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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으로부터 원조받은 무기로 편성한 인민군 탱크부대 사열장면
 소련으로부터 원조받은 무기로 편성한 인민군 탱크부대 사열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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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8. 11. 미 공군 B-29 전투기들이 인민군 진지에 무차별로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
 1950. 8. 11. 미 공군 B-29 전투기들이 인민군 진지에 무차별로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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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소년이 체험한 6․25 한국전쟁

2019년 6월 25일은 6․25 한국전쟁 69돌 기념일이다. 3년 남짓한 전쟁기간 중 사상자는 피아 550여만 명이라고 한다. 부모 자식 형제 간 생가지 찢기듯 헤어진 이산가족은 10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가히 그 전쟁의 참혹상이 얼마나 심했는지 전후 세대도 짐작이 갈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던 그해 나는 여섯 살 소년으로 비교적 기억이 뚜렷하다. 내 고향은 경북 구미로 바로 다부동전투 배후지였다. 그해 7월 하순쯤인데 어느 날 갑자기 구미 북향인 아포 쪽에서 쿵쿵 대포소리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면서 북쪽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우리 집 앞길을 메웠다.

그때 대한민국 정부는 전황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서울시민뿐 아니라 기타 지역 사람들도 인민군이 점령한 뒤에야 피란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

우리 가족들은 소달구지에 가재도구를 싣고, 또 어른들은 옷가지나 기타 살림도구를 머리에 이거나 지게에 지고 피란을 떠났다. 뙤약볕 속에 걸어서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낙동강 강변에 진을 치고 있던 인민군들이 길을 가로 막고서는 더 이상 남하를 막았다.
 
"남조선 인민들, 돌아 가라우!"
 
그 말에 피란민들은 모두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때 구미 광평 들판을 지나는데 미 공군 전투기들의 공습이 있었다. 그래서 가까운 사과밭으로 뛰어든 뒤 어른(남정네)들은 사과나무에 매미처럼 달라붙었고, 여자들이나 어린 아이들은 사과 그루터기 사이 콩밭에 머리를 처박고 몸을 숨겼다.

그때 맹랑한 소년이었던 나는 그 공습의 무서움도 모른 채 미 공군 제트기가 쏟는 폭탄이 마치 불꽃놀이처럼 신기하여 고개를 쳐 들었다. 그러다가 할머니에게 뒤통수를 쥐어박히는 꾸중을 들었던 게 아직도 기억에 삼삼하다.
 
1950. 7. 29. 피란민 행렬
 1950. 7. 29. 피란민 행렬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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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A에서 만난 한국전쟁 이미지들

2004년 2월, 나는 여러 누리꾼의 도움으로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 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갔다. 거기 5층 사진 자료실에서 'Korean War'(한국전쟁)라는 앨범을 대출 받아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그 시절의 참상들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동포자원봉사자에게 도움을 받아 그의 스캐너를 빌려 1차로 500여 점의 사진을 수집해 왔고, 이후 세 차례 더 미국에 가서 총 2000여 점의 한국전쟁 자료를 입수해왔다. 이를 통해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3>, <한국전쟁 · Ⅱ>, <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등의 사진집 및 포토에세이집을 펴낸 바 있다.

왜 이런 끔찍한 6․25 한국전쟁이 한반도에 일어났으며, 왜 남북의 우리 겨레들은 동족을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로 살육을 해야만 했던가. 6․25 한국전쟁 69주년을 맞이하는 이즈음에는 냉정히 그 전쟁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생각해 보고, 아울러 그런 전쟁이 다시는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고교시절 최아무개 선생은 별명이 '깡패'로 학생들의 폭군이었다. 최 선생은 수업시간이면 길다란 대걸레 막대기를 들고 들어와 교단을 내리치면서 공포감을 조성했다. 그런 뒤 온갖 트집으로 학생들을 불러낸 뒤 사정없이 몽둥이질을 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힘에 부치면 학생들을 복수로 불러낸 뒤 서로 뺨을 치게 했다.

