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6살 때였나. 옆집에 또래 친구가 이사를 왔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태어난 연도는 같았지만 '또래' 친구는 생일이 2월이라 한 학년 빨리 입학하는 처지였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했다. 과연 이 두 아이들은 '친구'가 되어야 할까? '형, 동생'이 되어야 할까? 그저 동네 친구 하나 만드는 일인데 당사자의 엄마들은 물론, 그 주변 '아줌마'들까지 심각하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할 문제가 되어 버렸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두 아이는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때 형과 동생이 되었다면 지금까지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까? 거기엔 '형' 뻘인 아이와 엄마의 '혜량'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나이'를 둘러싼 호칭과 관계의 문제는 녹록지 않다. 지난 14일 방송된 < SBS 스페셜 > '왜, 반말하세요?' 편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언어'와 '권위'에 대해 짚어봤다.

말로 부터 시작된 관계의 해체
 
 < SBS 스페셜 > '왜, 반말하세요?'의 한 장면

< SBS 스페셜 > '왜, 반말하세요?'의 한 장면 ⓒ SBS

 
다큐의 시작은 다소 '도발적'이다. 방송국에 견학 온 고등학교 방송반 학생들과 선생님, 그런데 학생들은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마흔 줄의 선생님을 '이윤승'이라고 불렀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친구'처럼 편하게 말을 놓기까지 한다. 도대체 이 방송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윤승 선생님의 호칭이 '이윤승'이 되기까지는 사연이 있었다. 학교 안에서도 군기가 세기로 소문났던 방송반. 후배들은 저만치 선배가 가는 게 보이면 달려가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며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하고 복창을 해야 했다. 당연히 방송반의 모든 일들은 그에 따라 '상명하복' 구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 SBS 스페셜 > '왜, 반말하세요?'의 한 장면

< SBS 스페셜 > '왜, 반말하세요?'의 한 장면 ⓒ SBS

 
선생님은 오죽했을까? 새로이 방송반을 맡은 이윤승 선생님은 이런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방송반의 관례를 깨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바로 '내가 먼저 권위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윤승 선생님은 '그냥' 이윤승이 되었다.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는 학생들은 "나 이거 하기 싫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윤승이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는 이유다.

'호원이'가 된 도련님의 사례도 있다. 이미 다큐멘터리 < B급 며느리 >를 통해 알려진 김진영씨네 가족 이야기다. 김진영씨는 결혼을 하기 전부터 남편의 동생과 허물 없이 친한 관계였고 '호원'이라고 편하게 불렀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시댁에서는 '도련님'이나 '삼촌'이라는 호칭을 요구했고, 형수와 시동생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남편은 김진영씨 여동생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는데, 왜 진영씨는 남편의 동생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을까. 주변에서는 "그냥 잠깐만 참으면 된다"지만 진영씨는 이런 호칭의 차별이 결국 '여자의 삶'을 어그러뜨리는 게 아닐까 고민한다.

당신을 당신이라 부르지 못하는 사회
  
 < SBS 스페셜 > '왜, 반말하세요?'의 한 장면

< SBS 스페셜 > '왜, 반말하세요?'의 한 장면 ⓒ SBS

  
가족부터 학교, 직장까지 '호칭'에서 시작되는 관계의 문제는 복잡하다. 전문가는 그 이유를 '너, 당신'이라는 직접적 호칭의 부재에서 찾았다. 전 세계 207개의 언어 중 '너, 당신'을 직접적으로 부르지 않는 언어는 단 7개뿐이며 그 중 하나가 한국어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상대방을 부를 수 없기에 새로운 호칭을 찾아야 했고, 그를 위해 신상 정보 파악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언어의 특수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다큐멘터리는 '상명하복'이 내재화된 우리 사회의 위계 질서를 문제 삼았다. 5, 6살 아이들이 노는 키즈 카페에서도 "너 몇 살이냐"부터 물으며 위계 서열을 정하고 있었다. 동생인 아이에게 형은 "너라고 하지 마라", "형이니 내가 먼저 할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많은 사람들은 그 시작을 '장유유서'로 대표되는 조선 시대의 성리학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고미숙 고전인문학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조선 시대 서당은 나이 차를 두지 않는 '통교육 체제'였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옛 사람들은 오히려 나이에 관대했다. 25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서신으로 학문을 논했던 기대승과 이황처럼 나이를 막론하고 우정을 나누는 사례가 흔했다고 한다.
 
