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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의 물길을 따라 조창이 설치되면서 내륙 포구로서의 입지를 다져온 나주의 영산포 ⓒ 김이삭

우리나라 4대강 중에서 가장 조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영산강은 과거부터 뱃길이 발달하여 전남 서남해안과 다도해 섬들과의 수운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고려시대부터 조창이 설치된 영산포는 물산이 모이고 운송이 발달한 중심지가 되었는데요, 일제 강점기에 배가 드나들 수 있게 하는 개폐식 나무다리와 내륙의 유일한 등대가 영산포에 설치된 것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허나 지금은 영산강하구둑이 만들어지면서 과거의 영광이 재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관광용으로나마 황포돛배를 재현한 배를 1시간에 1대씩 운항하고 있고, 과거 뱃길을 따라 바닷가의 생선과 젓갈을 배에 실어날랐던 것을 이용해 홍어의 거리를 조성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죠. 과거의 영광과 번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주 영산포, 이제 그곳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산강 뱃길을 따라 올라온 홍어가 영산포의 특산품이 되다
 
뱃길을 따라 운송된 삭힌 홍어를 특산품으로 하여 조성된 나주 영산포에 위치한 홍어의 거리 ⓒ 김이삭

홍어는 자연발효되면 독특하고 절묘한 맛을 냅니다. 그래서 김치, 고기와 함께 곁들여서 삼합으로 먹기도 하죠. 그런 홍어가 영산포의 특산물이 되어서 지금도 손님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는데요, 왜 이렇게 된 걸까요?

그것은 고려 말 공민왕 때, 흑산도 섬 주민들이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육지로 이동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육지로 도망쳤음에도 흑산도 근처에서 계속 어로 활동을 이어갔는데요, 이들은 고기를 잡아서 배로 실어날랐습니다.

그런데 다른 생선들은 부패해서 먹을 수 없었던 것과 달리 유독 홍어만은 먹어도 문제가 없었다고 해요. 이것을 계기로 홍어를 삭혀 먹는 음식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영산포가 홍어로 유명해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지금 영산포에는 약 40여 곳의 홍어 음식점과 도매상이 들어선 홍어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비록 국내산 홍어의 가격이 올라간 현재는 수입산 홍어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요.

영산강 황포돛배와 애절한 사랑이 담긴 앙암바위
 
과거 영산강 물길을 따라 다녔던 황포돛배를 재현해서 관광유람선 형태로 영산강을 항해하고 있는 영산강 황포돛배 ⓒ 김이삭

조선시대의 영산포는 황토색 흙으로 물들인 돛을 단 황포돛배가 영산강 뱃길을 따라 사람과 물자를 실어날랐습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의 수탈 근거지 중 하나가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1970년대까지 선창에는 고깃배들이 드나들었고 기차역에는 서울행 열차가 항상 정차하는 등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영산강하구둑이 만들어지면서 영산강을 따라 배가 다니지 않게 되었고 옛날 이야기로 남게 되었죠. 하지만 2008년부터 황포돛배를 재현한 목선이 다시 운항했고, 지금 이 목선은 나주를 대표하는 관광 상품이 되었습니다.

영산포 선창 매표소에서 승선할 수 있는 이 배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 시간 정각마다 영산포선착장에서 출발해 천연염색박물관까지 왕복 10km 구간을 50분 동안 운항합니다.
 
황포돛배를 타고 영산강 물길을 따라 가면 나오는 슬픈 사랑의 전설이 담긴 영산강의 앙암바위 ⓒ 김이삭
  
황포돛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가면 여느 계곡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절벽이 나오는데요, '야망바위', '상사바우'라고 불리우는 앙암바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가히 한국의 로렐라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경관이 아름답지만, 삼국시대 당시 아랑사와 아비사의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의 전설이 서린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곳은 소용돌이치는 강물로 인해 물살이 매우 급해서 강을 항해하는 배들이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또 사람들은 이 바위 아래에 용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한 항해를 위해 제를 올리기도 했다고 하죠. 여러가지로 로렐라이처럼 유명한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제 수탈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영산포의 근대 건축물
 
일제 식민지 수탈의 아픔을 잘 간직하고 있는 영산포의 근대 건축물들 ⓒ 김이삭

영산포는 나주 평야와 인접했고 영산강을 통해 바다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곳은 목포의 개항과 함께 1900년대 초반부터 일본인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당시 일제에 의해 목포와 군산처럼 수탈의 근거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죠.

또 강을 따라 모여든 배들로 하여금 이전까지 없었던 5일장이 형성되었고, 영포은좌나 본정통과 같은 일본인 거리를 중심으로 상점이 생기면서 상업이 활발해집니다.

이로 인해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와 광주농공은행 영산포지점(조선식산은행), 일본인 지주가옥과 같은 근대 건축물과 적산가옥들이 지어졌고,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죠. 또한 일본이 영산포를 통해 나주평야의 질 좋은 쌀을 수탈하고자 이곳을 경유하는 철도인 호남선을 부설하기도 했습니다.
     
국내 유일한 내륙 등대이자 영산포의 번영과 영화로움을 잘 보여주고 있는 영산포 등대 ⓒ 김이삭

이뿐만이 아닙니다. 1915년에는 '국내 유일의 내륙 등대'인 영산포 등대가 만들어졌는데요, 당시 영산강에 몰려든 배들이 많았기 때문에 배들을 포구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아울러 물난리가 자주났던 영산강의 특성상 강물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한 수위관측시설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과거의 영산포가 잘나갔다는 소리가 될 수 있지만, 역으로 보면 일제 강점기 때 지어졌던 구조물인 만큼 식민지 수탈에 대한 아픔이 묻어나 있는 곳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고깃배들이 드나들지 않는 지금으로서는 쓸모없는 존재로 보일지 모르지만, 과거 영산포의 번영과 일제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볼 수 있죠. 황포돛배 선착장 앞에 지금도 자리잡고 있는만큼, 배를 타고 난 다음 한 번쯤 둘러보고 가도 괜찮은 곳입니다.

덧붙이는 글 | * 황포돛배의 요금은 성인 8000원, 청소년 6000원, 노인·초등학생 4000원입니다. 20인 이상 단체의 경우 1000원 할인되며, 나주시민의 경우 50% 할인됩니다.
* 본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https://gl-revieuer86.postype.com/post/4007852)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영산포, #황포돛배, #홍어의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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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프로듀서보다 솔직담백한 국민리뷰어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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