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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획은 미국 외교정책의 변천 속에서 동아시아, 한반도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종래 대부분의 연구는 한반도문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논의했다. 이 기획은 반대로 미국외교정책의 특징을 고찰하는 가운데 한반도문제를 살펴본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미국의 외교정책사는 기존 유럽나라들과는 결이 다른 정치문법을 채택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외교정책 상의 변형과 변주, 애매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흐르는 미국외교정책의 내적 핵심과 문법이 있다는 게 필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국과 동아시아, 미국과 한반도 관계의 역동적 변화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 기자말 

 
1945년 2월, 미군과 일본군 사이의 가장 처절한 전투로 기억되는 이오지마(硫?島) 전투에서 미군이 섬을 탈환하는 장면.
▲ "무조건 항복론"의 상징, 이오지마 전투 1945년 2월, 미군과 일본군 사이의 가장 처절한 전투로 기억되는 이오지마(硫?島) 전투에서 미군이 섬을 탈환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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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에 미국은 '문호개방원칙'에 입각해 중국의 주권과 영토를 방어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을 뿐, 한반도문제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무척 힘겨웠다. 만주와 중국에서 일본의 입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강한 입지는 지정학적 인접성에 더해서 조선의 병참기지화,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로 상징되는 탄탄한 경제적 인프라와 함께 관동군으로 상징되는 지속적인 군사력 확충에서 비롯됐다.

일본의 군비 증강은 역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1937년에 24개 사단, 54개 비행중대이던 것이 1941년에는 51개 현역사단, 133개 항공대대로 대폭 증강했다. 개전 직전 일본은 100만 정규군에다 훈련된 200만의 예비 병력을 완비했다. 1937년 중국에는 70만의 일본군이 주둔했다. 도쿄 당국이 이름 붙인 '지나사변'은 하루 전비가 500만 달러나 소요됐기 때문에 일본의 군사비를 대폭 증액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1938년부터 국가배급제를 도입했는데, 이는 일본을 사실상의 '총력전' 동원체제로 밀어 넣은 조치로 간주됐다(Kennedy, 1989:301-302).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일본군은 급격하게 팽창했다. 일본군 총수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8년에 115만, 1939년에 162만, 1941년에 240만, 1942년에 283만, 1943년에 380만, 1944년에 536만, 1945년에 720만으로 급증했다(구태훈, 2010:268).

2차 대전 당시, 10대와 20대, 30대 등 한 세대 남성 전체가 징병대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쟁 승리를 위한 일본군국주의의 집착은 광기에 가까웠다. 일본학계의 천황으로 불렸던 마루야마 마사오 또한 서른 나이에 평양으로 징집됐다가 히로시마에서 피폭 당했다. 사정이 이러할 때, '위안부' 20만 명은 적으면 적었지 결코 충분한 숫자는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최형익, 2015).

태평양 전쟁 개전 초반, 일본의 기세에 눌린 미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바탄 전투에서 패배해서 태평양 사령부가 주둔하던 필리핀에서 호주로 퇴각한 일만 놓고 보더라도 일본의 초기 전쟁수행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미 본토는 2차 대전과 태평양 전쟁의 참화에서 안전했기 때문에 미국은 곧바로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히틀러가 프랑스를 공격할 때만해도 미국을 지배한 외교원칙은 고립주의와 중립이었다. 미국인들은 2차 대전을 미국과는 상관없는 유럽의 전쟁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개정된 중립법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중립법으로 인해 미국은 국적과 상관 없이 교전당사국에 대한 융자와 무기판매 행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 국민이 교전국 선박으로 여행하는 것도 금지됐다. 교전국들은 무엇을 구입하든 현금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영국이 독일군에 공격받자 미국 여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본이 동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석권하며 미국과 일전을 불사할 태세를 갖추자 미국 본토가 더 이상 전쟁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공포가 엄습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중립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유럽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무기대여법Lend-Lease'이 1941년에 의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무기대여법'은 전쟁 물자 구입 시 무기 구매국이 현금으로 지급하고 자국 운송수단으로 직접 나르도록 규정한 '캐시 앤 캐리cash & carry' 법안을 무력화했다. 이로써 미국은 막대한 전쟁물자들을 연합국에 지원할 수 있었다. 독일의 침공을 받은 소련에도 시베리아를 통해서 10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군수물자가 공수되었다. 하지만, 국민들을 전쟁에 직접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임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너무나 잘 알았다.

