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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은 의열단, 한인사회당 비밀연락원으로 항일독립운동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1911년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 당시 모습으로 추정된다.
▲ 의사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이태준 이태준은 의열단, 한인사회당 비밀연락원으로 항일독립운동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1911년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 당시 모습으로 추정된다.
ⓒ 이태준 선생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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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하면 대개 월북 작가 이태준을 떠올린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인물은 작가가 아니라 의사 이태준이다. 1910년대 몽골 인민들 70-80%가 감염돼 고통 받았던 성병을 치료해 준 인물이 이태준이다. 이태준은 성병에 감염돼 목소리를 잃어버린 몽골인들의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다. 당시 몽골인들은 라마교 등 전통적인 의술에 의존했었다. 그런 면에서 근대 서양의학의 세례를 최초로 몽골인들에게 전수한 이가 이태준이다.

당시 독일 의학자 에를리히(P. Erlich)가 발명한 화학요법 매독치료제인 살바르산이 이미 상용화된 시절이었다. 그 결과 1910년대 후반 이태준은 몽골인들에게 '극락세계에서 내려온 여래불(如來佛)'이자 '신인(神人)'으로 추앙받았다. 이태준은 몽골의 마지막 국왕 보그드 칸 8세의 주치의가 된다. 몽골 왕실과 왕족의 신뢰를 한 몸에 입으며 1919년 7월 이태준은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을 받았다. '에르데닌 오치르'라는 국가훈장인데 '귀중한 금강석'이라는 뜻이다. 이태준이 몽골인들의 삶에 금강석처럼 빛나는 귀중한 존재였던 셈이다.

성병 등 전염병으로 고통 받던 몽골 인민들에게 새롭게 삶의 전기를 만들어 준 것이었으니 이태준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가히 짐작하게 한다. 그러면 몽골 인민의 존경과 추앙을 한 몸에 받았던 의사! 이태준은 과연 누구인가? 오늘날 이태준은 몽골 정부 차원에서 그리고 인민들 사이에서 높이 추앙받고 기억되는 위대한 인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외면 받아 왔던 게 사실이자 정작 우리역사에선 망각된 인물이다. 이태준은 의사로서 몽골 인민에게 봉사한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식민지 시절 치열하게 살았던 항일독립운동가였다. 그러함에도 한국사 교과서엔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태준은 과연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태준은 경상남도 함안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함안군 마을 교회를 다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고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조선의 현실에서 청년 이태준은 절망했다. 이듬해 상처를 하고 두 딸을 남동생에게 맡긴 뒤 이태준은 상경한다. 23세 되던 해였다. 상경 직후 이태준은 제중원(세브란스의학교 병원) 앞에 있는 '김 형제 상회'에 취직했다. '김 형제 상회'는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이자 의사면허 1호인 김필순이 세운 상회이다. 말이 상회이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위장된 상점이었다.
 
김필순은 망명 시절 독립군 군의관으로 병원 수익의 대부분을 독립운동에 기부했다. 그 결과 가족들은 항상 곤궁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이태준에게 선배이자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 모델이 되었던 인물이다.
▲ 이태준의 모델이 된 항일독립지사 김필순 김필순은 망명 시절 독립군 군의관으로 병원 수익의 대부분을 독립운동에 기부했다. 그 결과 가족들은 항상 곤궁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이태준에게 선배이자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 모델이 되었던 인물이다.
ⓒ 세브란스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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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대구에 '상덕태 상회(尙德泰商會)'라는 곡물상점을 설립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은 것과 같다. 당대 독립운동가들이 상호 연락을 하고 비밀회합을 가졌던 위장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김 형제 상회'에는 당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들락거렸다. 실제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지하연락거점이었다. 도산 안창호 역시 '김 형제 상회'를 자주 드나들었다.

