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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3.1 운동 후인 1920년 6월 조선 독립운동가 100여 명은 조선교육회를 만든다. 조선교육회는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는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하고 인재를 기르기 위해 '대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제는 조선인에 의한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막기 위해 1923년부터 '경성제국대학' 설립을 추진, 1924년 5월에는 예과를, 1926년 5월에는 본과를 개설했다. 

당시 일본의 학제는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 고등학교 3년 또는 대학 예과 3년, 대학 학부 3년, 이른바 6-5-3-3 학제로 이뤄져 있었다. 고등학교는 일본 본토에만 설립했고 조선에는 설립하지 않았다. 본토의 다른 제국대학에 두지 않은 '예과'를 경성제국대학에 설치한 이유는 조선에 고등학교를 단 하나도 설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대 총장으로는 도쿄제국대학 교수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가 부임한다. 핫토리 우노키치를 포함해 7명의 총장이 경성제국대학을 거쳐갔고 모두 일본인이었다. 경성제대 7명의 총장 중 네 명은 조선사편수회 고문을 겸했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어용학술단체로 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사>를 편찬해서 보급했다. 총장이 조선사편수회 고문을 겸했다는 건 경성제국대학이 역사 왜곡을 비롯한 학술 연구로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래는 조선제국대학으로 설립을 준비하다가 조선제국이 독립된 나라처럼 보일 수 있다는 우려가 있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일제가 도쿄, 교토, 도호쿠, 규슈, 홋카이도에 이어 여섯 번째 설립한 제국대학이다. 경성제국대학이 지향한 이념도 '동양문화연구'와 '국가를 위한 학문'이었다. 대동아공영권과 대일본제국 건설에 복무하는 대학과 학문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한 이유 
 
서울대학교 동숭동 옛 캠퍼스를 1/100로 줄여서 만든 기념비다. 주택공사가 1천6백만 원을 들여 만들었고 1976년 12월 16일 제막식을 통해 공개했다. 경성제국대학과 서울대학교 옛터에 조성한 공원 이름이 마로니에인 이유는 마로니에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마로니에 나무는 경성제국대학 시절 일본인 교수가 심었다는 설과 경성제대 불문학 강사였던 프랑스 신부가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는 설이 있다.
▲ 마로니에 공원에 남아 있는 서울대학교 유적기념비 서울대학교 동숭동 옛 캠퍼스를 1/100로 줄여서 만든 기념비다. 주택공사가 1천6백만 원을 들여 만들었고 1976년 12월 16일 제막식을 통해 공개했다. 경성제국대학과 서울대학교 옛터에 조성한 공원 이름이 마로니에인 이유는 마로니에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마로니에 나무는 경성제국대학 시절 일본인 교수가 심었다는 설과 경성제대 불문학 강사였던 프랑스 신부가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는 설이 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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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취지가 이렇다 보니 학문 공동체가 아닌 '친일 인재 양성소'로 기능했다는 비판이 따랐다. 해방 후 경성제국대학 부지와 시설, 학생, 인력을 그대로 이어받아 국립 서울대학교가 탄생한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학교는 식민지 통치에 복무하고 친일 인재 양성소로 기능한 과거를 자기 비판과 혁신을 통해 단절하지 못했다는 평을 듣게 된다. 

일제는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봉쇄할 목적으로 경성제국대학 안에 정치, 경제 분야 학부는 아예 설치하지 않았다. 식민통치에 필요한 인재를 배출할 목적으로 법문학부와 의학부만 설치했다. 교육 공급자 편의대로 문과와 이과로 나눠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가 이때 이식됐다. 이공학부도 1941년 1월 1일 신설했는데, 조선의 공업기술 발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 확대에 대비해 군수공업 인재를 키우기 위함이었다. 

교수와 학생 구성에서도 조선인은 차별을 받았다. 경성제국대학 설립 당시 전체 교수 57명 중 5명만 조선인이고, 학생 역시 조선인은 168명 중 44명에 불과했다. 직원 수도 조선인에 비해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입학생이 적다 보니 졸업생도 많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경성제국대학 졸업생 810명뿐이었다.

