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 <기생충>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을 보는 내내 불안했다. 어쩌다 걸려 들어 자리잡은 곳이 다행스럽게도 가끔은 해가 비치는 곳, 이만하면 족하였다. 저쪽 어두운 곳으로 눈을 돌리지도 굳이 떠올리지도 않았다. 저 상태는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이 행태는 누구도 뭐라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찾아가 바라볼 필요는 없었다.

이 불안의 이름은 '외면'이었다.
 
영화 <기생충> 포스터

▲ 영화 <기생충>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부자와 빈자, 그리고 극빈자

영화 <기생충>은 선명하게 부의 계층을 구분한다. 극적으로 양극화된 부는 등장 인물의 신분을 '부자'와 '빈자'로 양분한다. 이 구분에 애매모호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빈자인 기택(송강호 분) 가족과 부자인 동익(박사장, 이선균 분) 가족은 '돈'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자는 돈을 가진 자이며, 빈자는 부자를 위해 일을 하고 대가를 받는 자이다. 부자의 소득은 빈자 4인의 소득이 되고도, 넉넉하다. 부자는 하늘이 보이는 집에서 살 수 있으며, 빈자는 하늘이 보이지는 않으나 해는 조금쯤 드는 반지하 집에서 산다.

영화 속에서 부자로부터 소득을 얻기 위해 빈자는 애교 같은 사기도 부릴 줄 알아아 한다. 부자는 빈자를 고용하지 않는다. 부자의 세계에는 부자이거나 부자의 모습을 흉내낸 빈자만이 입장할 수 있다. '빈티'가 나는 자는 부자들이 형성하는 '믿음의 벨트'에 엮이지 못한다. 부자는 빈자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빈자는 '그럴 듯해' 보이게 속임수를 써야만 한다.

빈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세'이다. 부자와의 첫 대면에서 정체를 들키지 않고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 다른 빈자를 밀어내고 얻은 기회를 움켜쥐는 데 주춤거릴 새가 없다. 풀리지 않는 문제쯤은 가볍게 제껴주고 다음 문제를 풀어야 한다. 실직을 한 운전사를 동정할 여유 따위는 없다. '내 코가 석자'이다. 양심을 돌아보며 머뭇거린다면 기회는 날아간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 했다.

부자들이 돈을 벌어들이는 동안, 빈자들은 부자들을 위해 일한다. 기택의 가족이 게으르거나 역량이 부족해 빈자가 된 것은 아니다. 빈자에겐 부자와 같은 일이 주어지지 않는다.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나갈 소소한 일거리를 얻는 것조차 힘에 겹다. 취객들이 오줌을 내갈기는 반지하 집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감사한 하루이다.
 
영화 <기생충> 한 장면

▲ 영화 <기생충>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부자와 빈자로 양분된 세상의 컴컴한 땅 속 밑, '극빈자'가 조용히 살아간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지하 한쪽 모퉁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가 있다. 일할 수조차 없는 극빈자는 마치 몸 속 깊은 곳에서 숙주의 영양분을 훔쳐 먹고 사는 '기생충'처럼, 큰 수고 없이 부자의 양식을 축내며 살아간다. 동익에 대한 '리스펙트'를 잊지 않는 근세(박명훈 분)는 이대로 머물 수만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것도 없다.

모두가 만족하는 한 편의 희극 같던 상황은 급작스런 반전을 맞이하며 순식간에 비극으로 전환된다. 유순한 극빈자 근세 가족이 기세 당당한 빈자 기택 가족의 눈속임을 알게 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현상 유지를 위해 두 가족은 성급한 판단으로 서로를 공격하며 각축전을 벌인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생존의 위협 앞에서 공존을 모의할 만한 이성은 사라진다.

부자는 빈자와 극빈자의 싸움을 알 수가 없다. 부자에게 전쟁과도 같은 상황을 들켜서도 안된다. 발각되는 순간, 모두 '아웃'이다.

이들의 차이는 '돈'

실상, 부자 동익, 빈자 기택, 극빈자 근세로 나뉜 세 가족의 모습은 돈의 유무를 빼고는 그리 차이나지 않는다. 세 가족은 모두 서로를 조금씩은 생각하고, 그 안에서 소소하게 다투는 범상한 가족의 모습을 보인다. 동익과 연교(조여정 분)의 삶이 반지하 방에서 펼쳐진다면 기택과 충숙이 보내는 시간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택의 아내 충숙(장혜진 분)의 말마따나 부자는 마음의 주름이 '돈으로 다림질'이 되어 있다. 동익의 가족에 비해 다소 거친 표현과 행동을 하는 기택의 가족들은 돈의 혜택을 받지 못한 상태이다. 금방이라도 싸울 듯 위태로워 보이는 기택 부부의 대화 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울분이 자리해 있다. 착한 얼굴로 사기를 치는 기우(최우식 부)나 냉소적인 얼굴로 사기를 치는 기정(박소담 분)이나 모두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인격 수양의 부족을 탓하기엔 이들의 일상은 너무나 남루하다. 그 속에서 도덕심을 회복해 행복과 여유를 찾으라고 말하는 건 '헛소리' 같다.