안창호는 의사 김필순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1878년생 동갑내기인 김필순이 안창호를 '사랑하는 동생'으로 표현했고 안창호가 서울에 거주할 땐 항상 김필순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이는 미국에 있던 아내 이혜련 여사에게 보낸 1908년 12월 30일자 서신에서도 확인된다. 실제로 김필순은 안창호가 만든 항일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 중이었다.

이태준의 일생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은 세 명이다. 첫 번째가 세브란스 의학교 재학 시절 자신에게 '청년학우회' 가입을 권유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당시 도산은 1909년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 사건으로 용산 헌병대에 피검돼 극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나 세브란스 병원에서 요양 중이었다. 이태준의 회고에 따르면 안창호는 항상 따뜻한 말씀으로 청년 이태준을 대했으며 항일운동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태준이 신민회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해 항일독립운동 전선에 발을 들여 놓게 만든 인물이 도산 안창호이다.

다음으로 이태준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은 '김 형제 상회' 주인이자 의사면허 1호인 김필순이다. 이태준이 1907년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2회로 졸업해 의사로서 길을 걷게 되는 데엔 김필순의 영향이 컸다. 이후 항일독립운동 전선에서 김필순은 이태준의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필순은 이태준의 학교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세브란스의학교 시절 김필순은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 애비슨(O. Avison) 교장을 도와 해부학, 약물학 등 의학서적을 번역하는 데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후배인 2회 의학교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무엇보다 신민회 활동을 통해 항일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든 김필순의 정신적 영향 하에 있었다. 이는 이태준이 세브란스의학교 학생 시절 김필순과 의형제인 안창호의 권유로 신민회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나아가 김필순이 105인 사건으로 체포 위기에 놓인 적이 있었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식민통치 초기 서북 기독교인들과 항일독립지사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테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날조해서 꾸민 조직사건이다.

이 때 이태준은 김필순의 망명길을 마지막 배웅하며 함께했다. 김필순은 일제 감시의 눈을 피해 다급히 망명길에 나섰다. 세브란스 의학교 분원이 있는 신의주 병원으로 출장을 간다는 핑계로 황급히 경의선 열차에 올라탔다. 1911년 12월 31일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리곤 곧장 국경을 넘어 서간도 통화현으로 망명을 단행했다. 그곳엔 독립군 무관을 양성하기 위한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그곳에서 김필순은 독립군 군의관으로 활약했다.

당시 오지인 만주 독립군 기지촌에선 의료 활동에 필요한 물품들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김필순은 미국에 있던 안창호에게 안경과 의약품 가격을 묻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김필순은 이후 1916년 흑룡강성 치치하얼로 이동해 그곳에 병원을 차리고 이상촌 건설을 꿈꾸었다. 조선인 농민을 대거 이주시켜 독립군 무관을 양성하는 무관학교 건설을 시도했다. 그러나 내과의사로 변장한 일제 특무가 건네 준 우유를 먹고 독살되었다. 귀가 도중 말에서 떨어져 비명횡사한 것이다.
 
김염은 김필순의 셋째 아들로서 반파시스트 항일예술인이었다.
1930년대 중국 청년들의 우상이 되었던 영화배우였다.
▲ 1930년대 중국 영화계 황제 김염 김염은 김필순의 셋째 아들로서 반파시스트 항일예술인이었다. 1930년대 중국 청년들의 우상이 되었던 영화배우였다.
ⓒ EBS e - 역사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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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필순은 병원 운영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 대부분을 독립운동자금으로 기부했다. 그런 이유로 김필순의 가계는 항상 가난에 쪼들린 채 궁핍한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김필순 사후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고난에 찬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특히 영화배우로 등극한 셋째 아들 김염의 청소년시절이 그러했다. 상해 시절 극장 청소와 매표, 그리고 잠잘 곳이 없어서 김염은 극장 내 긴 걸상에 누워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럼에도 김필순의 아들 김염과 딸 김위는 반파시스트 항일전사로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았다. 특히 김염은 1930년대 중국 상하이 영화계 황제로 유명세를 탔다. 그러자 제국주의 일본은 일제를 홍보하는 영화사업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김염은 비록 '기관총으로 쏜다고 위협해도 일제에 협력할 수 없다'며 드높은 항일의식을 견지했다. 딸 김위 역시 조선의용대 제2지대 항일여전사로서 해방될 때까지 일제와 항전을 멈추지 않았다. 모두 부친 김필순의 항일독립운동에의 고결한 뜻을 이어갔다.
 
