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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모습.
 생전에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모습.
ⓒ 박종우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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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죠. 그렇게 가실 분이 아니었는데..."

국내 대기업에서 부회장을 지냈던 김 아무개씨의 말이다. 그는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나름 인연을 맺어왔던 인물이다. 김 전 부회장은 "조 회장을 과거 주변에서 모실 기회가 있었다"면서 "평소 말씀이 그리 많지 않으셨지만, 회사에 대한 고민이 참 많으셨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8일 오후 기자와 전화 통화 내내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조 회장의 타계소식도 뒤늦게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김 전 부회장은 "조 회장은 해외 출장을 다닐 때 따로 비서를 두지 않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항상 카메라를 챙기셨고, 하늘을 좋아하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몇 년 사이 불거진 한진그룹 조씨 일가의 일탈 행위 등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그는 "조 회장 스스로 자식을 잘못 키운 애비 잘못이라고 대국민 사과까지 했는데..."라며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이 많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김 전 부회장은 "그렇게 멀리서 쓸쓸하게 가시면 안됐는데..."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의 말대로 조 회장은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항공사 씨이오(CEO)라는 특수성도 있지만, 국내든 해외든 출장길에 카메라를 챙겼다고 한다. 실제 그는 10년 전인 지난 2009년에 당시 자신이 찍었던 사진 124장을 모아 '조양호 사진집'을 내기도 했다.

사진과 하늘을 좋아한 재벌... '땅콩 회항' 사건부터 내리막길

하지만 그의 사진찍기도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등 세계 경제가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해운과 항공 등 한진그룹을 둘러싼 경영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몇년새 조씨일가를 둘러싼 '오너리스크'가 불거지면서 그룹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까지 내몰리게 됐다.

불운의 시작은 지난 2014년 12월 5일이었다. 조 회장의 큰 딸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이다. 조 전 부사장은 견과류 서비스를 문제삼아 뉴욕 JFK 공항에서 이륙하려던 비행기를 돌려 세웠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재벌 갑질'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왼쪽부터) 작년 5월 28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소환되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부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  5월 1일 서울 강서경찰서에 소환되는 조현민 대한항공 전 전무,  5월 24일 서울출입국외국인철 이민특수조사대에 소환되는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
▲ 포토라인에 선 이명희, 조현민, 조현아 (왼쪽부터) 작년 5월 28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소환되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부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 5월 1일 서울 강서경찰서에 소환되는 조현민 대한항공 전 전무, 5월 24일 서울출입국외국인철 이민특수조사대에 소환되는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
ⓒ 유성호/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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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회장은 대국민 사과 회견을 열었고, "대한항공 회장으로서, 조현아의 애비로서 국민여러분의 너그러운 용서를 다시 한번 바란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재발방지와 기업문화를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회사는 사내 별도의 익명 게시판인 '소통광장'을 개설하고, 소통위원회 등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작년에 한진 조씨일가는 또 다시 사회적 논란의 한가운데에 섰다. 이번엔 둘째딸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였다. 그해 4월 조 전 전무의 이른바 '물벼락 갑질'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국민의 공분을 샀다. 조 전 전무는 베트남 다낭으로 출국했다가 뒤늦게 귀국해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여론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 회장의 부인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의 직원과 운전기사 등에 대한 욕설과 폭언 등이 영상과 음성으로 연이어 폭로됐다. 이들 갑질 이외 조씨일가의 밀수와 횡령 등의 범죄 의혹도 불거졌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대한항공'의 '대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수만명의 누리꾼들이 곧장 찬성하는 댓글을 달았다. 회사 직원들까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설 정도였다. 한진 조씨일가에 대한 국민 여론은 회복 불능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들 조씨 일가에 대한 사법당국의 조사와 수사도 이어졌다. 경찰과 검찰 뿐 아니라 국세청, 공정위, 관세청, 국토해양부 등 웬만한 조사 기관은 거의 망라됐다. 지난해 여름부터 조 회장을 비롯해 조씨 일가는 줄줄이 검찰 포토라인에 서야 했다. 조 회장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은 기각됐지만, 작년 10월 조 회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배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위태로운 '공든 탑' 대한항공 50년,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작년 9월 12일 오후 서울 중량구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에  배임혐의 조사를 받기 위해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작년 9월 12일 오후 서울 중량구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에 배임혐의 조사를 받기 위해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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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회장은 지난해 12월 미국으로 병 치료차 떠났다. 형사 재판을 앞둔 피의자 신분이었던 그였지만 검찰은 별도의 출국금지를 하지 않았다. 조 회장쪽 변호인은 당시 사법당국에 조 회장의 증상으로 '폐가 섬유화되는 병'이라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폐섬유화증'은 폐가 섬유화되면서 점차 딱딱해져 폐의 기능이 떨어지는 증상을 말한다. 폐가 굳어 산소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할 경우 사망까지 이를수 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작년말 LA 한 병원에서 폐 관련 수술을 받았으며, 수술경과도 좋아 (LA에 있는) 자택 등에 머무르며 통원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 회장은 지난달 대한항공의 주주총회에서 이사직 선임에 실패하고, 경영권을 박탈당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그는 전했다. 이후 조 회장의 병세도 크게 나빠졌다는 것이 회사쪽의 설명이다.

한진그룹 계열사의 한 임원은 "올해가 대한항공 창립 50주년이 되는 해"라며 "항공업계로 보더라도 의미있는 해이지만, 국민 여론을 의식해 조용히 내부 행사로 치르려고 했지만 (조 회장의 사망으로) 이 마저도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1969년 창업주인 조중훈 회장이 당시 공기업이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면서 탄생했다. 국적항공사로서 70년대, 80년대 올림픽 등으로 거치면서 말그대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크게 성장했다. 1974년에 대한항공에 발을 디딘 조 회장 역시 대한항공 성장사에 빼놓을 수없는 인물이다.

2000년대 국제항공동맹체인 스카이팀(Sky Team) 창설을 주도하고, 외환위기와 9.11 테러 등으로 경영위기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는 평가를 받았다. 69년 출범당시 불과 8대였던 항공기는 작년말 166대로 늘었고, 연간 수송 여객 숫자도 38배나 증가했다. 매출액이나 자산규모 등도 50년전에 비하면 각각 3500배, 4280배 증가한 것으로 돼 있다.

재계 한 임원은 "조중훈 선대회장과 조양호 회장이 적어도 우리나라의 항공과 운수산업에서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면서 "최근 몇년 사이 그의 '공든탑'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의 표현대로 조 회장이 쌓아 올린 '공든탑'이 흔들린 이유는 대한항공 자체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재벌 총수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대를 이어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면서, 직원들에게 폭언과 폭행 등 전 근대적인 경영 행태를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오너일가의 잘못으로 '대한항공'의 기업 이미지는 추락하고, 그 피해는 임직원과 주주 그리고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대한항공 창립 50주년, 고 조양호 회장은 먼 나라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대한항공은 이날 오후 언론에 낸 자료에서 "조 회장은 평생 가장 사랑하고 동경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하늘로 다시 돌아갔다"고 썼다. 대한항공의 또 다른 50년,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 됐다.
 
고 조양호 한진그룹회장.
 고 조양호 한진그룹회장.
ⓒ 대한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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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조양호 회장, #대한항공, #땅콩 회항, #물컵 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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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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