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양양과 관련된 노래는 어떤 곡들이 있을까? 궁금하다면 요즘 같은 시대엔 검색하면 된다. 하지만 노래 제목을 모르고서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강원도는 민족의 노래인 아리랑 한 갈래가 태동된 고장이다. 그렇다면 정선아라리처럼 양양만의 아리랑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된다.
  
양양읍에서 멀지 않은 구탄봉에 오르면 양양을 조망하기 좋다. 정족산과 점봉산, 설악산 대청봉에서 화채봉을 거쳐 동해바다까지 빙 둘러 조망할 수 있기에 사진촬영을 하려 찾는 이가 많다.
▲ 양양읍 전경 양양읍에서 멀지 않은 구탄봉에 오르면 양양을 조망하기 좋다. 정족산과 점봉산, 설악산 대청봉에서 화채봉을 거쳐 동해바다까지 빙 둘러 조망할 수 있기에 사진촬영을 하려 찾는 이가 많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오래전 정선아라리를 수집하던 참에 당시 정선군 남면 무릉리에 살던 형님과 얘기를 나누며 술 한 잔 할 때였다. 5월 하순인데 손가락 굵기만 한 크기로 자란 알타리무가 달린 무청 파란 김치를 젓가락을 집어 올리며 "어따, 우러리네"라 했다. 귀에 익은, 그러면서도 점차 잊어가던 말 '우러리'를 듣고 당장 "형 그 우러리란 말이 도대체 뭐죠? 큰집에 가서 있을 때 갈을 하며 작두질하는 걸 구경할 때 들었거든요"라 물었다.

'갈'이란 봄에 잎이 나오기 시작한 나무가 제법 자라 가지가 무성해졌을 때 한다. 비교적 밭일이 뜸해진 시기로 할머니께서 그 무렵 돌아가셨으니 8월 초 정도로 시기는 기억되는데, 이때 풀이나 비교적 부드러운 나뭇가지를 거둬들이는 걸 말한다. 소를 치는 외양간에도 깔고, 두엄밭에 때때로 펼쳐 거름을 만들어 사용할 목적으로 하던 작업은 품앗이로 돌아가며 했다.

장정 키 만큼 자란 풀과 나뭇가지를 잘라 단을 묶어 두 단씩 지게로 져다 마당에 부려놓기 시작한다. 이윽고 몇 짐씩 일꾼들이 산에서 지게로 날라 온 풀을 작두로 써는 작업이 시작된다. 두 사람이 작두 몽침 밑에 묶은 끈을 위로 치켜 올리며 발을 한껏 들어 하늘을 걷어차기라도 하려는 듯 뻗친다. 들어 올린 발을 한껏 힘주어 내려밟을 때 작두에 풀 멕이던 큰아버지나 큰아버지 친구가 바투 잡은 풀 뭉치를 꽉 쥐며 내뱉던 소리다. 치켜 올려진 작두에 풀을 멕이며 큰아버지는 "엄불 덤불 수박덤불"이라거나 "우러리여"란 소리를 했다.
  
오래전 구룡령 아래 증골(정씨를 증씨로도 발음했다. 정씨가 사는 골짜기라 해서 증골이라 불렀고 지명으로 정해졌다)에 살던 큰아버지는 3월 말로 접어들면 소를 부려 밭갈이를 시작했다. 감자와 옥수수는 집 주변 밭에 심고, 콩과 팥 등 다른 곡물은 예전에 할아버지가 사셨던 빈지골(빈집골이 원형으로 집을 버려두고 나와 그렇게 지명이 됐다.)에 심었다.
▲ 감자밭 오래전 구룡령 아래 증골(정씨를 증씨로도 발음했다. 정씨가 사는 골짜기라 해서 증골이라 불렀고 지명으로 정해졌다)에 살던 큰아버지는 3월 말로 접어들면 소를 부려 밭갈이를 시작했다. 감자와 옥수수는 집 주변 밭에 심고, 콩과 팥 등 다른 곡물은 예전에 할아버지가 사셨던 빈지골(빈집골이 원형으로 집을 버려두고 나와 그렇게 지명이 됐다.)에 심었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형이 젓가락으로 집어 든 알타리무김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그거 굵은 가지가 들어갈 때 힘껏 밟으라고 알려주는 소리여"라 했다. 그렇다면 "엄불 덤불 수박덤불"이란 수박줄기처럼 부드러운 풀이나 잔 나뭇가지가 들어간다는 내 생각이 맞단 얘기다.

별다른 장단 없이 일하는 행위 자체가 장단이 되고, 그에 따라 작두에 풀을 멕이는 손이 요란스럽지 않으면서도 어린나이에 보기에도 신명이 올라 있음을 알아차리기에 충분했다. 한 사람의 신명은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되어 일제히 커다란 형태로 빚어진 판이 된다.