조선의용대 제2지대 항일여전사 김위(사진 맨 앞 줄 오른쪽 여성).
김위 왼쪽 여성은 광주학생운동 서울 2차 여학생시위를 배후 주도한 허정숙이다.
▲ 조선의용대 창립기념사진 당시 김위(1938년) 조선의용대 제2지대 항일여전사 김위(사진 맨 앞 줄 오른쪽 여성). 김위 왼쪽 여성은 광주학생운동 서울 2차 여학생시위를 배후 주도한 허정숙이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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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역시 김필순을 떠나 보내고 세브란스의학교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병원 내에 김필순과 이태준이 함께 망명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비밀지하조직 청년학우회에 가입, 활동 중이던 이태준은 곧장 그길로 평양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황급히 중국 난징으로 망명을 단행한 것이다. 망명 직후 이태준은 한동안 언어가 통하지 않고 일자리를 얻지 못해 불안정한 생활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기독교도인 중국인의 도움으로 난징 시 기독회의원에 일자리를 얻어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 이태준은 중국 신해혁명에 참가한 인사들과 조선인 유학생으로서 혁명군에 참여한 청년들과 교류하면서 항일의지를 굳게 다졌다.

1914년 이태준은 중국을 떠나 몽골 고륜(울란바토르)으로 이동했다. 이태준에게 세 번째로 영향을 미친 처사촌 우사 김규식의 권유에 따른 행동이었다. 우사 김규식은 김필순의 매제이기도 했다. 당시 김규식은 몽골 고륜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려 했다. 신민회 회원들의 청도회의와 이후 목릉회의의 결정에 따른 실천이었다. 1914년 몽골 고륜으로 이동할 때 이태준은 김규식과 유동열, 그리고 중국 비행학교를 졸업한 애국청년 서왈보를 대동하였다. 비록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국제정세의 변화로 독립군 무관학교 설립은 무산됐지만 대신 고륜에서 이태준의 의료 활동이 꽃을 피웠다.

이태준은 몽골 고륜에 '항일독립운동의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의미로 '동의의국(同義醫局)'을 개업했다. 동의의국은 중국에서 몽골을 거쳐 러시아로 이동하던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주요 거점이었다. 항일독립지사들이 숙식을 해결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 이태준의 병원에서 몇 개월 간 머물렀던 전 광복회장 이강훈 옹은 하루에도 40~50명 되는 항일지사들이 머물곤 했다고 회상했다.

