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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던 피렌체를 얘기할 때 메디치 가문을 빼놓을 수 없다. 막대한 부로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를 후원하며 피렌체 르네상스 탄생에 기여했다. 하지만 그림자 뒤에 숨어 공직선거까지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며 공화주의를 훼손한 독재자이기도 했다(관련기사 : 지하에서 은총받는 비선실세, 무덤까지 '특혜').

시민의 왕이거나 왕 같은 시민, 로렌초 데 메디치

메디치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일 것이다. 1469년 아버지 피에로 데 메디치의 사망 이후 갓 20살이 된 로렌초는 가문의 부와 정치권력을 물려 받았다. 로렌초의 정치 수완은 대단히 뛰어났다.
 
  로렌초 사후 조르조 바사리가 그렸다, 우피치 미술관
▲ 로렌초 데 메디치 초상  로렌초 사후 조르조 바사리가 그렸다, 우피치 미술관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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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8년 4월 교황 식스투스 4세는 파치 가문을 사주해 로렌초 암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만 죽고 거사는 실패한다. 피렌체 정부는 식스투스 4세 교황을 '베드로의 자리를 차지한 유다'라며 저주했고, 교황은 로렌초를 이단이라고 선언한다. 

식스투스 4세는 이단 피렌체를 정벌하기 위해 나폴리를 부추긴다. 교황과 손을 잡은 나폴리 군대는 거침없이 피렌체로 진격했다. 도시의 운명이 위급했지만 피렌체는 막아낼 힘이 없었다. 이때 로렌초는 큰 결단을 내린다. 12월 6일, 피사에서 배를 타고 적진의 심장인 나폴리로 들어간 것이다. 어떠한 무장이나 호위병력도 없었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로렌초는 가져간 선물과 돈을 뿌리며 먼저 나폴리 국민과 고위층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나폴리의 페란테 왕에게 여러 가지 외교적 카드와 특권을 제안한다. 3개월간의 협상 끝에 마침내 평화협정이 이루어진다. 교황과의 대결에서 사실상 승리한 것이다. 이 승리를 기리기 위해 보티첼리가 그린 그림이 '팔라스와 켄타우로스'이다.

로렌초는 단번에 피렌체의 구원자가 되었고 정치적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 일로 로렌초는 '일 마나피코(il Manafico, 위대한 자)'라고 불리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이 호칭은 로렌초 스스로 붙였고 추종자들에 의해 퍼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시민의 왕이거나 왕 같은 시민'이었다.
 
  보티첼리, 우피치 미술관. 팔라스(로렌초)가 켄타우로스(신스투스 4세)의 머리를 잡고 있다. 팔라스의 월계수와 드레스의 반지 고리 문양은 로렌초가 즐겨쓰던 가문 문양이다.
▲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보티첼리, 우피치 미술관. 팔라스(로렌초)가 켄타우로스(신스투스 4세)의 머리를 잡고 있다. 팔라스의 월계수와 드레스의 반지 고리 문양은 로렌초가 즐겨쓰던 가문 문양이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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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정치 능력에 비해 사업 수완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당시 메디치 은행은 거듭된 투자 실패와 동업자들의 횡령 등으로 쪼그라들고 있었다. 여기에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 위해 무리한 지출을 계속 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1489년에는 피사 지점이 문을 닫았고 일부 동업자들은 지분을 챙겨 메디치 은행과 작별한다. 곳곳에 퍼져 있던 지점은 피렌체, 로마, 나폴리, 리옹 단 4개로 줄었다. 그럼에도 로렌초는 자식을 소위 '낙하산'으로 고위직에 앉히기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여덟 살의 대주교

로렌초에게는 피에로, 조반니, 줄리아노 등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로렌초는 첫째 아들은 정치가, 둘째 아들은 성직자로 키우기로 한다(셋째 아들은 일찍 죽었다). 그는 아들들에 대해 '하나는 바보고, 하나는 똑똑하며, 나머지 하나는 사랑스럽다'고 평했다.

실제로 장남 피에로는 영 신통치 않았다. 그는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나 크고 작은 실책으로 시민들의 분노를 사다가 결국 메디치 가문이 추방 당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둘째 아들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Giovanni di Lorenzo de' Medici, 1475-1521)'는 어려서부터 사치를 좋아했지만 영특했다. 조반니는 여덟 살이 되던 1483년 6월 1일 사제 서품을 받는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보통 처음 사제 서품을 받으면 시종이나 문지기 등의 하위 성직을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6월 8일 프랑스 루이 11세에게서 '엑상 프로방스' 지역의 대주교구를 하사한다는 전갈이 도착한다.

