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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길을 떠나고 싶다. 겨우내 닫아놓았던 창문을 열어젖히듯. 두터운 옷에 갇혀있던 피부에 신선한 바람을 쏘이기 위한 열망이다. 지난달은 '남도한바퀴'를 타고 쑥섬 별정원에 다녀왔다. 그 다음 주는 친구부부와 함께 미황사 달마고도를 7시간이나 걸었다. 지난주는 몇 년째 버킷리스트였던 제주 용오름, 다랑쉬 오름에 이어 머체왓 숲길, 우도 올레길을 며칠 돌았다.
 
지금 한국은 여행 열풍이다. 사진은 제주 오름.
 지금 한국은 여행 열풍이다. 사진은 제주 오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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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을 때마다 생각나는 물음이 있다. 5년 전 제주 올레길 여행 때 들은 말이다.

"왜 비싼 돈 들여 여기까지 걸으러 오지요?"

'60세 되도록 제주고향을 떠나본 일이 없다'는 애월읍 택시기사는 특별할 것도 없는(?) 길을 걸으러 멀리 육지에서 기를 쓰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혼자 웃으며 중얼거린 말이지만 나에겐 물음으로 들렸다.

사실은 답이 필요 없는 물음이다. 짙푸른 바다. 까만 돌담선, 새하얀 백사장, 노란 유채꽃 들판, 봉긋한 오름들, 가슴 시원한 바람까지. 말해보았자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못 느낀다. 바로 옆에 사는 고향 사람도 그 아름다움을 모를 수 있다.

20년 세월을 옥방에서 보냈던 신영복 교수(1941~2016)는 <담론>에서 "아름다움은 '앎', '알다', '깨닫다'이며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모름다움'"이라고 뜻을 새긴다.

오래 전 유명화가가 신문에 쓴 이야기가 기억난다. 영감(靈感)이 꽉 막힌 유명화가는 무작정 집을 나선다. 발길 닿는 대로 3개월이나 헤매다가 지쳐 집으로 돌아와 황혼녘 집 앞 텃밭을 지나며 노을빛을 받아 빛나는 옥수수를 보자 환호한다. 바로 집 앞에 영감의 근원을 놓아두고, 멀리 멀리 헤매고 다녔구나! 매일 산보하던 그 텃밭에 특별할 것도 없는 옥수수가 화가의 오감에 번뜩 영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신영복교수가 새긴 대로 '모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발길 닿는 대로 헤매던 '방황 3개월'이 없었다면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 방황은 목적지가 없는 여행이다. 목적이 무엇인지 자신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 여행이다.

'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날까?'를 생각하며 <여행의 이유>를 썼다는 김영하 작가는 "견디기 힘든 난제를 만났을 때 삼십육계 줄행랑치듯 달아나라. 소중한 여행일수록 오히려 계획 세우지 말고 이곳저곳 헤매보라"고 권한다. 방황하라는 말 같다.

지금 한국은 여행 열풍이다. 최근 통계는 지난 한해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10년 전에 비해 2.4배나 되는 3천만 명을 넘었다고 발표했다. 국내여행은 물론 더할 거다. 여행산문집 <여행의 이유>는 한 달 만에 10만부나 팔렸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방황여행'은 여행자의 로망이다. 마치 방랑자 노래 "방랑자여 방랑자여 기타를 울려라 / 방랑자여 방랑자여 노래를 불러라"가 들리는 듯하다.

돈과 시간 눈치를 보아야 하는 소시민에겐 방황 여행은 꿈이다. '오름의 여왕'이라는 다랑쉬 오름(月郞峰 ; 높이 382m)의 가파른 계단(비고 227m)을 숨차게 오르며 '비싼 돈 들이며 왜 여기까지 와서 걷는가?' 스스로 물어본다. 40여 분 오르자 하늘과 맞닿은 굼부리 둘레 한 점에 올라선다. 달처럼 둥그런 다랑쉬 굼부리는 백록담 깊이(115m)같은 깊은 속을 가지고 있다.

시인 이성복은 사진에세이 <오름오르다>에서 "오름에는 정상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오름의 정상은 굼부리의 깊은 내부에 있다"라고 말했다. 분화구 속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정상을 아래로 굽어보며 "솟아오름과 흘러내림의 경계인 둥근 가장자리"를 느릿느릿 걷는다. 동네 야산 같은 오름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 아닐까?

정상이 따로 없는 오름은 정복될 수 없다. 멀리 초록 평원 건너 성산일출봉이 아스라이 떠있다. 싱그런 바람을 가슴 가득 들이킨다. 둥근 굼부리를 30여 분 산보하듯 걷다보니 원점이다.

태그:#올레, #방황, #여행의 이유, #정상, #다랑쉬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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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글로 쓰면 길이 보인다'는 가치를 후학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인재육성아카데미에서 '글쓰기특강'과 맨토링을 하면서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발간했습니다. 기자생활 30년(광주일보편집국장역임), 광주비엔날레사무총장4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서당에 다니며 고문진보,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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