일제는 조선과 타이완 두 곳의 식민지에 제국대학을 세웠는데, 사실상 일본인을 위한 학교였다. 패전 후 경성제국대학과 타이페이제국대학(臺北帝國大學)에 다니던 일본 학생은 본토 제국대학으로의 전·입학을 인정받았고 교직원의 대다수도 일본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성제국대학은 타이완에 세운 타이페이제국대학을 제외하고 일본 내 다른 제국대학에 비해 학생 수가 적었다. 타이페이제국대학의 경우 학생 수는 경성제국대학보다 적었지만 다섯 개 학부를 갖추고 더 많은 예산을 사용했다. 

경성제국대학이 지어진 자리에 대해 '야사'가 전해 온다. 무학대사는 한양을 조선의 새 도읍으로 추천하면서 인왕산을 등지고 동향으로 궁을 지을 것을 주장했다. 더불어 북악을 주산으로 삼아 남향으로 궁을 지을 때 벌어질 여러 가지 일을 예언했다. 그중 하나가 낙산 아래에서 인재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했는데, 경성제국대학에 이어 서울대학교가 이곳에 자리할 것을 알았던 걸까.  

또 하나,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데려온 지관(地官)이 조선총독부 자리로 추천했던 자리가 이곳이라고 한다. 1911년 일본 건축가들이 조선총독부 자리로 제안한 곳도 동숭동 경성제국대학 자리와 경성부청, 즉 지금의 서울도서관 자리다. 훗날 일제는 경복궁에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지관과 일본 건축가가 추천한 동숭동에는 경성제국대학을 세웠다. '조선의 머리를 휘어잡자'는 취지였다고 하는데, 경성제대가 해방 후 국립 서울대학교로 이어질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걸까. 

실제로 경성제국대학 부지로 영등포, 노량진, 청량리 같은 여러 곳이 후보에 올랐지만 경기도립상업학교와 총독부의원이 있던 동숭동 땅 9만 평이 최종 낙점됐다. 경성제국대학의 총 공사비 예산은 1기와 2기를 합쳐 310만원. 1923년 민영휘가 기부한 1만 원으로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이 2층 건물을 신축했음을 생각할 때 경성제대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학교 교사 설계는 조선총독부 토목국 건축과 이와츠키(岩槻) 기사가 맡아, 콘크리트 골조에 벽돌을 쌓은 후 황갈색 타일을 발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의 탄생
 
운동장(배치도에 있지만 운동장은 만들어지지 않고 공터로 남았다) 아래 산(山) 자 모양의 건물이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다. 부속도서관과 마주보고 있는 건물이 지금도 남아있는 경성제국대학 본관이다(지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가의 집'으로 쓰인다). ㄷ자 모양의 건물은 법문학부 건물이다. 지금 남아있는 본관과 비교해보면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건물이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 경성제국대학 배치도 운동장(배치도에 있지만 운동장은 만들어지지 않고 공터로 남았다) 아래 산(山) 자 모양의 건물이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다. 부속도서관과 마주보고 있는 건물이 지금도 남아있는 경성제국대학 본관이다(지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가의 집"으로 쓰인다). ㄷ자 모양의 건물은 법문학부 건물이다. 지금 남아있는 본관과 비교해보면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건물이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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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은 1926년 본과 개설을 앞두고 직원을 대거 충원할 때 도서관 책임자인 사서관 1명, 실무자인 사서 2명을 함께 채용했다. 도서관장은 교수, 조교수, 사서관 중에 조선 총독이 임명했다. 이 과정을 통해 1926년 4월 20일 법문학부 조선어·조선어학 제2강좌 교수인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가 초대 도서관장으로 취임했고, 7월에는 초대 사서관으로 테라사와 치료(寺澤智了)가, 사서에는 세키노 신키치(關野眞吉)가 채용됐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전신(前身) 경성제국대학 부속 도서관은 언제 문을 열었을까? 1927년 8월 27일 부속도서관 건물 일부가 준공되면서 도서관 업무를 시작했다. 1930년 완공된 도서관은 총 1491평 중 519평은 사무실과 열람실로, 392평은 서고, 나머지 공간은 법문학부 연구실로 썼다. 