최근 밭농사도 예전처럼 하지 않지만, 일단 밭농사도 소로 가는 풍경도 볼 수 없다. 자연히 소똥과 함께 썩혀 거름을 만들던 두엄밭도, 겨우내 소가 따뜻하게 지낼 갈을 하는 농가도 없다. 농협에서 집 앞까지 배달해주는 포장된 퇴비를 밭의 크기에 맞게 받아 밭을 걸구니 어쩌면 영원히 다시 못 볼 풍경 아닐까.

'갈'은 또 다른 말로는 '풀'이라고도 했다. 신통하게도 한 사람은 "풀한다"고 하는데 그걸 "갈한다"로 알아들었다. 또한 갈이던 풀이던 좌우지간 그 일을 하는 날은 어리다고 마냥 놀게 놔두지 않았다. "아따 고놈 엽착(바지주머니)에 손 찌르고 선 꼴이 상전이여"란 말은 곧 뭔가 할 일이 있단 신호였다. 이때 큰아버지는 "그래도 그놈이 양반 자손이여"라 받았다. 포은 정몽주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말씀이셨다.

"덕수야 코밑 좀 쳐라"란 말이 들리면 코를 닦으란 말이 아니다. 풀 멕이는 반대쪽 작두 밑을 치우란 소리다. 썰어진 풀과 나뭇가지가 거치적거려 풀을 매기기 안 좋단 말을 그렇게 했다. 작두날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깍지(갈퀴)로 썰어진 풀을 끌어내 마당 끝자락에 둥글게 쌓아올려지는 풀가리에 올리기 좋게 옮겼다. 할머니께선 이런 어린 손자를 대견하다는 칭찬으로 "아, 고놈 그래도 사내자석이라고 이젠 제법 여물었네"라 하셨다.

"황소 코 뚫은 낭구로구나"나 "처녀 멋 피우는 동박낭구여"는 느릅나무와 생강나무를 이르는 말로 질기고 여문 느릅나무가지를 깎아 어린 소를 다루기 좋게 고삐를 처음 걸 때 코를 뚫는 도구로 썼다. 불에 달군 뾰족하게 깎은 느릅나무 꼬챙이에 들기름을 바른다. 그리고 제법 자란 송아지를 꽉 붙잡고 코를 뚫고 미리 만들어 처마 밑에 걸어두었던 다래넝쿨이나 돌배나무가지로 만들어 둔 코뚜레를 꿰 고삐를 묶었다.

강원도 전역에서 그리 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양양에선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라고 했다. 그것도 다시 동박낭구라 했으니 외지에서 온 이들은 뭔 소린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특별히 나무의 종류나 풀에 대해 배운 적이 없으면서 이런 풍경을 보며 자랐고, 산에 올라 나무를 해 불을 때며 살았던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워갔다.
 
곡우 전에 심은 감자에 꽃이 피면 장마가 들기 시작했다. 3월 한 달 감자에서 눈을 뜨는 작업을 한 큰어머니와 할머니의 손은 감자물이 들어 까맸다. 감자와 옥수수를 심고 나서도 사골 여인들은 쉴 수 없었다. 누애를 치고, 두릅과 온갖 나물을 뜯어 말려두는 일을 했다. 그나마 감자꽃이 피어야 김매기도 줄었다.
▲ 감자꽃 곡우 전에 심은 감자에 꽃이 피면 장마가 들기 시작했다. 3월 한 달 감자에서 눈을 뜨는 작업을 한 큰어머니와 할머니의 손은 감자물이 들어 까맸다. 감자와 옥수수를 심고 나서도 사골 여인들은 쉴 수 없었다. 누애를 치고, 두릅과 온갖 나물을 뜯어 말려두는 일을 했다. 그나마 감자꽃이 피어야 김매기도 줄었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내 기억으로는 양양의 가장 고전적인 전래 노동요는 '풀(갈) 써는 소리'가 아닐까 싶다. 양양엔 '수동골 상여소리'가 전승되고 있는데, 이는 이승에 남은 이들이 저승으로 떠나는 망자를 배웅하는 소리다. 동시에 수고하는 상둣꾼들의 놀이 형식으로 양양 일원에서 불리던 걸 수동골이란 마을에서 장례문화 자체를 민속놀이로 발전시켰다. 장례문화 자체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한 오늘에 와서 보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풀 써는 소리도 양양에서 양양 고유의 민속놀이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풀 써는 소리는 양양읍내보다 밭농사가 중요했던 갈천과 같이 논이 귀한 산골에서 발달되었었다. 더구나 식량증산을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퇴비증산'이란 걸 장려하던 시대에 유년기를 보내며 목격한 풀 써는 소리는 그 자체로 신명나는 구경꺼리였다. 수동골 상여소리처럼 되살려 문화유산으로 보존할 가치가 넉넉한 농경문화유산이다.
  
