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 기자 말
 
 <더 레슬러> 포스터

<더 레슬러> 포스터 ⓒ NEW

 
보는 동안 마음은 물론이고 몸으로까지 아픔이 전달되고, 보고 나서는 쉽게 떨칠 수 없는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2008년에 개봉한 <더 레슬러>가 바로 그런 영화다.

이미 바닥까지 추락한 한 남자가 바닥을 뚫고 가라앉는 고통스러운 과정, 영화를 보는 동안 두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운 순간들이 관객의 가슴을 때리지만 대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의 잔인할 정도로 집요한 연출과 미키 루크의 실감나는 연기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로 하여금 화면에서 눈을 못 떼게 만든다.
 
 <더 레슬러>의 한 장면

<더 레슬러>의 한 장면 ⓒ NEW

 
랜디(미키 루크)는 속된 말로 한물간 프로레슬러다. '더 램'이라는 닉네임으로 19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주중에는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주말에 있을 레슬링 경기 준비를 하고, 주말이 되면 동네 체육관이나 회관에서 몇 안 되는 관중을 앞에 두고 레슬링 경기를 치른다.

경기가 끝나면 단골 술집에 가서 스트리퍼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 없는 썰렁한 트레일러로 돌아간다. 

경기장에 오르기 전 랜디는 머리를 염색하고, 태닝숍에서 몸을 까맣게 태우는 등 관중들에게 최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한다. 뿐만 아니라 근육을 키우기 위해 각종 약물을 복용하고, 쇼맨십을 위해 사용 될 도구들을 구매하는데, 이 모든 과정을 담고 있는 카메라의 건조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랜디의 모습은 초라하고 처량하기만 하다.

감출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는 그의 노쇠한 육체 때문일까? 만약 그가 준비하는 경기가 수천 명의 관중을 위한 것이라면, 그로 인해 그가 벌어들이는 돈이 또 수천이라면 덜 비참할까? 

감춰둔 면도날로 이마에 일부러 상처를 낸 랜디
 
 <더 레슬러>의 한 장면

<더 레슬러>의 한 장면 ⓒ NEW

 
공들여 준비한 경기가 끝을 향해 갈 즈음 극적인 승리의 장면을 위해 그는 손목 붕대에 감춰두었던 면도날로 이마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린다. 좀 과한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뒤에 이어지는 하드코어 레슬링 경기에 비하면 면도날은 애교수준이다.

스테이플러, 유리, 철사 등등을 이용해 마치 자신들이 초인이라도 되는 양, 서로의 몸에 상처를 내는 레슬러들의 모습은 가히 충격이다. 피가 낭자한, 말 그대로 하드코어한 경기를 보면서 영화 속 관중들은 환호성을 지르지만 그 장면을 보는 영화 밖 관객들은 충격으로 말을 잃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인 노장 랜디를 보고 있으면 그의 육체적 고통이 화면을 뚫고 전달되는 것만 같아 괴롭다. 경기가 끝나고 랜디는 쓰러진다. 의사는 당장 약물을 끊고 과격한 운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심장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거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은퇴를 결심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한 조깅조차 감당할 수 없는 몸 상태와 초라한 사인회 자리에서 마주한 전직 레슬러들의 망가진 몸(휠체어, 목발에 의존하고 있는) 때문이다. 
 
 <더 레슬러>의 한 장면

<더 레슬러>의 한 장면 ⓒ NEW

 
병원에서도, 퇴원 후에도, 랜디를 돌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혼자인 것에 대한 자기 연민을 보이지 않던 그였지만 삶의 중심이자 전부와도 같았던 레슬링이 사라지자 랜디는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절감하고 그 어느 때 보다도 연약해진다. 그의 공포는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인 것이다.

살기 위해, 레슬링이 없는 삶을 그는 다시 한 번 부여잡는다. 마트 근무 시간을 늘리고, 유일한 가족인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랜디는 딸에게 용서를 구한다. 감당할 자신이 없어 도망갔었다고. 딸을 방치했다는 사실이 괴로워서 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적도 있었다고.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평생 자신에게 무심했던 아버지, 늙고 병이 들어서야 가족을 찾는 랜디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스테파니는 랜디의 서툴러도 진심어린 노력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그렇게 랜디는 평범한 일상, 보통의 즐거움에 적응해나간다. 특별할 것 없는 마트 일이지만 유쾌하게 일하고,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단골 술집 스트리퍼 캐시디에게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캐시디 역시 그에게 호감과 연민을 가지고 있지만 고객과는 사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게 자신의 철칙이라며 랜디를 밀어낸다. 홀로 아홉 살 아들을 키우는 그녀는 본명이 아닌 무대 이름을 가지고(그녀의 본명은 파멜라다). 화려한 조명 아래, 관중들을 위해, 그들의 즐거움을 위해 일해 왔지만 이제는 퇴물 소리를 듣고 있다는 점에서 랜디와 많이 닮아있다. 하지만 캐시디는 무대와 현실간의 괴리를 인정하며 둘을 확실히 구분 짓고 내일을 위해 살고 있다는 점에서 랜디와 크게 다르다.