도서관 열람은 1927년 시점부터 시작했고 이용통계도 이때부터 집계했다. 교수의 도서 장기 대출로 학생들의 불만이 많았고 규장각 도서는 외부 조선인 학자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경성제국대학 장서는 부속도서관 외에 예과, 의학부, 연구실 산하 도서실로 나누어 관리했다. 1938년 초에는 열람실과 서고를 갖춘 예과 도서실을 새로 지었다. 

도서관 조직은 처음엔 서무계, 수입계, 목록계, 함가계, 대출계, 서고계 같은 6개 부서를 두었고, 1939년에는 9개 부서로 늘렸다. 도서관 직제는 도서관장 - 사서관 - 사서 - 서기 - 촉탁 - 고원으로 구성했다. 도서관장부터 서기까지 핵심 인력은 모두 일본인으로만 구성하고 조선인은 촉탁과 고원으로만 채용했다. 

해방이 될 때까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는 조선인 사서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점은 철도도서관과 유사하며 조선총독부도서관과 다른 점이다. 해방 직전 조선총독부도서관은 관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은 대부분 조선인으로 구성했던 걸로 알려져 있다. 경성제대 도서관의 경우 촉탁으로 일한 조선인도 경성제국대학이나 일본제국대학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촉탁 외에 10~25명 정도의 조선인이 고원으로 일했다. 

1928년 6월 12일부터 1940년 1월 9일까지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촉탁으로 일한 김진섭은 조선인 중 가장 오랫동안 도서관 직원으로 일한 사람이다. 수필 분야를 개척한 사람으로 유명한 김진섭은 해방 후 서울대학교가 출범하면서 초대 도서관장이 된다(1946년 10월~1947년 5월). 서울대학교 출범 후 도서관 초대 부관장, 2대 관장으로 넘어가기 전 관장 대리를 지낸 김구경도 1927년 4월 8일부터 경성제대 도서관에서 고원으로 일했다. 

1959년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학과를 설립해서 1985년 정년 퇴임한 '도서관 할머니' 이봉순도 1940년부터 1942년까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고원으로 일했다.

이봉순은 양서부 주임 세키노 사서에게 일을 배웠는데, 시인을 꿈꾸던 영문학도가 사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일한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해방 후 대학도서관 분야에서 주축이 된 사람들이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출신이라는 건 눈여겨볼 대목이다. 

제국대학 도서관을 그대로 이식한 경성제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도쿄제국대학 부속도서관 규정과 제도, 운영을 그대로 이식했다. 도쿄제국대학은 1886년 가장 처음 설립된 제국대학이다. 유일한 제국대학이었기 때문에 학교 이름도 제국대학이었다. 제국대학 이름이 도쿄제국대학으로 바뀐 것은 1897년 교토제국대학이 설립되면서부터다. 도쿄제국대학을 비롯한 제국대학은 태평양전쟁 패전 후 연합군 총사령부(GHQ)에 의해 국립대학으로 전환된다. 전환 후 도쿄제국대학은 도쿄대학교(University of Tokyo)로 이름이 바뀐다. 약칭은 토다이(東大). 사진 속 도쿄대 야스다강당은 일본 학생운동사에서 유명한 전공투 사건의 배경이 된 곳으로 경성제국대학 설립 시기인 1925년 지어진 건물이다.
▲ 도쿄대학교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도쿄제국대학 부속도서관 규정과 제도, 운영을 그대로 이식했다. 도쿄제국대학은 1886년 가장 처음 설립된 제국대학이다. 유일한 제국대학이었기 때문에 학교 이름도 제국대학이었다. 제국대학 이름이 도쿄제국대학으로 바뀐 것은 1897년 교토제국대학이 설립되면서부터다. 도쿄제국대학을 비롯한 제국대학은 태평양전쟁 패전 후 연합군 총사령부(GHQ)에 의해 국립대학으로 전환된다. 전환 후 도쿄제국대학은 도쿄대학교(University of Tokyo)로 이름이 바뀐다. 약칭은 토다이(東大). 사진 속 도쿄대 야스다강당은 일본 학생운동사에서 유명한 전공투 사건의 배경이 된 곳으로 경성제국대학 설립 시기인 1925년 지어진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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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과 정준영, 이상찬의 연구를 바탕으로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규정은 일본 '제국대학 도서관 규정'을 거의 그대로 적용했다. 경성제대 도서관은 규정뿐 아니라 조직과 운영 모두 도쿄제국대학 부속도서관 방식을 그대로 이식했다. 

