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자식들 포스터

▲ 덴마크의 자식들 포스터 ⓒ 전주국제영화제

  
한 명의 선구자가 길을 내면 뒤따르는 이들이 길을 넓힌다. 흔들리는 카메라로 소외된 인물의 뒤를 쫓는 다르덴 형제의 뒤에도 이들이 낸 길을 따르는 후배들이 있다. 다르덴 형제와 그의 방식을 좇는 후배들의 지향은 이것이다. 겪어보지도 살아보지도 않아 알지 못하는 어떤 삶을 관객 앞에 내보여 알게 하는 것, 그로부터 어떤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첫 장편 <덴마크의 자식들>로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울라 살림도 그 가운데 하나다. 살림은 전주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이 영화로 스스로가 다르덴 형제의 후배임을 입증했다. 실제 현상에서 모티브를 얻은 점이나 소외된 인물의 뒤를 불안정한 카메라로 따르는 것이 꼭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줄거리는 이렇다. 덴마크 코펜하겐 어느 지하철역에서 폭탄이 터져 사람들이 죽고 다친다. 이 끔찍한 테러는 이슬람 계통 이민자 소행으로 밝혀지는데, 이후 덴마크 사회엔 급격한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급진주의와 폭력, 인종차별이 퍼져나가고 극우정당이 득세하며 당수 마르틴 노르달(라스무스 브예르 분)이 유력한 정치인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영화는 시리아계 덴마크 청년 사카리아(모함메드 이스마일 모함메드 분)가 덴마크 극우단체에 대항하는 이민자 단체에 가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이곳에서 알리(자키 유세프 분)라 불리는 사내와 유대감을 쌓는데, 알리는 무엇 때문인지 수차례에 걸쳐 사카리아를 단체에서 내보내려 시도한다.
 
하지만 급진적 사상에 경도된 사카리아는 좀처럼 알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리고 조직은 사카리아에게 노르달의 암살을 지시하고 알리는 그를 돕는 임무를 맡아 뒤를 따른다.

영화가 그린 덴마크의 충격적 현실
 
덴마크의 자식들 영화의 한 장면.

▲ 덴마크의 자식들 영화의 한 장면. ⓒ 전주국제영화제

  
노르달을 암살하기 위해 그의 집에 잠입한 사카리아. 그러나 여기서 영화는 충격적인 반전을 내보인다. 알고 보니 알리가 조직에 잠입한 경찰이었다는 것이다. 알리의 첩보를 받아 경찰이 들이닥치자 사카리아가 저항을 시도하지만 알리가 바꿔치기한 가짜 총이 발사될 리 만무하다.
 
이후 영화는 알리를 주인공 삼아 그의 뒤를 따른다. 사카리아와 마찬가지로 중동계 이민자인 알리는 유능한 경찰이지만 덴마크 사회에 급진주의가 만연해지며 내적 갈등을 느낀다. 중동계 여성 이민자가 염산테러에 잇달아 노출되고 후미진 골목에는 이민자를 추방하라는 공격적 문구로 도배된다. 어느 날인가는 아예 알리의 집 앞에 잘린 돼지머리와 그 피로 쓴 낙서가 발견되기까지 한다.
 
반면 알리의 도움으로 살아난 노르달은 승승장구, 마침내 유력한 총리 후보자로까지 떠오른다. 선거가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온 시점, 알리는 노르달이 무차별 테러를 자행하는 극우폭력단체와 연관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한다.
 
영화는 알리의 뒤를 따르며 노르달을 둘러싼 상황의 부조리함을 조금씩 내보인다. 덴마크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폭력, 그로부터 위기를 느끼는 알리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덴마크 사회의 민낯이 어떤 모습인지를 가감 없이 일깨운다.
 
실제 덴마크 사회는 반 무슬림과 난민수용 반대를 주장하는 극우정당이 국회의장까지 배출하는 성과를 올렸다. 중동 지역으로부터 난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데다 경제상황도 과거에 비해 좋지 못해 벌어지는 현상으로 풀이된다.

극우단체의 탄생과 성장
 
디스 이즈 잉글랜드 극우성향의 스킨헤드 콤보 역을 맡은 배우 스티븐 그레이엄.

