진보'를 기본으로 하는 민주공화제의 원점이 됨으로써 민주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3·1대혁명이라는 표현을 헌법에 집어넣은 것"이라고 했다.

진주문화연구소 등이 마련한 이날 토론회에서는 김준형 경상대 명예교수(진주지역 근대 역사와 3·1운동), 조헌국 진주문화연구소 이사(진주지역 3·1운동의 전개 과정), 김중섭 경상대 교수(진주지역 3·1운동과 근대 사회 발전)가 발제했다.

이어 김태기 진주문화연구소 이사가 좌장으로 조창래 강주인문학연구소장, 송준식 한국국제대 교수, 조은미 성균관대 겸임교수, 김희주 한국국제대 교수가 참여해 토론을 벌였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진주문화연구소 등 단체에서 마련해, 3월 22일 오후 진주시 봉래동 진주교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발제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진주문화연구소 등 단체에서 마련해, 3월 22일 오후 진주시 봉래동 진주교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발제했다.
ⓒ 진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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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3.1혁명, #이준식, #진주 3.1운동, #진주문화연구소, #진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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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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