둘뿐인 근세 가족은 기택과 동익 가족보다 오히려 애틋하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남편 근세를 향한 아내 문광(이정은 분)의 헌신적인 모습은 그들 가족이 잃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케 한다. 결코 되찾을 수 없는, '드러낼 수 있는 삶'을 향한 안타까움은 남편을 부탁하며 내미는 문광의 꼬깃한 노란 봉투에 담겨진다. 남편이 일할 여력이 남아 있기에 충숙은 기택에게 욕지거리라도 날릴 수 있는 것이다.

한바탕 소란과 폭우가 지나간 뒤, 빈자와 극빈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빈자와 극빈자는 위기 앞에 나약하다. 위기는 빈자와 극빈자를 한 단계 아래로 밀어낸다. 자연과 재해는 모두에게 공평하나 빈자와 극빈자는 이들을 막아줄 우산을 준비할 여력이 없다. 그러나, 마음의 주름까지 펴주는 돈은 위기 앞에 당당하다. 빈자에게 위기인 비는 부자에겐 그저 캠핑을 망친 원인일 뿐이다.

잠시 계단 위의 세상에서 하루를 보낸 기택의 가족은 반지하 세상으로 돌아간다. 계단 아래의 세상엔 전깃줄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깜냥껏 파닥여봤자 거미줄 안이다.
 
영화 <기생충> 한 장면

▲ 영화 <기생충>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폭우가 멈추자 빈자의 삶은 폭격을 맞은 듯 폐허가 되지만, 부자는 아들의 생일 파티를 준비한다. 생존을 걱정하는 빈자의 그늘진 얼굴을 부과된 일에 대한 불만으로 해석하며 '돈을 더 챙겨 주지 않느냐'는 부자의 힐난은 이들의 경계를 다시금 드러낸다. 부자의 돈을 받는 빈자의 군소리는 자리 보전에 악영향을 미친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빈자는 부자들의 세계에서 밀려나기 마련이다. 돈은 언제나 그에 걸맞은 예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위기를 맞은 빈자는 미처 예의를 차릴 수가 없다. 빈자의 상황을 모르는 부자는 자신의 요구가 어떤 상실감을 빈자에게 안겨줄지 알지 못한다. 때문에 빈자에게 닥친 위기는 부자의 위기 또한 불러 오기 마련이다. 위기는 도미노처럼 연쇄적이다. 비를 피한 부자라 해도 모든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좌석이 다를 뿐 그들은 한 배에 타고 있기 있기 때문이다. 배를 침몰시키는 건 암초나 파도만이 아니다.

적나라하게, 그리고 불편하게

영화 <기생충>은 적나라하다. 계급적으로 존재하는 부의 층위, 빈자들 사이의 치열한 생존 경쟁, 숨겨진 극빈자의 존재 등을 정밀화처럼 그려낸다. 이 정밀화에는 이러한 현실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에 불구하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현실의 무기력함까지도 내포한다.

부자와 빈자, 극빈자가 얽힌 잔인한 소용돌이 뒤에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마치 교훈처럼 '돈으로 구원하겠다'는 기우의 다짐을 선보인다. 아버지 기택을 구하기 위해 기우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버지가 기생충처럼 숨죽인 그 집, '기택'을 사는 것이다. 과연 몇 십억을 호가할 그 집을 기우가 살 수 있을까. 

빈자가 부자가 되는 것이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어려운' 세상이다. 마치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기우가 그 집을 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우리는 비관적인 해답을 생각해야만 한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수석의 힘으로도 부자로 환생하지 못한 기우가 성실하게 노력해서 남궁현자의 저택을 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빈털터리 기우가 그 집을 사기 위해선 기생충처럼 곳곳의 돈을 빨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지하의 극빈자로 내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우가 악독한 사채업자처럼 대놓고 나쁜 짓을 하지 않는 한, 합법적인 돈으로 아버지를 구한다면 누구도 그를 욕하지 않을 것이다. 근세와 기택이 저리 된 것이 부자 동익의 탓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부자들을 단지 부자라고 탓할 수는 없다. 심정적으로 억울하고 뭔가 부도덕한 것 같지만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는 한 부는 무죄 추정의 원칙 아래 아무런 죄가 없다.