사제가 된 지 불과 일주일 만이었다. 당시의 통신 상황을 감안했을 때 이전부터 협의된 사항이었다. 루이 11세는 메디치 가문과 여러 이해 관계로 얽혀 있었다. 로렌초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로렌초는 메디치 은행의 리옹 지점을 통해 프랑스 서부 퐁두스 대수도원장 자리에 대한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조반니는 샤르뜨레 근처의 상 제메 수도원장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푸아티에 근처 르 팽 수도원의 주교가 된다. 불과 여덟 살 꼬마가 수도원장과 주교라니, 일반 수도사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뽀아띠에 근처의 르 팽 수도원에서는 핏덩이 같은 주교 조반니의 이름을 앞세워 코시모 사세티가 교회재산을 가져가려고 하자 그가 교회 땅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했다. (메디치 머니, 팀 팍스 지음, 황소연 옮김, 청림출판, 384쪽)
 
하지만 결국 로렌초는 조반니를 원하는 자리에 앉힌다.

돈과 권력에게 원칙과 절차는 거추장스러울 뿐

로렌초가 이렇게 아들을 고위 성직에 앉히려고 집착한 데에는 금전적인 이유도 있었다. '메디치 머니'를 쓴 팀 팍스는 줄어드는 재산을 메꾸기 위해 교회 재산과 성직록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조반니는 나폴리 인근의 카시노 대수도원장과 밀라노 근처의 모리몬도 대수도원장 등 무려 십여 개가 넘는 성직을 맡는다. 이런 성직들은 메디치 가문의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었다.

로렌초는 더 나아가 조반니를 추기경으로 만들려고 했다. 추기경은 오랜 시간 동안 성직에 봉사하고 여러 시험과 검증을 거쳐야 올라갈 수 있는 최고위직이다. 거기다 당시 기준으로 조반니의 나이는 추기경이 될 수 없었다. 당연히 수많은 반발이 일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이미 뒷거래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통달해 있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로렌초에게 정상적인 절차는 느리고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여러 고위층에 로비를 펼친다. 그 중에서도 특히 1484년 교황에 오른 인노첸시오 8세(Papa Innocenzo VIII, 1484-1492)를 집중 공략했다. 과거 밀라노 페란테 왕과의 평화협정에서 보여줬던 협상력은 여기에서 다시 한번 발휘된다.

교황에게는 '프란체스키토 키보'라는 혼외자가 있었다. 1488년, 로렌초는 자신의 딸 마달레나 데 메디치(Maddalena de' Medici, 1473–1519)를 교황의 아들에게 시집 보낸다. 그리고 교황에게 3만 플로린이라는 거액을 대출해준다. 1482년 메디치 은행의 자본금 총액이 5만 2천 플로린이었고, 로렌초의 지분이 2만 플로린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하지만 교황은 대출금을 제대로 갚지 않았다. 연체된 원금과 이자를 현금 대신 백반으로 지급하기도 했다.

당시 백반은 철과 소금 다음으로 중요한 광물이었고, 메디치는 한때 전세계 기독교 국가에 대한 백반 판매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독점권을 잃은 뒤였기 때문에 백반을 현금화할 경로가 딱히 없었다. 그럼에도 로렌초는 현금 대신 백반으로 받으며 교황의 비위를 맞췄다.

이 외에도 로렌초는 교황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야생 조류나 포도주, 옷감, 더 나아가 예술가들까지 아낌없이 보냈다. 로렌초의 선물이 하도 많아서 교황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교황은 로렌초가 지켜보는 가운데 잠을 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열네 살의 추기경

이런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1489년, 교황은 나이 제한을 철폐한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3일 열 네 살의 조반니는 추기경이 된다. 추기경에 임명되었지만, 조반니가 추기경의 문장을 사용하는 것과 추기경단에 합류하는 것은 보류되었다.

나이 제한 폐지에 따른 주변의 반발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반니는 약 2년 간 피사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며 지낸다. 그러다 1492년, 정식으로 추기경단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고 로마로 간다. 이후 그는 1513년 3월 9일, 서른 일곱의 나이에 교황 레오 10세(Papa Leone X, 1513-1521)가 된다.

조반니의 추기경 임명은 메디치 가문에 대한 시민들의 실망감을 키웠다. 메디치 가문의 성장에는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다. 토착 귀족에 대항해 싸우던 시민들의 편에 서면서 메디치는 존경받는 최고의 가문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점차 신뢰와 존경을 잃으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피렌체에서 추방되고 만다.
 
  가운데 인물이 레오 10세(조반니 데 메디치) 교황이다. 라파엘로의 작품, 우피치 미술관.
▲ 교황 레오 10세와 두 명의 추기경  가운데 인물이 레오 10세(조반니 데 메디치) 교황이다. 라파엘로의 작품, 우피치 미술관.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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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피렌체, #로렌초 데 메디치,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 #우피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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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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