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일> 포스터

영화 <생일> 포스터 ⓒ (주)NEW

 
며칠을 머뭇거렸다. '수호네'를, '수호네 가족'의 슬픔을 마주할 수 있을까. 머뭇거리게 됐다. 사실은 영화 <생일>을 보고 '내가 앓지 않을까' 두려웠던 속내가, 더 큰 망설임의 이유였음을 고백한다.
 
"결국 언니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세월호의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말한 홍은전 작가의 고백은 나의 아픔과 닿아 있었다(2019년 4월 15일 <한겨레> [세상 읽기] 늦은 애도). 갑작스럽게 언니를 잃은 나 역시 그랬다. 10년 전, 갑자기 떠난 언니가 왜 죽음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그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나의 애도는 멀기만 했다.
 
부검은 법을 위한 것이지 유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드라마 < CSI > 시리즈에 나오는 철저하고 과학적인 부검은 실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 많은 부검 보고서가 왜 언니의 죽음을 설명하지 못하는지, 왜 내게 언니의 죽음의 이유를 납득시키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장례를 치르는 내내, 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랬기에 애도의 의미를 가늠하지조차 못했다.
  
 영화 <생일> 스틸 컷

영화 <생일> 스틸 컷 ⓒ (주)NEW

 
가족들은 서둘러 언니의 죽음을 마무리하고 싶어 했다. 저마다 사는 게 바빴고 제각각의 삶이 무거웠기에, 우리는 암묵적으로 서두름을 미안해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가족에게 언니에 대한 애도는 빨리 잊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바다에 곤두박인 듯 뒤집어져 있는 '세월호'를 보고, 나는 다른 이들처럼 '세월호'의 절통함에 상처 받았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타자화된 상실인 줄 알았다. 그러다 박제될 수 없는 고통이란 걸 알게 된 건 실화소설 <안녕, 테레사> 때문이었다.

<안녕, 테레사>에서 '테레사'의 죽음은 돌연사도 아니고 사고사도 아닌, 말을 꺼내기조차 힘든 죽음이었다. 테레사는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살해당한 테레사는 재미작가 존 차(본명 차학성)의 동생이었다. 미국의 유명한 행위 예술가였던 차학경이 바로 테레사다.
 
<안녕, 테레사>는 테레사의 죽음을 규명하는 재판 기록으로 재구성한 '논픽션'이다. 누가, 왜 테레사를 살해했는지를 알기 위해 존 차와 그의 가족들이 벌이는 행위는 내게 고통이었다. 그 오랜 시간을 가족의 참혹한 죽음의 현장과 마주하다니. 그들은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고통 속에 숨지 않았다. 그들은 망자를 불러들여 끊임없이 대화했다.

그들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내게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가져왔다. 존 차의 가족은 우리 가족이 그런 것처럼, 고작 산자의 알량한 삶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망자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부재한 망자를 부정하지 않은 채 망자의 생일 파티를 열고, 망자에 대한 사진을 꺼내들고 망자와 대화하며 추억했다. 그들은 내게, 애도란,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프지만 진중하게 알려주었다.
  
 영화 <생일> 스틸 컷

영화 <생일> 스틸 컷 ⓒ (주)NEW

 
<생일>에서 '수호 엄마'는 어떻게든 수호의 생일잔치를 거부하려고 한다. 나는 '수호 엄마'가 수호의 생일상을 왜 그리 모질게 물리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죽었는지 알 수도 없는 아이의 죽음을, 그래서 손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죽을 것처럼 아프기만 한 상처를 어떻게 열어젖히고 타인에게 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배 안의 수호에게서 마지막으로 걸려온 전화를 일하느라 바빠 놓쳐버린 엄마는, 그 때문에 아이를 놓친 것이 전혀 아니지만 그런 자신을 내내 용서할 수 없었다.
 
진도 바다 차가운 물속에 아이를 잃은 사람들과 살아남은 아이들은 실상, 그 물속에 같이 잠겨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거기 누구 없나요?" 아무리 외쳐도 누구도 그 외침에 응답하지 않는 막막함을 늘 품고 살아간다. 생존자가 덤으로 얻은 삶은 온갖 가짜 뉴스로 오염되었다. 너무 많은 죽음이 엄혹했기에, 살아서 아프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면 망자에게 욕이 될까 봐, 미안하고 염치없는 일일까 봐.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은 돌봐지지 않은 채, 오로지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죽음을, 고통을 극복할 수 있을까? 죽음은 애도할 뿐이고, 고통은 옅어짐으로써 견딜만해질 수 있을 뿐, 극복할 수는 없다.
 
수호의 생일상이 우여곡절 끝에 차려진다. 수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수호가 좋아했던 갖가지 먹을 것들로 생일상을 가득 채우고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수호의 어릴 적부터 떠나기 전까지의 모습을 마치 일대기처럼 슬라이드로 넘겨보는 관객들은 더 이상 조문객이 아니다. 그들은 수호의 삶 속 어느 때건, 자신이 함께 했음을 기억해내고 서로의 기억을 교환한다. 수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메모지에 적고, 수호가 살아있을 때처럼 속닥인다. 그 기록들을 나누며 서로의 수호를 증언한다.
 
 영화 <생일> 스틸컷

영화 <생일> 스틸컷 ⓒ (주)NEW

 
기록 속의 수호는 각자가 아는 수호와 다르다. 각자의 수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리며, 동시에 다른 이의 수호를 발견해낸다. 그 발견 속에 울고 웃으며, 수호는 삶의 순간으로 진입한다. 자신들이 몰랐던, 자신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수호의 모습들이 포착되어, 산자의 시간 속에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제 수호는 '망(亡)'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꿈틀대는 '생(生)'물이 되는 것이다. 이 '생물성'이야말로, 산 자가 해 낼 수 있는 최고의 '애도'가 아니겠는가?
 
내게 <생일>은 '애도'의 영화다. <생일>은 잊기 위한 애도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한 애도를, 그 애도의 방식을 알려 준다. 괴롭지 않으려고 기억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에 철갑을 두른 채 죽음에 관한 그 어떤 개입도 철저히 차단하려는 거부가 아니라, 망자에 대한 기억을 불러내어 내가 사랑하는 이가 다른 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확인하는 생성의 과정이다. 그래서 '망(亡)'자는 잃은 자가 아니라 '망(望)'자로서, 산 자들의 바람으로 회귀한다. <생일>은 그 '망(望)'자에 대한 사려 깊은 '애도'다.
 
나는 몇 년 전 세월호 유가족을 <금요일에 돌아오렴> 북 콘서트에서 보았다.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한 채로 불편하게 움직이는 분도 있었다. 무대 위에서 겨우 증언을 이어가던 그들이 영화 속에 있었다. 그들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다.

<생일>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어떤 메시지 없이, 그날 '세월호'가 인간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갔는지를 전한다. 그리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 지도. 나는 망각 속에 가두었던 언니와 다시 마주해 보려 한다. 모두 잊기로 작정한 가족들에게, 죽음보다 더 쓸쓸했을 언니. 그녀에 대한 기억을 다시 길어 올린다. 뒤늦은 나의 '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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