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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 화천댐이 만든 넓고 푸른 호수. 오늘은 안개가 끼어 꿈결 같다. 북한강 상류의 이 물이 춘천댐 의암댐 청평댐을 거쳐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만난다. 남한강 물과 북한강 물을 섞은 한강은 이미 통일의 강이다.

파로호. 입에 감기는 이름. 하지만 이름에 담긴 역사는 비극적이다. 깰 파(破), 오랑캐 로(虜)...'파로'. 한국전쟁 때 여기서 중국군을 궤멸한 전승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작명하고 휘호를 썼다. 이때 사살된 중국군이 2만40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하늘에서 불비가 내렸고, 호수는 핏물로 붉었다. 강산에 널린 시신을 묻을 여력이 없어서 불도저로 호수에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비수구미의 대붕호
▲ 대붕호 사계 - 봄 비수구미의 대붕호
ⓒ 김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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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에 빛나는 승리. 그러나 가슴 아픈 참극. 이역만리에서 외로운 넋이 된 젊은 꽃들, 꽃들. 수장된 주검, 그리하여 나에게 파로호는 더 이상 부르기 어려운 이름이다. 무참한 전쟁의 원혼이 서린 이름을 누구든 마음 편히 부를 수 없으리라.

요즘 파로호 부근의 주민들을 중심으로 이 호수의 원래 이름을 되살리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 호수의 원래 이름은 '대붕호(大鵬湖')다. 하늘을 덮는 새, 한 번 날개짓 하면 구만리를 오른다는 전설의 붕새가 바로 이 호수의 주인이다. 그래서인가? 화천댐이 들어선 마을은 이름이 구만리다.

나 또한 파로호에 원래 이름을 되찾아주자는 운동에 공감한다. 안개 속 꿈결 같은 푸른 호수. 이제부터 나에게는 대붕호다. 일찍이 장자가 붕새의 꿈을 꾸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대붕호다.

화천댐과 대붕호

화천댐은 일제 말기에 만들어졌다. 대동아전쟁을 일으키고 대륙 침략을 꾀하던 일본이 경인공업지구의 군수공장에 전기를 공급할 목적으로 1939년 착공해서 1944년 완공했다. 대부분 강제 징용된 3000여 명의 인력이 날마다 두세 명씩 다치고 죽어가며 공사해 준공 때까지 1000여 명이 숨졌다고 한다. 일제가 댐 인근에 2개의 화장장을 운영했을 정도로 겁나게 밀어붙인 난공사였다.

화천댐이 생기면서 북한강 상류에 거대한 호수가 만들어진다. 총 저수량 10억톤. 1973년 소양강댐이 건설되기 전까지 남한 최대였다.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로부터 양구군 상무룡리까지 펼쳐진 이 호수가 '대붕호'다. 주민들은 대붕이 날아들어 풍년과 풍요와 평화가 깃들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호수 이름에 담았다.
 
화천댐에서 내려다 본 저류지
▲ 화천댐 옥빛 저류지 화천댐에서 내려다 본 저류지
ⓒ 김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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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이 남명으로 옮겨갈 때는
 물을 쳐서 삼천 리나 튀게 하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오른다.
 (鵬之徙於南冥也水擊三千里搏扶搖而上者九萬里)


유명한 장자 소요유(逍遙遊) 편의 한 구절. 북쪽 깊은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물고기가 새로 변해 붕(鵬)이 되었는데 그 등의 길이 역시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붕새가 한 번 힘껏 날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았다는 이야기. 장자다운 스케일과 초월적 경지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우화다.

북한강 상류 수천 골짜기를 품은 대붕호는 하늘에서 보면 실제로 대붕의 형상을 보여준다. 그 대붕이 구만리를 날아오르는 곳이 화천댐과 발전소가 들어선 자리, 구만리다. 일제는 '대붕' '붕'(鵬)을 슬쩍 '명'(䳟)으로 바꾸고, 호(湖) 대신 제(堤)를 붙여 '대명제'로 왜곡하기도 했는데 그 초석이 6.25때 유실됐다가가 발견돼 지금도 남아 있다.
 
동촌리의 대붕호
▲ 대붕호 사계 - 여름 동촌리의 대붕호
ⓒ 김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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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의 비극

대붕호는 광복 이후 38선이 그어지고 북한이 점령하면서 한동안 '화천저수지'로 불린다. 그리고 터진 전쟁, 남과 북은 서로 밀고 밀리다가 중부전선에서 지리한 교착상태에 빠졌다. 38선 이북인 화천은 북이 차지한 상태. 하지만 남한으로선 화천발전소가 절실했다. 여기서 생산하는 전기가 수도권의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인데다 전후 재건을 위해서도 발전소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1951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측에 화천발전소의 탈환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이후 미군과 국군, 유엔군이 합세한 대규모 공세가 가평 춘천 홍천 화천 쪽으로 집중된다. 그해 38선 동부전선의 봄은 처절했다. 5월24일~ 30일 화천저수지 부근에서 퇴로가 막힌 중국군은 한미 연합군의 협공에 몰려 대패한다. 이른바 '지암리·파로호 전투'다.

지난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공개한 '미 제9군단 지휘보고서'에 따르면 '지암리·파로호 전투'에서 한미 연합군에 사살된 중국군은 2만4141명에 이른다. 미 제9군단은 파로호 전투를 지휘한 부대다.

이 전승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 직후인 1953년 11월 18일 격전지를 찾는다. 이때 화천저수지를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 하여 '파로호'라 명하고, 친필 휘호를 남긴 게 오늘날 파로호의 유래다.
 
화천댐 파로호 기념비
▲ 이승만 대통령의 파로호 휘호 화천댐 파로호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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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사에 빛나는 현대판 살수대첩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전사한 중국군 주검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한미 연합군이 군용 중장비 등을 동원해 시신을 호수에 쓸어 넣었다는 여러 증언이 있을 뿐이다. 푸른 호수가 핏빛으로 물들고, 시신이 둥둥 떠다니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는 여러 목격담이 있을 뿐이다.

2013년 6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을 국빈 방문해서 중국군 유해 송환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국방부가 발굴해 송환한 유해는 589구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중국군은 중국 측 집계로 11만6000여 명. 유해 발굴과 송환은 이제 딱 한 발을 내디뎠다. 파로호에 제 이름을 찾아주자는 운동도 이제 막 시작됐다.

오는 5월 'DMZ 대붕호 평화문화제'를 준비하고 있는 최진수 문화제 집행위원장은 "파로호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것은 한·중 친선은 물론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만들어 가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며 "우선 파로호부터 본래 이름인 대붕호로 바꾸는 일에서 그 단초를 찾고자 한다"고 말했다.
 

태그:#강산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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