1927년 10월 17일부터는 경성제국대학도 제국대학부속도서관협의회에 공식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협의체를 통해 일본 본토와 식민지 제국대학 도서관은 도서관학, 행정, 건축, 조직, 장서 및 특수도서 관리방법을 포함한 도서관 운영과 제도에 관한 거의 모든 사항을 논의했다. 정보 교환뿐 아니라 중복도서를 교환하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경성제국대학은 이 네트워크에서 분리되지만 일본 제국대학부속도서관협의회는 1948년 9월 국립대학부속도서관협의회를 거쳐 1950년 국립7대학부속도서관협의회로 바뀌며 계속 이어졌다. 서울대학교는 1962년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 전북대, 충북대와 함께 국립대학교 도서관장 및 사서장 회의를 발족해서, 1981년 국립대학도서관협의회, 1992년 국공립대학도서관협의회로 명칭을 바꾸며 협의체를 이어오고 있다. 

미군정에 의해 제국대학이 국립대학으로 전환되고 이후 미국식 주립대학을 모델로 설립된 국립대학 도서관이 모여 협의체를 운영하는 것까지, 한일 국립대학 도서관이 걸어온 길은 유사한 부분이 많다.

초대 총장 핫토리 우노키치는 다른 제국대학보다 뒤늦게 설립된 경성제대 도서관이 단기간 내 타 제국대학 장서 수준을 따라잡기 위해 가능하면 복본을 구입하지 않고 다양한 책을 소장하는 원칙을 세웠다. 도서관 장서 구입은 교수에게 일임해서 교수가 신청하거나 직접 구입한 책을 나중에 도서관이 넘겨받는 방식을 취했다. 

식민지 조선 최대의 도서관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은 1927년 건물 일부를 준공해서 운영을 시작했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2층 건물로 증축 공사를 통해 도서관 건물을 계속 확장했다. 계획상으로는 전(田)자 모양 평면으로 도서관 건물을 완성하려 했는데, 산(山)자 모양으로 완공됐다. 이 건물은 1945년 해방 이후 경성대학 도서관,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 출범 이후부터 19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할 때까지 중앙도서관으로 쓰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신축공사 설계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은 1927년 건물 일부를 준공해서 운영을 시작했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2층 건물로 증축 공사를 통해 도서관 건물을 계속 확장했다. 계획상으로는 전(田)자 모양 평면으로 도서관 건물을 완성하려 했는데, 산(山)자 모양으로 완공됐다. 이 건물은 1945년 해방 이후 경성대학 도서관,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 출범 이후부터 19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할 때까지 중앙도서관으로 쓰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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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은 예산의 20%를 도서 구입 예산으로 썼고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조선총독부도서관 도서구입 예산이 8만여 엔일 때 경성제국대학은 그 10배인 80만 엔을 썼다. 이런 적극적인 장서 확보로 1927년 7만 7천여 권이던 장서가 1935년에는 35만여 권으로 5배 가까이 늘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1935년 35만 8천여 권, 1937년 3월 시점에 44만 7833권의 장서를 보유하여 식민지 조선 최대의 도서관으로 성장했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장서는 1935년을 기준으로 당시 3대 사립 전문학교로 꼽히던 연희전문학교(4만 9천 권), 보성전문학교(3만 권), 이화여자전문학교(1만 6천 권) 책을 모두 더한 장서량보다 3.7배 많았다. 조선 안에 있던 관립학교와 사립 전문학교의 모든 장서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해방 시점인 1945년에는 장서량이 55만 권에 이르러 조선총독부도서관의 33만 권보다 22만 권이나 많은 장서량을 자랑했다. 

