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01 08:56최종 업데이트 19.04.01 15:36
내버려 두어야 성장하는 것들이 있다. 모든 문제의 해결사가 되어줘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 엄마로서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아이에게 열 가지의 일이 생긴다면 열한 가지를 내다볼 줄 알아야 좋은 엄마인 줄 알았다. 아이 키우는 내내 아이보다 1초라도 더 빨리 생각하고 행동하려 했다.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넘어지기 전에 잡아주는 것이, 먹기 전에 일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가 조급할수록 아이는 세상을 느리게 배운다. 겨울철 얼음바닥에서 미끄러져 봐야, 초록색 고추도 입에 물면 맵다는 것을 느껴봐야, 깨닫는다. 때론 엄마의 잔소리보다 더 빠르고 효과적일 수 있다.


핀란드 유치원에서 하원하고 돌아온 아이의 겉옷을 벗기다 실소가 터진 적이 많다. 티셔츠를 앞뒤로 바꿔 입고 오는 것은 다반사고, 신발을 좌우 바꿔 신고 온 적도 많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많아 정신이 없던 와중에 벌인 선생님의 실수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이 세살 난 아이의 솜씨였다.

"왜 신발을 왼쪽, 오른쪽 바꿔 신었어?"
"엄마, 이거 나비 모양이야!" 


아이에겐 다 논리가 있다
 

눈이 많이 오는 핀란드에서는 아이들도 방수재질의 장화를 신는다. ⓒ 김아연

 
어른이 보기엔 바보 같아 보이는 행동에도 아이에겐 다 논리가 있다. 본인의 어릴 때를 떠올려봐도 티셔츠를 자꾸만 앞뒤를 바꿔 입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예쁜 그림이 앞으로 가게끔 바닥에 놓고 그대로 티셔츠를 들어올려 입었을 뿐인데, 어느새 그림은 등뒤로 훌떡 넘어가버리곤 했으니까.

처음엔 핀란드 교사들이 아이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작은 실수를 바로잡아 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아이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었고 독립된 자아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하루 일과 중 아침, 점심, 간식시간으로 이어지는 세 번의 식사 시간 동안 교사들은 자리에 앉아 있을 새가 없다. 한 번은 아이의 식사시간을 지켜본 일이 있는데 선생님들은 식사 시간이 되면 버터통과 빵 접시를 들고 테이블 주변을 돌아다니며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개인의 의사를 묻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죽 위에 버터를 올려줄까? 빵은 반을 줄까, 하나 다 줄까?"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배식한다면 굳이 들이지 않아도 될 수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짧은 식사 시간 안에서도 내가 선택한 것을 먹고 마시면서 자신이 직접 선택한 결과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배우고 있었다.

하루 일과 중 한두 번 정도는 꼭 있는 야외 활동 시간도 아이들의 자립성을 키우는 있는 시간이다. 아주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옷을 스스로 챙겨 입는다. 개인 사물함 앞에서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자신의 옷에 조그만 다리를 어설프게 집어넣고, 지퍼를 낑낑거리며 올리는 모습을 처음 본 날은 왠일인지 눈물이 핑 하고 돌기도 했다.

선생님은 섣불리 나서서 아이를 도와주지 않는다. 아이가 끝까지 지퍼를 올릴 때까지 기다려준다. 신발을 신는 것이 어설퍼도, 오래 걸려도, 기다려준다. 야외활동 때마다 아이가 직접 옷을 갈아 입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사물함 가장 아래 칸에 방수장갑, 모자를 아이의 손에 닿기 쉽게 등원시간마다 정리해두고 나오곤 했다.

어설퍼도, 오래 걸려도, 기다려주기
 

야외활동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사물함에서 자신의 옷가지를 스스로 챙겨입는다. ⓒ 김아연


하지만 그렇게 혼자서 옷을 잘 입던 아이들도 부모가 옆에 있는 날은 태도가 돌변하기도 한다. 부모가 옆에 있으면 '나는 이소 뽀이까(iso poika, 큰 형)가 아니라 삐에니 뽀이까(pieni poika, 작은 동생)이니 어서 옷 입는 것을 도와 달라'고 조른다.

나는 가끔은 눈을 질끈 감고 종종 아이를 도와주기도 했다. 지금은 잘 적응을 했지만 처음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할 땐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하는 상황이 적잖이 외롭고 서글픈 아이가 집에 와서 더 앙탈을 부리기도 했다. 아이의 선생님은 평소 혼자 옷을 잘 입다가도 부모가 나타나면 갑자기 못하는 척을 하는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다며 웃기도 했다.

자신이 가지고 논 장난감은 스스로 치우고, 만들기 시간 이후에는 종이와 가위를 사물함에 다시 가져다 놓는 습관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낮잠을 자고 난 후, 자신이 사용한 이불과 베개를 사물함에 차곡차곡 개어 놓는 것은 물론이다. 그 작은 생활공간 안에서도 아이들에게 주어진 하루 일과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기르기에 충분하다.

우리 아이가 자라나게 될 다음 세상을 나는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 세대보다 복잡한 선택지를 놓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가 되어 아이에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대답해줄 수는 없지만, 그저 아이가 확신 있게 자신의 삶을 결정하길 바란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아도 매일 스스로 신발을 신고, 커다란 우주복에 다리를 끼워 넣는 외롭고 서글픈 순간이 쌓여 아이 인생의 기초 체력이 될 거라고 믿는다. 어른들이 1초 빨리 움직이지 않았기에, 아이는 올해도 1살을 더 값지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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