무엇보다 이태준의 항일독립운동의 꽃은 의열단 가입과 한인사회당 비밀연락원 활동이었다. 한인사회당 당원 박진만과 한형권은 모스크바 레닌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를 운송하고 있었다. 밤낮으로 총을 휴대한 채 교대로 금괴 궤짝에 드러누운 채 잠을 자면서 가까스로 반혁명파 지역을 벗어났다. 이 때 이태준은 고륜에서 12만 루블을 자신이 책임지고 북경을 거쳐 상해로 운송하기로 했다. 먼저 8만 루블의 금괴를 무사히 상해로 운반했다. 그 때가 1920년 가을이었다. 1차분 금괴를 상해로 운송한 뒤 이태준은 북경을 거쳐 장가구-고륜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몽골 고륜으로 귀행 도중 잠시 북경에 머물던 이태준은 의열단장 김원봉과 우연히 조우한다. 당시 김원봉은 폭발력이 큰 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뛰어난 기술자를 수소문하던 중이었다. 이태준은 자신의 자동차 운전기사였던 마자알이 뛰어난 폭탄제조기술자임을 알고 김원봉에게 소개시켜 주려던 참이었다. 북경 시내 요정에서 김원봉을 만난 이태준은 의열단 사업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가입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다시 북경에 올 때는 헝가리 출신 애국청년 마자알을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했다. 마자알 역시 약소국 청년으로서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마자알은 중국과 몽골 국경도시인 장가구에서 몽골을 거쳐 러시아로 이동하던 항일독립지사들을 장가구에서 고륜까지 자동차로 태워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태준이 몽골 고륜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반혁명파 군대가 고륜을 점령했다. 반혁명파 백위대는 미친 듯이 유태인을 학살하고 중국인 은행을 약탈했다. 이태준은 탈출할 수 있었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느라 탈출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뒤늦게 금괴 4만 루블을 싣고 북경으로 향하던 이태준 일행을 백위대가 추적해 고륜으로 다시 압송한 것이다. '미친 남작'으로 불린 운게른 스테른베르크가 지휘하는 러시아 반혁명파에는 일본군 장교 요시다(吉田)가 참모로 동행중이었다. 일제는 이태준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고 병원 '동의의국(同義醫局)'이 항일독립지사들의 비밀아지트임을 알고 있었다. 이태준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체포돼 처형되는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순국 당시 이태준의 나이 38살이었다.

이태준의 죽음에도 마자알은 이태준에게 전해들은 의열단장 김원봉을 찾으러 북경 시내를 뒤지며 배회했다. 역시 우연히 마자알과 김원봉이 조우하는 장면은 박태원이 쓴 <약산과 의열단>에 극적으로 묘사돼 나온다. 2016년 개봉돼 750만 명이 넘게 본 영화 <밀정>에는 폭탄제조기술자 마자알은 나와도 이태준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밀정>은 2% 부족했다.

이태준의 삶과 죽음은 모두 항일독립운동으로 일관했다. 독립군 무관학교를 건설하기 위한 꿈과 독립운동 자금 운송을 떠맡았던 것은 모두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것이었다. 의사로서 몽골 인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았음에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고 항일독립운동전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다. 스스로 의열단에 가입했고 한인사회당 비밀연락원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다. 그의 죽음이 처연하지만 항일독립운동을 향한 치열한 삶 앞에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태준은 의사로서 처사촌인 우사 김규식 선생과 함께 몽골 고륜(울란바토르)에 독립군 무관학교 건립을 시도했다. 이후 의열단과 한인사회당 당원으로서 자신이 세운 병원 <동의의국>을 활동 거점으로 삼고 북경과 상해를 넘나들며 항일독립운동에 매진했다.
▲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몽골 울란바토르) 이태준은 의사로서 처사촌인 우사 김규식 선생과 함께 몽골 고륜(울란바토르)에 독립군 무관학교 건립을 시도했다. 이후 의열단과 한인사회당 당원으로서 자신이 세운 병원 <동의의국>을 활동 거점으로 삼고 북경과 상해를 넘나들며 항일독립운동에 매진했다.
ⓒ 김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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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정부는 수도 울란바토르 시 금싸라기 땅 2천 평에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이제는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이태준을 기려야 할 때이다.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한국사 교과서에 '이태준' 이름 석 자를 기록해야 하고 그분의 치열한 삶과 위대한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어쩌다 몽골 여행을 가서 알게 되는 이태준 선생이 아니라 항일독립운동 전선에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친 의열단이자 한인사회당 비밀연락원으로 이태준을 올바르게 기록하고 기억할 일이다. 그게 민주공화국 선포 100년을 맞는 뜻 깊은 해에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일 것이다.

태그:#이태준, #한인사회당, #의열단, #김위, #김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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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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