규모와 장서 면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조선총독부도서관, 철도도서관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3대 도서관'으로 꼽을만하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식민지 조선의 3대 도서관 중 가장 늦게 개관했지만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할 정도로 급속히 성장했다. 흥미로운 것은 가장 많은 장서를 자랑했음에도 하루 이용자는 가장 적은 도서관이었다는 점이다.

식민지 조선 최대 도서관이던 경성제대 부속도서관 장서는 일본 제국 내 도서관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일제는 본토에 7개, 식민지에 2개, 총 9개 제국대학을 세웠는데 제국대학마다 부속도서관을 두었다.

1937년 3월을 기준으로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은 9개 제국대학 중 4위에 해당하는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500여 명이던 경성제국대학 학생 수를 감안하면 학생 1인당 장서 수로는 일본 제국 내에서 가장 많은 도서관이었다. 1937년 당시 일본 제국 본토와 식민지에 장서량 10만 권이 넘는 도서관은 38개였다. 이중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5위에 해당하는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왜 이렇게 방대한 장서를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구축한 걸까? 일제는 경성제국대학을 식민지 조선 경영과 만주 및 대륙 침략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하는 연구 기관으로 양성하려 했다. 경성제국대학은 만주와 대륙, 타이페이제국대학은 남방 침략의 학술 교두보로 삼았다. 경성제대 도서관의 방대한 장서는 이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규장각 장서는 왜 경성제대 도서관으로 옮겼을까?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 소장했던 규장각 장서는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관리하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1962년 11월 규장각 도서의 보존과 활용을 심의하는 규장각도서위원회가 서울대 총장 직속 기관으로 설치됐다.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 후에는 중앙도서관에 규장각 도서 전담관리 부서인 규장각도서관리실을 설치하고 도서관 2층에 특별서고를 마련해서 규장각 장서를 관리했다. 1990년 규장각 전용 건물을 지어 이전했고, 중앙도서관으로부터 분리되어 서울대학교 부속 규장각으로 독립했다. 규장각 초대 관장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다. 2006년 2월 1일 서울대학교는 한국문화연구소와 규장각을 하나로 합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출범시켰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 소장했던 규장각 장서는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관리하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1962년 11월 규장각 도서의 보존과 활용을 심의하는 규장각도서위원회가 서울대 총장 직속 기관으로 설치됐다.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 후에는 중앙도서관에 규장각 도서 전담관리 부서인 규장각도서관리실을 설치하고 도서관 2층에 특별서고를 마련해서 규장각 장서를 관리했다. 1990년 규장각 전용 건물을 지어 이전했고, 중앙도서관으로부터 분리되어 서울대학교 부속 규장각으로 독립했다. 규장각 초대 관장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다. 2006년 2월 1일 서울대학교는 한국문화연구소와 규장각을 하나로 합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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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조선 궁궐 규장각에 있던 각종 희귀 도서를 상당량 소장하고 있었다. 일제는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조선총독부(학무과 분실)가 보유하고 있던 규장각 희귀본 도서 16만여 건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이관한다. 희귀본 중 <조선왕조실록>은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영인본으로 간행되기도 했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은 규장각 장서를 세 차례로 나누어 인수받았다. 조선총독부는 원래 규장각 도서를 경성제국대학에 장기 대여했다가 새로운 서고를 마련해서 돌려받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규장각 장서의 경성제대 이전에 대해서는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우려는 현실이 되어 일제는 규장각 장서를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긴 이후 보존을 이유로 열람을 제한했다. 경성제대로 옮겨진 규장각 장서는 보존과 동떨어진 대접을 받는데, 도서관 신간에 밀려 소사실, 이른바 수위실에 방치되는 신세를 겪기도 했다. 