함성소리를 쫓아 살아왔으나, 남은 것은 병든 육신뿐
  
 <더 레슬러>의 한 장면

<더 레슬러>의 한 장면 ⓒ NEW


랜디가 기분 좋게 자신의 훈장과도 같은 상처들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져도 관중들의 함성이 들리면 모든 고통을 잊게 된다고 그는 웃으면서 말한다. 그 함성소리를 쫓아 수십 년을 살아왔으나 결국 남은 것은 병든 육신뿐이다. 지금도 길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이 있을 만큼 그의 과거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영화는 그 흔한 회상 장면 하나 없이 오로지 현재에 집중한다.

거칠고 불안한 카메라(핸드핼드)는 랜디에게 완전히 밀착해 그의 뒤를 쫓는다(영화를 보는 내내 투명인간이 되어 그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성실하고 집요하게 관객의 시선을 대신하는 카메라 덕분에 관객은 랜디의 현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제의 영광과 추락을 보지 않고도 실감할 수 있다. 

숙취로 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희망적이었던 스테파니와의 관계 회복은 실패로 끝나고, 스테파니의 경멸어린 시선에 랜디는 좌절한다. 그에겐 그저 실수였을 뿐이지만 스테파니에겐 평생 반복되어온 실망과 상처였던 것이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되고, 유일하게 자신을 받아주는 링 안으로 돌아간다. 

링 안과 링 밖은 엄연히 다른 세상이다. 두 개의 이름, 두 개의 세상. 안과 밖의 밸런스를 맞추지 못한 랜디의 삶은 그를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현실의 삶이 준 상처가 과연 링 위에서 받는 환호로 치유 될 수 있을까? 목숨을 담보로 경기를 치르는 랜디. 부들부들 떨리는 두 다리로 링 위에 선 땀에 젖은 그의 모습에서 절규가 느껴지고, 쏟아지는 조명과 관중들의 함성을 받으며 그가 높이 날아오른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랜디의 삶을 모르는 누군가는 '노장은 살아있다'며 그의 경기에 박수를 보낼 것이지만 그의 삶을 목격한 관객들은 착잡한 마음에 한동안 괴로울 것이다. 

성형 부작용으로 완전히 변해버린 그의 외모, 그러나
 
 <더 레슬러>의 한 장면

<더 레슬러>의 한 장면 ⓒ NEW

 
관객이 랜디의 삶과 고통에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캐릭터와 그를 연기한 미키 루크의 개인사가 묘하게 닮아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그는 배우로서도 스타로서도 굉장한 인기를 누렸고, 그의 이름은 섹시한 배우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연기 보다 복싱에 집중하면서 대중들은 그의 존재를 서서히 잊게 되었고, 그의 자리는 다른 미남 배우들로 채워지게 된다.

2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의 이름이 대중들의 입에 다시 오르내리게 된 것은 성형 부작용으로 인해 완전히 변해버린 외모 때문이었다. 과거의 아름다웠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은 망가진 외모에서 그의 망가진 인생을 상상했다. 안타까운 마음과 별개로 그가 재기에 성공하고 과거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믿기는 힘들었다. 

그의 외모가 하나의 캐릭터로서 오히려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씬시티>(2005)를 통해서다.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의 장르적 특성상 그의 외모는 장점이 되었고, 관객들은 이를 그만의 개성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배우로서 그의 존재감이 폭발하게 된 것은 <더 레슬러>에서다. 미키 루크 개인의 굴곡진 인생이 랜디라는 캐릭터에 설득력을 더하면서 배우와 배역의 완벽한 조합을 보여준 영화는 2008년과 2009년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으며 이후, 미키 루크는 젊은 시절 전성기 때 이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대중들은 이제 그의 외모에 집중하지 않는다. <나인 하프 위크>에서의 치명적인 미소 이상으로 관객들은 <더 레슬러> 속 미키 루크의 초라한 뒷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더 레슬러 미키 루크 대런 아로노프스키 레슬러 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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