일반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정치인들 또한 국내정치와 대외정책이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상호연관된 것으로 오랫동안 간주해왔다. 미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국가이익'이나 '세력균형'과 같은 현실주의 논리가 아니라 '영구평화'나 '민족자결'에 호소한 윌슨 대통령의 이상주의적 국제주의와 같은 '대외정책 상의 비전'이나 '외교원칙'이 절실히 요구됐다. 그래서 나온 게 1941년 8월에 처칠 영국 수상과 공동으로 발표한 '대서양 헌장'이다.

'대서양 헌장'은 '민주주의'와 '집단안전보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는 전후 국제질서의 비전을 담았다. 이 헌장은 영토적 야심에 대한 포기와 함께 민족자결, 문호개방, 경제적 기회 균등,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공해에서의 항행권 보장, 군비축소 등에 관한 미국과 영국 간의 합의 사항을 포함했다. 하지만,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꿈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처칠의 속내는 복잡했다. 왜냐하면, '대서양헌장'은 2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만주에 한정해 적용하던 '문호개방정책'을 유럽국가의 식민지에도 적용하는 일반원칙으로 격상시켜 놓았기 때문이다(Cullinane and Goodall, 2017: 107~108).

'대서양헌장'이 영국에게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전쟁이 끝나면 영국 또한 식민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영제국을 해체하라는 주문이었다. 문호개방원칙을 받아들일 때만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추축국들에 맞서 싸우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표명한 문서가 바로 '대서양 헌장'이었다.

처칠은 독일이 영국본토를 날마다 공습하는 위기상황에서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기위해 '대서양헌장'에 당장에는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1차 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서처럼 미국의 구상대로만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식민지 문제에 관한 미국과 영국의 동상이몽은 전후 식민지 처리가 전승국들 사이에 상당한 정치적 파열음을 일으킬 난제 중에 난제임을 예고해주는 대목이었다.

일본은 1941년 12월,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연합국이 독일에 맞서 전쟁을 펼친 유럽 전선과는 달리 태평양전선에서는 거의 미국 혼자 일본에 맞서 싸워야 했다. 미국만이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러시아는 동부전선에서 힘겹게 독일에 맞서 싸워야했기 때문에 서부 유럽에 제2의 전선을 열도록 연합국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중국은 대륙에서 일본에 맞서 싸울 군수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기대여법의 중국적용을 요구했다. 그 결과 5억 달러의 미국산 무기가 중국에 제공됐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이 독일, 일본과 별도의 휴전협정을 체결할까봐 내심 불안해했다. 미국은 '전쟁승리'라는 공동의 목표로 연합국을 묶어세우기 위해서 고심했다. 이 과정에서 나온 미국의 전쟁수행 논리가 바로 '무조건 항복론 unconditional surrender'이다(Smith, 1985).

'무조건 항복론'의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의 기질에 너무나 잘 들어맞았다. 미국은 독립전쟁과 프렌치 인디언 전쟁, 1812년 전쟁,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전쟁과 평화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서. 전쟁이 끝난 곳에서 평화가 시작되며, 그제야 비로소 외교적 해결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조건 전쟁론'은 헌법 상 총사령관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미국인들을 단결시켰다. '무조건 항복론'을 통해 군사적 행동주의라는 미국대외정책의 아비투스가 탄생했다. 전쟁수행에는 가공할 힘을 발휘했을지 모르지만, 군사적 행동주의는 전후 새로운 국제질서를 수립하는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군사력을 통한 전쟁억지력을 외교협상에 우선하거나, 군사력 자체를 외교행위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결국, 군사적 행동주의와 문호개방독트린은 전후 미국대외정책의 핵심 이념인 국제주의를 형성하면서 봉쇄정책을 통해 구체화 될 예정이다.

'무조건 항복론'으로 요약되는 미국 대외정책의 아비투스는 미국이 한반도문제에 관여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무조건 항복론은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추축국 국가의 군사행위를 전쟁범죄로 규정하는 가운데 패전국의 전쟁수단과 군사력을 제거하는 식의 근본적 개혁을 전쟁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연장하면, 일본이 메이지 헌법체제 하에서 행한 모든 대외적 행위는 불법이 된다. 따라서 조선합병도 원인무효로 선언할 수 있는 국제법적 근거가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43년 '카이로선언'에 한반도문제가 담길 수 있었던 국제정치적 배경이었다.

