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혹독한 겨울, 나무는 고요하다. 대지 위를 공기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고, 앙상한 가지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침묵하고 있었다. 몸 뉘일 곳 없는 새하얀 눈은 나뭇가지를 꽉 끌어안았다. 제 몸이 점점 차가워져도, 나무는 묵묵히 눈을 업고 있다. 계절이 흘러가는 동안, 자신이 전부 놓쳐버린 꽃송이에 대한 참회라도 하는 듯이.

영화 <러브리스>는 제목 그대로 무척이나 서늘한 영화다. 러시아의 겨울, 그 추운 계절과 영화의 정서적 온도는 비례한다. 영화는 '사랑 없음'(Loveless)이라는 세상으로 우리를 데려가서, 인간적 온기를 상실한 곳의 삭막하고 쓸쓸한 기온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한다.

<리바이어던>(2015)에서는 혹독한 사회상에, <엘레나>(2011)에서는 삐뚤어진 가족애에, <리턴>(2003)에서는 기묘한 부성애에 카메라를 댔던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은 <러브리스> 역시 부조리한 사회상과 어긋난 가족관계를 시종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한다.

갑자기 사라진 아들... 영화의 서늘한 분위기
 
 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이혼할 날만을 기다리며 제냐(마리아나 스피바크)와 보리스(알렉세이 로진)는 부부생활을 꾸역꾸역 하고 있다. 그들에겐 각각 따로 만나는 내연남, 내연녀를 두고 있는데, 사실상 부부관계는 끝난 셈이다.

12살 아들 알료사(마트베이 노비코프)는 가정의 분위기를 짐작한 듯 집에서 시종 침울하다. 아마도 사춘기라고 여겼던 엄마 제냐는 입맛이 없어서 더 못 먹겠다는 아이에게 또다시 꾸지람을 준다. 그것이 아이의 마지막 식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이틀이 지나도 아이가 돌아오지 않자, 경찰과 민간단체가 아이를 찾으러 나선다.
 
영화의 서늘한 온도를 완성한 것은 카메라와 배경음악의 성취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원경으로 쓸쓸한 풍경을, 근경으로 캐릭터의 무심한 얼굴을 잡아내는 카메라의 거리감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 때에 따라 카메라는 인물을 따라 걷기도 하며, 멈춰 선 채로 피사체를 유심히 들여다보기도(롱테이크) 한다. 한 음이 일정한 리듬으로 반복해서 울리는데, 그 사이로 엇박의 음이 불쑥 끼어들어오는 배경음악 역시 인상적이다. 엇박의 음은 그 자체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을 전달하는 세련된 표현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을 관계망으로 정리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먼저 남편과 아내인 보리스와 제냐를 나란히 놓자. 그리고 그 아래로 아들 알료사가 있다. 남편 보리스의 왼쪽에는 내연녀가 있고, 아내 제냐의 오른쪽엔 내연남 안톤(안드리스 카이스)이 있다. 보리스의 위쪽에 회사(상사)가 있다면, 제냐의 위엔 엄마가 위치할 것이다. 한편, 아들의 밑에는 실종된 그를 찾는 민간구호단체, 그리고 경찰이 각각 위치할 것이다. 이제 이 인물의 관계망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각각의 관계를 연결하는 '사랑 없음'의 직선이 무심하게 그어져 있다는 진실을.

남편과 아내로 묶는 것조차 무색할 정도인 보리스와 제냐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부모(보리스-제냐)와 아들(알료사)과의 관계 역시 '사랑 없기'는 마찬가지다. 제냐는 엄마에게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으며, 보리스 위의 회사(상사)는 철저히 기독교 근본주의적 집단이다('근본주의적'인 모든 집단은 그 자체로 배타적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파트너와의 관계 역시 그렇다. 처음에는 설레며 풍성한 사랑을 나눴지만, 어느덧 사랑의 앙상한 잔해만이 처참하게 존재한다. 경찰은 실종된 아들을 찾는 사건이 귀찮은 듯 시큰둥하고, 민간구호단체는 스스로 설정한 범위 안에서만 행동한다("저희는 죽은 사람은 찾지 않습니다").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세상... 사랑이 없다
 
 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의 세계를 '디스토피아'라고 하면 지나칠까. 인물의 관계망 외에도 '사랑 없음'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들이 보는 TV에서는 전쟁과 그로 인한 수많은 사상자 수를 세고, 집을 잃은 난민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것은 영화 내내 반복된 설정인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영상통화를 하는 쇼트 등과 어울려, 기묘한 역설을 이룬다. 그러니까, 인류의 생활은 차츰 진보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도구는 많아졌지만, 정작 사랑은 어디에 있냐고. 안톤(제냐의 내연남)과 딸의 영상통화에서, 만나서 얼굴 보자는 아버지 안톤에게 '(자신은) 영상통화로 만족하다'는 딸의 대사는 이 설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이 세계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 없는 삶, 그렇게는 못살아"라고 말하는 안톤의 대사는 기실 이 영화 전체의 전언이다. 알료사는 바로 이 전언을 행동으로 옮긴 상징에 다름 아니다. 알료사 스스로 몸을 숨긴 것인지, 누군가에게 해를 당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사랑 없는 이곳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랑 없는 세계를 세밀하게 그려낸 묘사도 인상적이다. 보리스와 제냐의 어긋난 관계를 수직-수평의 관계로 흥미롭게 묘사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출근하는 보리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면(수직), 제냐는 지하철을 타고 옆으로 이동한다(수평). 한편, 알료사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제냐가 보리스에게 전화하며 둘은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그 방향 역시 서로의 어긋난 방향이다. 여기서 각자 들고 있는 핸드폰 역시 다른 제품(삼성과 애플)으로 설정하면서 둘의 어긋남을 흥미롭게 표현한다.

많은 영화가 이른바 '타이틀 시퀀스'를 활용한다. 이것은 영화 전체의 프리퀼, 혹은 인물의 커버스토리 등의 의미로 주로 사용하는데, 이 영화에서 타이틀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구분되는 '타이틀 시퀀스'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오프닝 시퀀스를 구분되는 시퀀스로 볼 게 아니라, 다음 시퀀스와의 맥락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영화의 처음은 눈 덮인 겨울의 나무를 비추는데, 이어지는 화면에는 계절이 바뀌어(아마도 가을로 보인다) 학교에서 하교하는 알료사가 나온다. 영화가 비추는 나무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한데, 영화의 끝이 동일한 계절의 동일한 나무를 비추며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오프닝에서 나온 그 '나무'의 플래시백이 아닐까.

이 영화의 유일한 따뜻함... 감독의 의도
  
 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여기저기에서 사랑의 죽음을 목도하게 만드는 이 서늘한 영화에서 따뜻함은 아무래도 영화 외적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감독의 의도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 모두를 '소년 찾기'에 동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차갑고 쓸쓸한 세상에, 누군가의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곳에 미미한 온기를 조금 더 할 수 있지 않겠냐고. 이 '사랑 없는'(Loveless) 세상에서.

얄료샤는 때로 그 나무에 몸을 기댔다. 카메라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데, 이것은 알료사가 나무를 보는 시점 쇼트다(영화는 나무를 비출 때마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다). 그가 올려다보는 하늘엔 앙상한 나뭇가지 몇 개가 삐죽 튀어나 있다. 그땐 늦가을이어서 그랬다. 자신이 놓쳐버린 잎과 꽃을 아쉬워할 겨를도 없이, 어느새 겨울이 되어 나무 위엔 새하얀 눈이 올라왔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봄이 오면, 꽃은 하늘에서 열린다. 18일 개봉.
러브리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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