당시 국가도서관에 해당하는 조선총독부도서관이 따로 있음에도 일제가 규장각 희귀본을 경성제대 도서관으로 넘긴 점은 특기할 만하다. 경성제국대학이 식민지 최고 교육기관일 뿐 아니라 조선 합병의 정당성과 식민 통치의 필연성, 식민 정책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하는 연구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던 희귀본은 해방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진다. 규장각 장서가 지금도 서울대학교에 머무는 건 이 때문이다. 

조선 왕실도서관 장서인 규장각 도서가 '일개'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에 머무는 게 당연한 걸까. 해방 후 국립도서관(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은 민족 문화유산인 규장각 도서를 왜 돌려받지 않았을까.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의 장서
 
관악캠퍼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은 1974년 건축가 이승우가 설계했다.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6층 건물로 3,500석의 열람석과 15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할 수 있는 도서관이다. 1970년대 전세계 대학 캠퍼스에 거칠고 투박한 느낌의 브루털리즘(Brutalism) 사조가 유행처럼 번졌는데,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도 이런 사조를 반영한 건축물이다.
▲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관악캠퍼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은 1974년 건축가 이승우가 설계했다.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6층 건물로 3,500석의 열람석과 15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할 수 있는 도서관이다. 1970년대 전세계 대학 캠퍼스에 거칠고 투박한 느낌의 브루털리즘(Brutalism) 사조가 유행처럼 번졌는데,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도 이런 사조를 반영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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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시점에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55만 권 장서 중 규장각 희귀본 16만 권을 제외하고 동양서를 27만 5천 권을 소장하고 있었다. 서양서는 1937년에 이미 13만 권 이상 소장하고 있었는데, 서양서만 해도 대단한 장서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건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 출범 이후 서울대 도서관이 55만 권 장서를 수집할 때까지 걸린 기간이다. 서울대학교 도서관 장서는 1985년 들어 56만 3343권을 넘어선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 19년 만에 모은 55만 권을 수집하는 데 서울대학교는 39년이나 걸린 것이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걸까? 

그만큼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장서 수집이 대단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서울대학교 장서 수집 속도가 식민지 경성제대 도서관 때와 비교해서 한참 뒤졌음을 알 수 있다. 예산과 자원이 집중된 대한민국 최고 대학도서관의 장서 증가가 이 정도였는데, 다른 대학 도서관은 말해 무엇할까. 

책의 신속한 구입을 위해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독특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마루젠(丸善) 서점 직원이 도서관 안에 상주했다고 하며 이를 통해 교수와 학생, 단체주문에 신속히 대응했다고 한다. 

경성제대 도서관은 마루젠뿐 아니라 조선인 고서 및 서적상으로부터도 책을 수집했다. '책쾌'로 유명한 송신용, 회동서관과 광문사를 운영한 고유상도 경성제대 납품업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경성제대 도서관은 6만 5천 점 가까이 한국 고서를 수집했다.

정병설 서울대 교수는 해방 이후 기증본 외에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한국 고서 수집이 '전무'에 가까웠음을 지적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도 고서 수집을 멈추지 않은 경성제대 도서관과 비교해서 식민 치하보다 못한 이 나라 최고 대학도서관의 고서 수집 '의지'를 개탄하기도 했다.

도서관 장서는 규장각도서, 귀중도서, 통상도서 3가지로 나눴는데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특수도서가 추가됐다. 좌익 사상,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는 책이 특수도서로 지정됐다. 귀중도서, 규장각도서, 특수도서는 본관에 비치하고, 이중 귀중도서 열람은 도서관장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다.

서울대학교가 도서관 소장 도서를 규장각도서, 귀중도서, 일반도서, 특수도서 4가지로 구분하는 건 1992년 6월 19일 도서관 규정을 새롭게 제정할 때까지 이어졌다.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한국 대학도서관의 뿌리에 해당하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태그:#경성제국대학도서관, #경성제국대학, #서울대학교, #도서관,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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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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