요즘은 감자밭이나 옥수수밭 어디든 김매기를 하는 걸 못 본다. 곡우 무렵에 심은 작물이 싹을 내면 이내 김매기가 시작된다. 감자밭은 감자꽃이 피기 시작해야 일손이 덜 갔고, 옥수수밭은 어른 무름까지 자라야 김을 안 매도 작물이 풀을 이겨냈기에 허리춤에 모깃불을 만들어 꿰고 긴 밭고랑을 타고 나가며 김을 맸다.
▲ 옥수수밭 요즘은 감자밭이나 옥수수밭 어디든 김매기를 하는 걸 못 본다. 곡우 무렵에 심은 작물이 싹을 내면 이내 김매기가 시작된다. 감자밭은 감자꽃이 피기 시작해야 일손이 덜 갔고, 옥수수밭은 어른 무름까지 자라야 김을 안 매도 작물이 풀을 이겨냈기에 허리춤에 모깃불을 만들어 꿰고 긴 밭고랑을 타고 나가며 김을 맸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요즘은 옥수수를 쪄먹거나 구어 먹기 위해 심지만 1970년대까지는 산골에선 밥을 지어 먹기 위해 재배했다. 덜 여문 옥수수와 감자를 쪄 한 끼 끼니로 먹다 8월 중순을 넘어 옥수숫대가 서서히 말라갈 때 거둬들인 옥수수는 껍질을 벗겨 완전히 말려 저장해둔다. 겨울철엔 온 가족이 옥수수를 까야 했다.
▲ 옥수수 요즘은 옥수수를 쪄먹거나 구어 먹기 위해 심지만 1970년대까지는 산골에선 밥을 지어 먹기 위해 재배했다. 덜 여문 옥수수와 감자를 쪄 한 끼 끼니로 먹다 8월 중순을 넘어 옥수숫대가 서서히 말라갈 때 거둬들인 옥수수는 껍질을 벗겨 완전히 말려 저장해둔다. 겨울철엔 온 가족이 옥수수를 까야 했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이른 아침에 갈하는 집으로 품앗이꾼들이 모여 지게에 낫을 꽂고 지게작대기로 장단을 맞추며 밭둑길을 걸어 숲으로 가며 시작되던 일은, 풀가리가 둥그렇게 어른 키를 훌쩍 넘겨 다져진 어둑한 저녁나절에야 끝났다. 이때 저녁밥이 작두를 치운 마당에 멍석이 깔리고 차려질 때까지 큰아버지는 어딘가 사라졌다 일꾼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다음에야 나타나셨다. 자칫 때를 놓쳐 늦으면 외양간에 갇혀 일꾼들이 퍼 붇는 작두로 썬 풀에 봉변을 당하기에 나름 꾀를 내셨으리라.

형과 막걸리를 마시며 정선아라리와 풀 써는 소리로 각자 기억을 되살릴 때 "양양에도 정선아리랑처럼 양양의 아리랑이 있었네. 전부는 모르지만 몇 가지는 들어서 아는데"라기에 냉큼 "그거 좀 기억하시는 대로 적어줘요"라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때 형이 적어준 양양아리랑이 같은 시기에 '한국구비문학대계'란 책에 수록된 걸 알게 됐다.

구비문학(口碑文學)이라 함은 사전에 '문자에 의하지 않고 입으로 전해 내려온 문학. 설화·민요·무가·판소리·민속극·속담 등이 이에 속함'이라 설명되어 있다.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계층이 아닌 집단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유산이란 이야기다.
 
양양아라리

아리아리야 쓰리쓰리 아라리오
아라리 고개로 날 넘겨주세

백두산 진달래꽃이 제 아무리 고와도
내 가슴에 피어나는 진정만은 못 하리라
랄랄랄 나리야 날라리 바람에 다 팔아먹고
백수건달이 되었네

산천초목 물각유주도 임자가 있는데
나라구 임자없이 홀로만 산다
아리아리야 쓰리쓰리야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또 넘어 간다

공동묘지야 호출장은 오늘도 왔다갔건만
나는 왜 살라고 빠드득 빠드득 하는가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라리 고개로 날 넘겨주게
 