 < SBS 스페셜 > '왜, 반말하세요?'의 한 장면

< SBS 스페셜 > '왜, 반말하세요?'의 한 장면 ⓒ SBS

 
오성철 교수는 "나이에 따라 위계질서를 정하지 않았던 조선의 전통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바뀌어 오늘날처럼 연령별 위계 질서로 고착됐다"고 지적한다. 일본 정치인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군국주의 일본의 사상으로 채택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의 사범학교를 군대식으로 재편했다. 이른바 '사범형 인간'은 상급생을 신으로 받들고 절대 복종해야 한다. 군대 내 상명하복의 질서를 고스란히 근대 교육으로 제도화한 것. 여기서부터 오늘날의 권위주의적 위계 질서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송은 이런 식민주의의 잔재는 오늘날의 위계 질서를 만든 데 50% 정도만 책임이 있다고 부연 설명했다. 식민지의 유산에 절반의 책임이 있지만, 학도 호국단이나 국민 교육 헌장 등 일제의 관행을 고스란히 부활시킨 박정희 시대의 권위주의 교육 역시 오늘날 권위주의 사회의 한 축이 됐다는 것. 언어는 사회 구조와 맞물린다. 결국 정치적 권위주의가 일상의 권위주의가 되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관행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바로 '수평적 사회를 향한 수평적 언어'에 대한 고찰이다. 

일제 식민주의와 독재 정권의 권위주의만의 문제일까?
 
 < SBS 스페셜 > '왜, 반말하세요?'의 한 장면

< SBS 스페셜 > '왜, 반말하세요?'의 한 장면 ⓒ SBS

 
단 몇 개월 차이라도 형, 동생이 되는 우리 사회의 '연령별 수직 구조'를 다큐멘터리는 예리하게 짚어냈다. 더구나 그 원인을 '식민주의와 독재 시대의 권위주의'에서 찾은 점은 그동안의 문제의식에서 진일보한 신선한 접근이었다. 또한 방송은 독일 68혁명 세대의 나치 잔재세력 청산을 예시로 들어, 정치적 권위주의를 해소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일제 잔재 청산의 필요성이 뒤늦게 대두되고 있다. 나아가 독재 잔재 청산에 대한 담론을 통해 '권위주의적 언어'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그러나 부족한 점도 눈에 보였다. 방송에서 사례로 등장한 <대리 사회>의 저자 김만섭씨는 대학원생에서 대리운전 기사가 되자 당장 '아저씨', '야', '너'로 바뀌는 호칭을 들어야 했다. 과연 우리 사회 권위주의 문제를 두고 '나이' 탓만 할 수 있을까.

또 과연 약간의 사례를 통해 조선시대를 권위적이지 않은 사회라고 예단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유교를 차치하고 우리 사회의 완고한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설명할 수 있을까? 교수와 학생간의 자유로운 토론이 불가능한 것이, 그저 '언어' 때문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윤승 선생 역시 수평적 언어를 실천하기 쉽지 않다고 고백한다. 우선 그의 '혁명적인' 관계 개선으로 인해 동료 교사들은 불편함을 토로했다. 이윤승은 '반말'을 통해 권위주의적 관계를 탈피하고자 했지만, 때로는 수평적 언어가 관계의 혼돈을 낳기도 했다.

방송에는 안 나왔지만 최근 IT 기업을 중심으로 '별명' 혹은 '외국 이름'을 부르며 수평적 관계로 전환을 시도하는 '붐'이 일었다. 하지만 이름만 '수평'적일 뿐, 실제로는 수직적인 관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아직 갈 길이 먼 현실이다.

다큐멘터리 말미에 등장한 수평적인 언어 모임에서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을 묻지 않았다. 모임을 통해 이들은 권위주의 사회 속에서 느꼈던 갑갑함을 풀어낸다. 하지만 여전히 '군대식' 상명하복 문화가 내재화 된 한국 사회에서 탈권위적 사회를 향한 출발점으로서 수평적 언어에 대한 모색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SBS스페셜- 왜 반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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