때문에, 영화 <기생충>은 불편하다. 영화는 부자와 빈자의 경계가 확실해지는 극빈자의 존재가 증가하는 현실을 그려낼 뿐, 그 원인과 책임을 어디에도 따지지 않는다. 영화가 차라리 특정 부의 부도덕한 축적 상황을 그리며 대놓고 어떤 부자들을 욕하며 비난했다면 편했을 것이다. 마음 한편의 부러움과 시샘을 마음껏 공격적으로 표출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이제 부를 착하다고 말할 수 없더라도 나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맹목적인 비난은 자제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명제를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영화 <기생충> 한 장면

▲ 영화 <기생충>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창 넓은 거실에 앉거나 하늘이 보이는 정원에 나가 햇볕을 받는 것을 모두가 행복해한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는 왜 이런 집에서 살 수 없는 것인지 묻지 않는다. 그런 집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가끔 주인이 집이 비운 사이, 잠깐의 사치를 빌릴 수 있다면 족하다. 기정이 다혜(정지소 분)처럼 정원이 있는 집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이 문제랄까. 돈은 이제 희망하고 노력한다고 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숨겨진 근세의 존재를 세상에 내보일 뿐이다. 그리고, 기택이 근세처럼 저 아래로 숨는 과정을 그릴 뿐이다. 어딘가 이상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 무기력함을 안겨주면서 말이다. '어떻게든' 부자가 되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어두운 통찰을 덤으로 얹어주면서 말이다.

하여, 이 배는 난파 중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만 세상은 곧 진정된다. 영화 <기생충>은 적나라하게 불편하게 보여줄 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꾀쟁이 감독은 우리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부의 잘못을 탓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저토록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2와 2분의 1의 빈부 격차가 과연 온당한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 괴리는 분명 정서의 문제를 야기한다.

부와 빈으로 양극화되는 상황 속에서 빈은 '빈'과 '극빈'으로 다시 쪼개지고 있는 세상이다. 부가 흘리는 부스러기를 놓고 빈자와 빈자, 빈자와 극빈자는 사투를 벌어야 한다. 생존이 달린 싸움의 한복판에서 부자 역시 안전할 수 없다. 코를 싸쥐는 동익을 향한 분노의 감정은 이성으로 다스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택이 말하는 '무계획'처럼 불시에 일어날 수 있는 잠재된 정서이다. 가진 것이 너무나 차이나는 이상한 세상에서 삼자의 보이지 않는 동맹은 아슬아슬하다.
 
영화 <기생충> 한 장면

▲ 영화 <기생충>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다송(정현분 분)의 그림에 도깨비처럼 그려진 근세는 스스로 숨어야만 하는 동시에 드러나서는 안되는 공포의 대상이다. 빈자였을 근세는 위기 앞에 그를 보호할 어떤 수단도 찾지 못한 채 극빈자로 밀려났을 것이다. 기생충과 같은 존재로 그려지는 근세는 부자의 피를 빠는 존재가 아니라 실상 더이상 빨릴 것이 없어 버려진 존재이다. 이러한 근세의 전철을 기택 역시 밞아나간다.

일상을 향한 근세의 의지까지 먹어 버린 '기생충'의 정체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근세가 잠시나마 갖고 있었을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돈은 없는 곳으로 분산되기 보다는 있는 곳으로 합산되는 것일까. 일방적인 돈을 흐름을 제어할 방법을 없는 것일까.

근세는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무력한 다송만이 목격했을 뿐이다. 그 신호를 다른 누군가 보았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을까. 근세의 자리를 차지한 기택 역시 신호를 보낸다.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그들이지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살려 달라'는 '소리없는 아우성'이다. 기우가 때맞춰 기택을 구조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기택 역시 다송이 그린 도깨비처럼 집안을 떠돌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기우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이 신호는 '당하고 싶지 않다면 구하라'는 경고가 결코 아니다. 난파 중인 배가 보내는 구조 신호와 같다. 이대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작은 신호이다. 너무 작아 눈에 띄기도 쉽지 않다. 허나 그 신호는, 모두가 살 수도 있다는 함축된 반짝임이다. 너무 늦는다면 숨어버린 누군가가 도깨비로 변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들여 해석하지 않는다면 몸집 불리기를 좋아하는 '기생충'이 모두를 잡아먹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영화 <기생충> 한 장면

▲ 영화 <기생충>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모르고 있었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다. 굳이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이 차라리 솔직하다. 가난의 실체를 목격한다는 것은 불편하다. 가진 무언가를 내주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속 깊은 어두운 곳에 묻어두고 살았다. 하지만 불안했다. 외면해서는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은 이제 그 불안과 마주하라고 이야기한다. 불안이 덩치를 키워 모두를 잡아먹어 버리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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