'카이로선언'은 선언내용보다 그러한 선언이 나오게 된 역사적 맥락에 보다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필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카이로에서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문제에 대한 정상회의가 진행됐을까? 그런데 '카이로회담'은 별도의 독립 회담이 아니었다. 루스벨트와 처칠이 스탈린과의 테헤란회담에 가는 중간에 미, 영, 중 3국 수뇌가 회동한 것이다. 한마디로, 테헤란회담이 본 게임이었다.

스탈린이 카이로회담 결과를 접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겉으로는 동의하는 척 했을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누구 맘대로'하면서 냉소를 지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후 처리 과정에서 중국의 이해를 관철하려는 장개석의 집요한 요구가 카이로회담의 동력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해영, 2019:74-75). 여기에 중국을 포함한 '4대국경찰론'을 전후 국제질서의 핵심제도로 구상하며 강한 아시아 정책을 추구해온 루즈벨트 대통령이 장개석의 정상회담 요구에 적극 호응한 것이 카이로회담이 성사된 이유였다.

카이로회담의 일차 목적은 당연하게도 중국문제였다. 중국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반도문제를 함께 언급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문제는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에서 독자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여전히 중국 이슈의 부속적 위치를 점했을 뿐이다. 이 관점에서 지금이 논란이 되고 있는 'in due course', 곧 '적절한 방식' 혹은 '적절한 절차'라는 삽입 문구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카이로선언 본문으로는 http://avalon.law.yale.edu/wwii/cairo.asp 참조).

어째서 '즉시 독립'이 아니라 '적절한 방식' 내지 '적절한 절차'로 해석될 수 있는 모호하기 그지없는 유보 조건을 삽입했을까? 문서 초안을 미국 측이 작성하긴 했지만, 중국 측 요청 내지 암묵적 동의하에 이 문구가 들어갔을 것으로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카이로선언에는 만주, 대만, 팽호도를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는 조항이 우선해서 적시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봤을 때, '적절한 방식'이라는 문구는 한반도문제에 대한 중국의 특수하고도 각별한 이해를 반영한다. 실제로 카이로선언이 한국독립에 '적절한 방식'이라는 유보조건을 붙였을 때, 한반도는 중국의 위임통치 하에 두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소문이 중국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임병직, 1965:259~260).

카이로선언은 중국이 종전 후 만주와 한반도를 자국 영향권으로 편입할 의도를 내보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지역에서 전후 중국의 최대 경쟁세력인 소련을 겨냥했다. 실제로, 카이로선언 발표 약 2년 후인 1945년 2월, 미국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얄타협정은 만주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인정해줌으로써 카이로선언 내용을 무효화 했다. 따라서 만주 반환과 함께 한반도에서 중국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기 위해서조차 장개석은 '적절한 방식으로'과 같이 별 의미도 없을 유보조건을 미리 삽입할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한국인들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라는 문구가 들어간 게 우리에게는 위로 아닌 위로가 됐을 뿐이다. 한반도가 식민지 노예상태로 접어든 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닐 터인데 어째서 이 문구를 굳이 담았을까? 그것은 바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라는 카이로선언의 마지막 구절 없이는 결코 유추할 수 없는 내용이다.

요컨대, "노예상태"와 같은 문구는 한반도에 대한 연합국의 정치적 관심에 방점이 찍힌 게 아니었다. 오히려 '무조건 항복론'이라는 미국의 독특한 전쟁수행방법과 호응관계에 있었다.

■ 참고문헌

구태훈. 2010. 『일본제국 무너지다』. 재팬리서치 21.
권용립. 2010. 『미국외교의 역사』. 삼인.
이해영. 2019. 『임정, 거절당한 정부』. 글항아리.
임병직. 1964. 『회고록: 근대조선 외교의 이면사』. 여원사.
최형익. 2015. "'제국의 위안부'는 소설이다." <서울신문> 2015.12.25.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1225031008
Cullinane, M. P. and Alex Goodall. 2017. Open Door Era.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Kennedy, P. 1989.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New York: Vintage Books.
Smith, G. 1985. American Diplomacy during the Second World War, 1941-1945. New York: Alfred A. Knopf.

태그:#프랭클린 루스벨트, #무조건 항복론, #무기대여법, #대서양헌장, #카이로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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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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