노랫말이 재밌다. 노랫말의 구조로 보아 정선아리랑 정도의 곡조로 부르지 않았을까 유추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양양아리랑이 아니라 분명하게 양양아라리로 되어 있단 사실이다. '아라리'는 아리랑과 다르게 지속적으로 연결(살이 붙고 보태어지는 과정)되어 나간다는 느낌을 그때나 지금이나 지우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와 같은 양양만의 고유한 아리랑이 발달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다양하게 불리던 양양의 아리랑이 원형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수도 있다. 정선과 달리 양양은 일제 강점기에 수탈이 극심한 지역에 속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여건을 지녔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앞서 "황소 코 뚫은 낭구로구나"나 "처녀 멋 피우는 동박낭구여"란 풀 멕이는 이의 사설을 얘기하고 멈췄는데, 정선아라리는 물론이고 양양아라리에서도 시적 음률을 살리는 멋을 활용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나무의 이름을 곧장 '참나무', '싸리나무', '소태나무'로 말하면 여기에선 싱겁기 그지없다. 나무의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어떤 나무인지 알게 할 수도 있고, 나무의 성품이나 용처에 대해 이해하고 이를 다시 은유적으로 풀어낼 때 제대로 간이 맞아 맛을 듣는 이들이 느끼게 된다.
  
오래전 감자나 옥수수를 해갈이로 바꿔 심던 밭이 조상님들 모신 선산이 됐다. 모두 외지로 나가고 집터와 묵정밭으로 변한 문전옥답엔 잡초만 무성하다. 그 시절이라면 이렇게 특별한 날 벌초를 할 필요도 없었다. 소를 먹이거나 거름으로 쓸 갈을 매년 했기에 산도 지금처럼 숲이 무성하지 않았다.
▲ 벌초 오래전 감자나 옥수수를 해갈이로 바꿔 심던 밭이 조상님들 모신 선산이 됐다. 모두 외지로 나가고 집터와 묵정밭으로 변한 문전옥답엔 잡초만 무성하다. 그 시절이라면 이렇게 특별한 날 벌초를 할 필요도 없었다. 소를 먹이거나 거름으로 쓸 갈을 매년 했기에 산도 지금처럼 숲이 무성하지 않았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그렇지 않아도 글을 너무 길게 쓴다고 타박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글을 짧게 끊으려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정낭간 들어가 엉거주춤 엉덩이 까다말고 돌아서 나온 뜻한 찝찝함 같은 거랄까, 뭐 하여튼 그런 기분이다. 하여간 속된 말로 요즘 세상에 천지삐까리로 널리고 널린 시인(詩人)들보다 더 절묘하게 시적(詩的) 표현을 생활화한 삶들을 추구했다. 강원도, 아니 좀 더 좁게 내 사는 여기 양양의 땅을 일구고 살아가신 조상님들의 풍류가 존경스럽다.
 
양양아리랑

아리 아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설악산 중턱에 실안개 돌고요
달룩집 문전에 건달이 돈다

낙산의 인경은 현산을 울리고
우리네 정든 님 나를 울린다
 
양양읍내는 물론이고 몇 곳 마을을 제외한 대부분의 양양지역 마을에선 설악산이 바라볼 수 있다. 그, 설악산의 중턱엔 실안개가 감아 돌고 달룩집 문전에 건달이 돈다는 걸 보니 달룩집엔 예쁜 처자가 있거나 자태 고운 기생집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달룩은 우리가 봄에 먹는 달래를 양양에서 예전엔 달룩이라 했다.

낙산의 인경이 현산에 들릴 까닭이 없는데 자신을 그리움에 울게 만드는 못 견디게 보고 싶은 임을 표현하기로야 참으로 절묘한 매치다. 어차피 멀어 들릴 까닭 없는 낙산사의 인경이 깊은 정 들었건만 여러 사정으로 못 보고 가슴 앓게 하는 임과 기막히게 말가락을 고루잡은 대치법 아닌가.

조만간 갈천 왕생이골이나 면옥치를 휘돌아서라도 풀 써는 소리 기억하는 어르신 찾아 오롯이 제 맛 살린 풀 써는 소리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 이야기 여기서 접는다.

아, 처음에 꺼낸 얘기 "양양과 관련된 노래"는 내가 쓴 것도 인터넷 검색하면 찾을 수 있다. 여기 구구절절이 그 사연 다 적자면 한도 끝도 없어 면박이나 당한다. 그러니 제목만 몇 개 적는다. '한계령', '다시 한계령에서', '양양아리랑'이 있으니 이젠 '또 다시 한계령에서'를 노래로 만들어야 하나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태그:#양양군, #구비문학, #농경문화, #갈천리, #양양아리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고, 그보다 더 많이 생각한 다음 이제 행동하라. 시인은 진실을 말하고 실천할 때 명예로운 것이다. 진실이 아닌 꾸며진 말과 진실로 향한 행동이 아니라면 시인이란 이름은 부끄러워진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