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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이후, 몇 번인가 입원을 해야 했다. 그때마다 혼자 지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엄마는 종종 방문했지만 보통의 면회객처럼 다녀갔다.

서운한 적은 없었다. 엄마에겐 일이 있었고 링거 때문에 불편할 뿐 내 거동은 자유로웠으며 병은 병원에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돌보기 위해 불편한 간이침대에서 생활하는 여인들을 보며, 그 환자들은 나보다 많이 아픈가 보다 짐작할 뿐이었다.

내 사정을 아는 친구들은 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한 친구는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나도 갖지 않은 서운함마저 표현하기도 했다. 나를 아끼는 그녀는 '어머니께서 대체 무엇이 더 중요하시기에 딸을 돌보지 않는 거냐'며 속상해 했다.

인상 깊은 것은, 우리 집을 의아하게 여긴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럼 아빠는 어떠했느냐고 묻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돌봄은 여자만의 의무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것은 내 곁의 가부장제였다. 그리고 돈벌이를 위해 여성의 돌봄이 뒷바라지하는 구조로 돌아가는 자본주의의 얼굴이기도 했다.

돈을 위한 돌봄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책표지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책표지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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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은 주인공이 사는 빌라 전체가 이유를 알 수 없이 하루 동안 단수되면서 벌어진 일을 그린 소설이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실을 바지런히 오간다.

주인공 미선은 구강건조증을 앓고 있는 시어머니와 함께 산다. 자타공인 눈치 빠른 미선이지만 시어머니의 질병이 고통스러우리만큼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알아채지 못했다. 자꾸 밥에 물을 말아먹는 모습이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 같아 꼴 보기 싫었을 뿐. 수도가 끊겨도 시어머니의 고통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것은 순전히 미선의 요구였다. 15년 넘게 홈쇼핑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한 미선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육아휴직이 끝날 무렵, 미선을 대신해 육아와 살림을 해줄 노동력이 필요했지만, 사람을 고용하는 것은 수지가 맞지 않았다. 순전히 그 이유였다.

그렇게 시어머니는 삼십 년 넘게 살아온 동네를 떠나 미선의 집에 들어온다. 그녀 덕분에 미선은 가사도, 육아도 신경 쓸 것 없이 일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기대 이상으로 완벽했으며 생색이나 유세 또한 없었다. 미선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일상은 그런 대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미선이 갑작스러운 해고를 당하자 모든 곳에 균열이 일어난다. 미선은 자신을 해고한 회사를 원망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런들 꼴만 더 비참해지는 것 같아 만만한 어머니와 그녀의 말라가는 침을 원망하고 만다.

미선은 어머니의 바지런함으로 유지되고 있는 집을 보며, 자신이 영역 다툼에서 패배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급기야 어머니를 내보내기로 결심한다. 그 순간까지 계산기를 놓지 않는 미선이다.
 
"그래도 간혹 여자가 아쉬울 수 있으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싸고 깨끗한 방을 얻어 내보내면 두루두루 좋지 않을까." (p258)

그러나 남편이 어머니의 전세금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번에도 미선은 남편 아닌 어머니를 원망한다. 어머니가 한 일이라고는 지난 5년간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며 군소리 한 번 하지 않은 것밖에 없음에도. 

우리는 결백한가

미선의 이기적이고 편리한 사고에 환멸을 느끼긴 쉽다. 당신의 셈법이 완전히 틀렸다고 조목조목 짚어주고 싶다. 그녀가 스스로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사고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대목에서는 화가 날 정도다. 그러나 이내 멈칫하고 소름이 끼쳐온다. 나는 계산기를 두드려댄 적이 한 번도 없었는가. 나는 결백한가.

미선은 왜 이렇게 됐을까. 그녀는 아이만은 자신보다 나은 환경에서 자라게 하고 싶다. 남들 다니는 학원은 다 보내야 하며, 아이의 아토피엔 유명한 한의원에서 파는 고액의 연고를 발라야만 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게 요즘 세상엔 불가능한 것을 알지만, 내 아이만은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돈이다. 그녀의 욕망은 돈으로 귀결된다. 자식을 교육시키고 남들처럼 치장하고 남들처럼 쓸 수 있는 돈. 그녀는 자신이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찍소리도 없는 어머니의 돌봄 노동 따위가 아니라, 오직 돈만을 인정한다. 신자유주의의 세상에서 최고 존엄한 존재, 돈. 
 
"그녀가 알고 있는 정상… 그것은 남들과 똑같이, 남들 하는 대로, 그리고 남들 하는 만큼 하고 사는 것이었다. 남들 먹는 만큼 먹고, 남들 입는 만큼 입고, 남들 쓰는 만큼 쓰면서... 남들보다 앞서 나가지 못할망정 뒤처지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p190)

이것이 미선이 아는 생존법이다. 그녀만의 일인가. 내가 속한 세계는 그렇지 아니한가. 요즘 아이들 장래희망이 건물주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는 더이상 새롭지도 않다. 끊임없이 소비를 과시하며 서로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SNS 풍조 또한 그러하다.

그렇다면 미선과 대비돼 보이는 시어머니, 군말 없이 돌봄 노동과 희생을 자처하는 누군가가 있는 세상이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인가 하면, 그렇진 않을 것이다. 자발적 착취란 불가능하다.

미선의 시어머니는 자식에 집착한다. 좀처럼 의견을 표현하지 않고, 화도 내지 않지만, 딸이 중절 수술을 했을 때 몸조리를 돕기는커녕 크게 역정을 낸 것이 어머니며, 미선에게 자식을 더 낳을 것을 요구하는 것 또한 시어머니다. 여건을 따질 것이 아니라 일단 낳고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녀다. 

이것은 그녀의 생존방식이다. 주어지는 대로 아이를 낳고 키우며, 몸이 쪼개지고 부서지더라도 묵묵히 사는 것. 입안의 침이 바싹바싹 말라가도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살아가는 그녀. 이것이 옳은가. 미선이 그악스럽고 어머니가 의뭉스러울 뿐, 생존만이 남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닮았다. 

여자의 적은 구조

미선과 시어머니가 갈등하고 모멸감을 주고받는 동안, 누구도 남편을, 아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가 빠져서는 성립이 되지 않는 관계 속에서 그의 존재감이 희미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가부장제의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이 소설은 나아가 자본주의의 처참함을 겨냥한다. 진화하는 적은 시스템과 구조일 것이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은 내가 사랑하는 소설의 모든 면을 갖추고 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을 수 있는 인물과 관계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인물은 선하거나 정의롭지 않다. 이야기에 빠져 단숨에 읽고 나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 이 현실의 밑바닥이 보인다. 

쓴맛을 느끼게 하는 이런 소설들을 사랑한다. 소설이 펼쳐놓은 것이 참담함일 뿐일지라도, 나는 즐겁게 책을 덮는다. 나만은 정의롭다고, 백번 양보해 정의롭진 않을지라도 최소한 이 세상의 평균 정도는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거울 속의 그 얼굴을 제대로 보라고.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김숨 (지은이), 현대문학(2013)


태그:#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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