▲ 디스 이즈 잉글랜드 극우성향의 스킨헤드 콤보 역을 맡은 배우 스티븐 그레이엄. ⓒ 백두대간

  
반 무슬림·반 이민정책을 기치로 내건 극우정당의 득세는 덴마크만의 일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미국을 비롯해 이탈리아와 독일, 핀란드 등에서도 극우정치세력이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이탈리아 극우정당 '동맹'은 아예 유럽 내 극우정당들과 합세해 유럽의회 내에서도 극우성향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세력을 주도해 만들기까지 했다.
 
이들의 요구는 단 하나의 메시지로 요약된다. 국가를 그 국가 주요 민족구성원의 것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민자를 내쫓고 난민을 받아서도 안 된다는 식이다. 시민권을 취득한 이들에게 시민권을 박탈하고 내쫓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극 중 노르달이 어느 연설에서 말한 바, "우리가 시민권을 주었으니 우리가 박탈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극히 현실에 바탕한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수차례 2006년 영국에서 제작된 <디스 이즈 잉글랜드>가 떠올랐다. <디스 이즈 잉글랜드>는 12살 소년 숀(토머스 터구즈 분)이 스킨헤드 집단에 들어가 마주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지난 십수 년 간 영국사회가 겪었을 사회문화적 변화를 짚어낸 영화로, 극우단체의 탄생과 성장을 보여주는 무거운 작품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콤보(스티븐 그레이엄 분)란 인물은 극우 스킨헤드로 동료들에게 영국사회에서 이민자를 몰아내고 순수한 영국인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콤보의 사상에 경도된 동료들은 이주노동자가 운영하는 가게를 터는 등 폭력적인 행각을 이어간다.

<덴마크의 자식들>은 <디스 이즈 잉글랜드>보다 한층 진화한 폭력을 드러낸다. <디스 이즈 잉글랜드>에선 주류에 들지 못한 목소리였던 극우정치세력이 <덴마크의 자식들>에선 유력한 정치인을 탄생시킨다. 반면 시간과 국경을 초월해 이들이 내는 목소리는 놀랄 만큼 같다. 영화 속 노르달은 연설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 순간 우리는 덴마크의 문제는 덴마크인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저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덴마크를 되찾을 것임을 저들에게 증명했습니다!"
 
여기서 덴마크를 영국으로 고치면, 다른 스킨헤드 앞에서 했던 콤보의 연설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누구 하나쯤은 생각이 바뀌었을 것이다
 
덴마크의 자식들 중동계 이민자 조직에 가입한 사카리아(모함메드 이스마일 모함메드 분)와 알리(자키 유세프 분).

▲ 덴마크의 자식들 중동계 이민자 조직에 가입한 사카리아(모함메드 이스마일 모함메드 분)와 알리(자키 유세프 분). ⓒ 전주국제영화제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이 발생하는 나라인 예멘에서 500명이 넘는 난민이 제주도로 입국해 난민 지위 신청을 한 일이 있었다. 유엔 난민협약에 서명했고 난민법까지 따로 제정해두고 있는 한국이지만, 난민이 발생하는 국가들과 거리가 있는 덕에 난민 문제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었던 게 사실이다.
 
언론을 통해 난민 수용 문제가 큰 이슈로 떠오른 뒤 이뤄진 대부분의 설문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난민에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대의 경우엔 더욱 그랬다. 만약 한국에 난민이 쏟아져 들어온다면 영화 속 덴마크나 영국에서 벌어진 일과 다른 결과가 나오리란 법이 없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 모른다.
 
<덴마크의 자식들>은 살림이 많은 부분을 빌려온 다르덴 형제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분명한 답을 요구하고 있다. 온 힘을 다해 누구의 삶을 관객 앞에 내보인 뒤, 그에게 명확한 입장을 요구하는 게 이 영화가 선택한 방식이다.
 
나는 이 영화의 끝에서 적어도 누구 하나쯤의 생각은 바뀌었으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나아가 어쩌면 언젠가 살림의 영화가 이 세상을 조금쯤 바꿔낼 것이라고도 기대하게 되었다. 마치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보았을 때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시민기자의 팟캐스트(http://www.podbbang.com/ch/7703)에서 다양한 영화이야기를 즐겨보세요.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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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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