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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무엇일까. 부모란 무엇일까. 꼭 혈연으로 맺어져야만 가족인가. 낳으면 다 부모가 되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소설 <좀도둑 가족>(영화 <어느 가족>)을 읽고 난 후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는 질문들이다.

영화 <환상의 빛>으로 데뷔한 이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걸어도 걸어도> <태풍이 지나가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스크린에 담아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10년의 고민을 녹여 <좀도둑 가족>(국내 개봉 제목은 <어느 가족>)을 발표했다.

릴리 프랭키, 안도 사쿠라, 기키 기린 등 명배우들의 열연에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섬세한 연출로 완성된 <어느 가족>은 제71회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역대 고레에다 감독 영화 중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작품성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좀도둑 가족>은 영화를 찍는 일 못지않게 글쓰기도 즐긴다는 고레에다 감독이 영화 <어느 가족>을 직접 소설화한 영화소설이다.
 

『좀도둑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비채(2018)
  『좀도둑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비채(2018)
ⓒ 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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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에서 한 집에 모여 사는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이지만, 이들 중 누구도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다. 단지 원가족에서 버림받은 이들이 우연히 모여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상처 입은 자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처럼.

배우자의 외도, 가정 폭력, 부모의 무관심, 아동 학대 등으로 버려진 이들이 함께 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복잡한 심정이 되는데, 다수가 평범하다고 여기는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사는 나로서는 이들을 무조건 옹호할 수도, 그렇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소설과 영화에서 보여주는 모습만 봐서는 그들의 삶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무슨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배운 것 없고 가난하지만 함께 있을 때 행복해 보인다.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한 사람의 인격체로 서로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이게 바로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라는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단 한가지 그들을 옹호하기 힘든 이유를 들자면 그들이 도둑질을 한다는 것이다. 대단한 범죄로 보이지는 않는 시시한 좀도둑질일 뿐이지만 엄연히 범죄이기 때문이다. 이 가족에서 아빠 역할을 하는 오사무도 공사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을 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게으르고 돈을 벌고자 하는 의욕도 없이 일상적으로 좀도둑질을 하기 일쑤다. 엄마 역할을 하는 노부요만이 성실하게 일한다.
 
오사무가 딱히 친절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노부요는 알고 있었다. 아니, 백 번 양보해서 친절함이라 한대도 거기에 책임감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이 남자의 성격인 것이다.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런 순간의 연속이 그의 인생이었다. 다시 말해 어제를 반성하는 오늘도, 내일을 전망하는 오늘도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이 즐거우면 그만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어린아이 같은 것이다. 진짜 아이라면 그래도 충분하겠지만 쉰 가까이 먹은 주제에 '오늘'만 되풀이하면 생활이 얼마만큼 궁핍해질까. 그 전형 같은 비탈길 굴러떨어지기가 십 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28쪽)

오사무의 그 무책임한 친절함과 노부요의 어릴 적 트라우마가 합쳐져 그들은 근처에 아동학대를 받고 있는 다섯 살 소녀 '쥬리'를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산다. 그 소녀에게는 '린'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준다. 이곳에서는 '린'도 더 이상 어른들에게 맞지 않으며, 여느 아이들처럼 뛰어 놀기도 하고, 예쁘게 웃기도 하며 즐겁게 지낸다.

'린'이라는 존재가 그들의 오래된 상처를 치유해주기도 하고, 이들을 더 진짜 가족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 '린'을 유괴한 사실과 함께 살던 할머니 '하쓰에'의 시신을 묻은 '시신 유기'가 죄가 되어 이들의 발목을 잡고 이 가족은 해체된다.
 
"시신 유기는 죄가 무거워요. 알고 있죠?"
"버린 게 아니에요."
노부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야베는 지금의 대답을 포함한 노부요의 반항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버렸잖아요."
미야베는 노부요처럼 죄의식이 낮은 범죄자가 특히 더 싫었다.
노부요도 싫었다. 정의를 내세우며 단죄하고, 사람의 도리를 있는 대로 설파하는 미야베 같은 인간은.
"주운 거예요……"
노부요가 한 말의 의미를 미야베는 알지 못했다.
"누군가 버린 걸 주운 거예요. 버린 사람은 따로 있지 않나요?"

우리가 대체 누구를 버렸다는 말인가. 아들 부부에게 버림받은 하쓰에와 함께 살고, 살 곳을 잃은 아키에게 있을 곳을 제공하고, 방치되어 죽었을지도 모르는 쇼타와 린을 보호했다. 만일 그것이 죄라면, 그들을 버린 사람들에게는 더 무거운 죄를 물어야 하는 게 아닌가.
노부요는 미야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 같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만.'
노부요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226~227쪽)

이 가족이 공중분해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그러니까 '평범한 기득권층'을 지키려고 만든 법과 제도가 또 다른 누구를 소외 시키고, 그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가 쉽게 '정의'라고 여기는 그 편협한 생각이 너무 쉽게 소외된 이들에 대한 몰이해로 이어지는 건 아닌지.

린은 결국 자신을 학대하던 원래의 가족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학대는 계속 이어진다. 아이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단지 많은 어른들이 친부모에게 돌아가는 것이 맞다고 판단하여 다시 그 폭력 안으로 돌려보내지는 것이다. 아이가 겪어내야 할 고통에 어른들은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그 순간 아이의 부모를 욕하고 아이를 불쌍해하는 것 이상의 그 어떤 행동도 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고, 의욕이 있다 하여도 그 아이를 구해내기 위해 거쳐야 할 복잡한 절차와 장애물이 너무 많아 지레 포기하게 된다.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만이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일까? 혈연이라는 단단한 끈이 분명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나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만, 또 다른 어떤 이에게는 그 핏줄이라는 것이 평생 자신을 괴롭히는 족쇄가 된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나의 존재를 부정당하며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삶이 이어지고, 끝끝내 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 바로 그 대단한 핏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를 비난하지도 않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그저 끈질기게 우리의 눈을 응시하며 진지하게 묻는다. 무능하고 가진 것 없는 자들이지만 서로 보듬어주고 존중하며 사는 이들이 가족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냐고. 당신들이 옳다고 믿는 그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모여 사는 풍경은 지금 어떤 모습이냐고.
 
스위미가 알려주었다.
절대 흩어지면 안 되며 각자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
모두가 한 마리의 큰 물고기처럼 헤엄치게 됐을 때 스위미가 말했다.
"내가 눈이 될게"라고.
아침의 차가운 물속을
한낮의 반짝이는 빛 속을
하나가 되어 헤엄쳐서 커다란 물고기를 내쫓았다.

오사무-"그거 잘 됐네."
쇼타-"하지만 큰 물고기가 불쌍해."
오사무-"아니야, 친구들을 잡아먹었다잖아."
쇼타-"그렇긴 하지만……"(영화 <어느 가족> 중에서)

좀도둑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비채(2018)


태그:#좀도둑가족, #어느가족, #고레에다히로카즈,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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