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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로 울려퍼지는 격양된 목소리에 나의 양 볼이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몇 번을 얘기하노? 냉장고 하나 싣고 오면서 갖은 생색은 있는 대로 다 내야하나?"
"엄마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차가 작으니깐 부피 때문에 안 실리면 못 가져갈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자그마치 15년이 넘은 김치냉장고인데 기능을 생각해서라도 이거 얼마 안 하는데 이참에 새걸로다가..."
"실어보지도 않고 안 될 거라 생각하노? 그리고 너희는 물건 버리는 게 그렇게 쉽나? 원래 할머니집에 있는 거 관사 생활한다고 잠시 빌려온 건데... 덕분에 잘 사용한 거 도로 갖다 놓으라 했더니 차일피일 미루다가 쓸데없는 말만 하고 있고... 잔말 말고 실어서 출발할 때 전화해라."

통화가 툭 하고 끊겼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호통을 고집이라 치부하며 혀를 내둘렀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연휴를 맞이하여 고속도로는 수많은 차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마치 답답한 내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 했다.

결혼식 참석으로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시간을 보낸 후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관사 앞으로 오후 4시까지 늦지 않게 도착해라. 매형도 차 가지고 시간 맞춰 오기로 했다."
"나 집에 안 갈 거다."

확고한 거절 의사를 밝힌 동생은 나의 회유에도 요지부동이었다. 이유인 즉슨 점심식사 무렵 엄마에게 전화를 건 동생이 문제의 냉장고를 언급한 것이 화근이었다. 짐만 되는 오래된 물건 때문에 누나, 매형을 번거롭게 하는 것 아니냐며 이미 나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운 엄마의 심기에 기름을 부어버린 격이 된 것이다.

결국 일방적인 엄마의 질타에 잔뜩 주눅이 든 동생은 자신이 늘 만만한 화풀이 대상이라며 수화기 너머로 씩씩 거렸다.

냉장고와의 첫만남

2년 전 부산지역으로 발령을 받은 나는 회사에서 제공해 준 관사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비록 갖춰진 살림 도구들을 없었지만 발품 팔고 중고로 물건들을 구입해가며 사람의 온기가 느껴질 만큼의 세간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때 동원된 물건 중 하나가 지금 논란의 중심이 된 김치냉장고이다. 냉장, 냉동 기능이 애매한 이 물건을 향해 엄마는 매번 집을 드나들며 국, 반찬을 담아 차곡차곡 정성을 쌓아올리셨다.

나는 오밤중 출출한 배를 달래려 라면을 끓이고 냉장고에 손을 뻗어 잘 익은 신 김치를 꺼내먹었으며, 한여름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냉장고 속에 얼려진 시원한 포도즙을 꺼내먹으며 무더위를 날려버리곤 했다.

그렇게 이따금씩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내 기억속에 김치냉장고를 소환해보았다. 마침내 나는 귀차니즘과 무지함이 빚어낸 한바탕 소동의 해결점을 찾기 위해서 눈 앞에 어른거리는 지난 잔상들을 끌어안기로 결정했다.

냉장고 이사

나는 동생에게 군말 말고 제시간에 맞춰 관사로 와줄 것을 거듭 강조했다. 예비신랑과 동생이 오늘의 짐꾼으로 투입되었다. 현관 문을 열자 부엌 안쪽 깊숙이 자리잡은 낡고 빚바랜 김치냉장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전기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으면 빨간 등불 하나가 멋없게 켜진다. 그리고 동시에 '윙' 하고 단조로운 소리를 반복해서 낸다.

우리는 김치냉장고를 들고 영차영차 구호소리를 내며 3층 계단을 내려왔다. 다음으로 조수석을 바짝 당긴 후 물건을 조심스럽게 눕혀 차량 뒷자석에 실었다. 출발 전 전화로 냉장고를 무사히 싣고 집으로 향한다고 엄마에게 알렸다. 그리고 고향에 도착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엄마를 모시고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약간의 어색했던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엄마가 물건 싣느라 고생했다며 운전 중이던 예비신랑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엄마를 향해 등을 돌리며 말했다.

"이상한 변명하면서 안 가지고 오려 했던 거 미안해, 아직 작동도 잘 되는데. 내가 경솔했다. 반성할게."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엄마는 진심 담긴 내 사과에 마음이 누그러진 듯 했다.

"안그래도 이것저것 신경 쓸거 많아서 예민한 데다 너희들까지 너무 쉽게 버리면 된다고 말하니깐 엄마도 감정이 상해서 언성이 높아졌다. 조금 더 생각하고 다 같이 수고로움을 안으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인데... 외관 상태도 양호하고 더군다나 성능에 하자도 없는데... 사용 가능한 물건은 오래될수록 그 가치를 더하는 법이다. 다들 명심해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잠시 후 할머니집에 도착한 우리는 엄마의 전두지휘 아래 김치냉장고를 무사히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았다. 지난 2년 간 관사에서 동고동락하며 제 역할을 묵묵히 해준 믿음직스러운 녀석을 내 손에서 완전히 떠나보내니 해방감보단 되려 섭섭함이 느껴졌다.

늦은 오후 저무는 햇살을 등에 지고 우리는 마루에 나란히 걸터 앉았다. 김치냉장고는 다시 이곳에서 어떤 사연이 깃든 음식들을 저장해 놓을까? 그리고 또 누군가를 위해 풍성하고 신선한 이야기들을 식탁 위로 내어주게 될까? 문득 앞으로의 녀석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태그:#냉장고, #2년의 동고동락, #관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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