교단 앞으로 불려나온 친구들은 처음에는 상대 친구를 슬쩍 슬쩍 쳤다. 그러면 그 최 선생은 손목의 시계를 푼 뒤 "뭐, 이 새끼들 장난하고 있어! 야, 이렇게 치란 말이야"하고는 한 학생의 뺨을 갈겼다.

그러면 두 학생은 그제부터 서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상대 학생의 뺨을 쳤다. 마침내 한 학생이 쓰러지거나 코피라도 쏟아야 최 선생의 체벌을 끝났다.
 
1950. 8. 25.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들길에 나뒹굴고 있는 피란 시신들.
 1950. 8. 25.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들길에 나뒹굴고 있는 피란 시신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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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9. 29. 전주, 주민들이 대량 학살 암매장된 현장을 파내고 있다.
 1950. 9. 29. 전주, 주민들이 대량 학살 암매장된 현장을 파내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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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백성이 돼야

나는 6․25 한국전쟁이 생각나면 그 최 선생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시간 교단 앞으로 불려간 학생은 북의 인민군이고, 남의 국군으로 연상된다. 국군과 인민군은 그 최 선생의 폭압에 서로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갈기는 것처럼 서로 상대방을 살상했다. 최 선생은 두 학생이 코피가 터지면 싸움질을 중단시켰다.

최 선생은 수업을 하다가 또 성질이 나면 학생을 불러내 서로 뺨을 치게 했다.강대국은 한반도에서 무기가 잘 팔리지 않으면 또 분쟁거리를 만들었다. 마치 최 선생이 심심하면 학생들을 불러내어 서로 뺨을 치게 하는 것처럼.

6․25 한국전쟁 69돌을 맞으면서 우리 남과 북의 학생들은 이제라도 그 최 선생에게 "당신이 뭔데 그런 고약한 싸움을 조장하여 서로 치게 하느냐?"고 항의도 하고, 이제는 제발 그런 야비한 짓으로 무기장사하며 돈벌이 하지 말라고 따지는 백성이 돼야겠다.
 
1950. 9. 27. 진주하는 군인에 따라 각기 다른 깃발을 들고 환영하는 흰옷입은 불쌍한 백성들.
 1950. 9. 27. 진주하는 군인에 따라 각기 다른 깃발을 들고 환영하는 흰옷입은 불쌍한 백성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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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우리 백성들 가운데 일부는 아직도 최 선생과 같은 이들에게 환호의 깃발을 휘두르며 찬가를 부르고 있다. 나는 고교 졸업 후 대학 캠퍼스에서 그 최 선생이 교사에서 교수로 신분이 바뀐 것을 목격했다. 나는 너무나 황당하여 눈을 껌벅이고 다시 바라봤는데 분명 최 교수였고, 그는 나를 향해 겸연쩍게 싱긋 웃었다. 그게 분단 한반도의 지난날 자화상이었다.

아마 최 선생이 그새 저 세상에 갔다면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묻혀 있거나, 곧 묻히게 될 것이다. 그것도 전망이 가장 좋은 곳으로. 우린 그런 야만의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는지.  6․25 한국전쟁 69돌을 맞아 지난 전쟁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여전히 남의 나라 국기를 흔드는 이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뺨을 맞고 코피를 흘려야 제 정신으로 돌아올까. 최 교수의 시니컬한 웃음이 "한국인은 그저 매 맞고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처럼 나를 슬프고 우울케 한다.
 
1951. 9. 6.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포탄 껍질들.
 1951. 9. 6.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포탄 껍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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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0. 진주, 학살 현장으로 시신들을 굴비 엮듯이 뉘어 놓았다.
 1950. 10. 진주, 학살 현장으로 시신들을 굴비 엮듯이 뉘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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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구미가 사랑하는 작가 - 구미출신 작가 박도를 만나다!
일시 : 2019. 6. 28.(금) 오후 7시 30분
장소 : 구미 삼일문고 대강연장 (구미시 금오시장로 6. 054-453-0031)
참가비 : 무료
후원 : 구미시


태그:#한국전쟁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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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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