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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웹툰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한 나는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10여 개가 넘는 작품 기획안을 만들고 그 중 3~4개의 작품을 구체화하여 차기작 계약을 준비했다. 웹툰 시나리오 작가의 삶은 고단하기 때문에 부지런해야 했다.

처음 완성된 시나리오를 들고 플랫폼과 에이전시를 만났는데 반응이 예상외로 좋았다. 첫 계약을 떠올리며 무난히 차기작 계약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시나리오로 연재를 하자는 합의를 해도, 그림 작가와 함께 작품을 1~3화까지 완성해야 실질적인 계약이 이루어진다. 몇 개월 동안 작업한 작품을 들고 다시 플랫폼과 에이전시를 찾았다. 그러나 이들의 반응이 차갑게 식어있는 걸 느꼈다. 불과 반년 사이에 생긴 변화였다.

그때 '밤토끼'라는 사이트를 처음 들었다. 들어보니 좀 황당했다. 이전에도 불법 게시판을 만들어 유료 웹툰을 공유하는 일은 있었다. 그러나 밤토끼는 거의 모든 작품을 수집해 웹툰 플랫폼처럼 연재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불법'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남성 독자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 많았지만 점차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까지 확장해 대한민국에서 연재되는 모든 작품을 쓸어 담고 있었다. 관련 기록을 살펴보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월간 방문객이 몇천 만 단위로 집계되었다. 트위터나 지마켓 등과 같은 사이트보다 순위가 높았다.

이는 만화계에서 익숙한 풍경이었다. 과거 책 대여점 시절에도, 불법 스캔과 웹하드에서 만화를 불법으로 공유할 때도 만화 산업은 기반이 흔들리는 위기를 겪었다. 사실 몇 차례 망한 전례도 있다. 2003년 10월 국내 포털 최초의 웹툰서비스 '다음 만화속세상'이 만들어진 후 15년 만인 2017년 초 불법 공유로 만화계가 무너지는 건 아닌지 하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네이버웹툰의 김준구 대표도 당시 한 포럼에 참여해 "2년 안에 불법웹툰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만화생태계가 붕괴 될 것"이라고 했다. '골든타임'이란 표현까지 사용했다. 정말 그랬다. 작가들은 만날 때마다 밤토끼란 공공의 적을 이야기의 화두로 꺼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2017년 11월] '불법웹툰피해작가' 모임을 만들다

2017년 11월 추운 겨울 어느 날, 5~6명의 만화가가 삼겹살 가게에 모였다. 삼겹살을 먹으며 밤토끼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다. 밤토끼란 사이트는 모든 작가의 철천지원수였으나 인간의 심리라는 게 이상해 막상 밤토끼에 자신의 작품이 없으면 인기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처연한 분위기였다. 선배 작가 중 한 명이 책 대여점으로 출판 만화가 몰락하던 시대의 이야기를 꺼냈다. 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날 모인 피해 작가들과 고민을 나눴고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토론하던 중 시민운동 비슷한 걸 시작하게 되었다. 일종의 '당사자 운동'이었다. 필자는 '불법웹툰피해작가' 모임을 만들어 현재까지 실무에 참여하고 있다. 

고작 대여섯 명의 힘없는 작가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각자 할 수 있는 걸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국회의원 사무실마다 전화를 걸어 만화계가 위기니 구해달라고 읍소했다. 무턱대고 밤토끼를 경찰에 고발하는 작가도 있었고 또 어떤 이는 토론회를 제안했다. 

나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을 한 경험이 있어 기사 쓰는 일을 했다. 이후 2018년 1월 언론사를 불러모아 우리의 문제를 알렸다. 집담회를 거치고 나니 제법 우리의 이야기가 기사화되기 시작했다.

[2018년 1월] '저작권보호원'을 만나다

언론이 관심을 두기 시작하자 이번엔 '저작권보호원'이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다. 정부와 각종 기업, 협회 등이 함께 운영하는 저작권 보호 단체였다. 첫 미팅 당시 4명의 작가가 참여했는데 저작권보호원에서 국장급부터 실무자까지 10여 명이 넘는 인원이 나와 당황스러웠지만 열심히 해보자는 의지와 관심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인터넷 랭킹 사이트 '시밀러웹'에서 밤토끼는 5000만 명이란 월간 방문객을 기록하고 있었다. 정부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직감한 듯 보였다. 

처음 저작권보호원을 만났을 때 지금까지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저작권보호원 역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불법 사이트들이 '외국'에 서버를 두고 있어서 국내법으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이유 하나 때문에 불법웹툰문제 해결은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국내에 있는 불법 사이트 운영자라면 경찰이 수사를 바로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외국에 서버를 두고 있다면 접근할 방법이 사라진다. 광고 계좌를 추적해 일부 사이트 운영자를 검거해도 이런 추적 방식이 알려지면 광고가 바로 '외국대행사'를 끼고 진행되는 방식으로 바뀐다고 했다. 구글이나 트위터 같은 외국 기업에 협조 공문도 보내봤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는 후문도 들었다. 이들은 자칫 외교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어 조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참 열심히 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불법 사이트 폐쇄가 참 어려운 문제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저작권보호원과 의견을 나눈 후에도 우리는 무작정 시민단체의 문을 두드렸다. 국회의원실 방문도 계속 이어졌으나 대부분 고개를 절레 저었다. 마땅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맨땅에 헤딩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움직였다.

[2018년 2월] 청와대와 국회가 나서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도 깊은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떠든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청와대를 BH(Blue House의 약자)라 부르는 것도 이때 처음 알았다. 관련 부처에서는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려 했고, 우리도 불법웹툰문제에 관심이 있는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을 파트너로 만나게 되었다.

김한정 의원은 불법웹툰문제 해결을 위한 국회 토론회를 2018년 5월경에 준비하고 있었고, 조언을 요청하기 위해 우리를 국회로 불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국회의 의원회관이라는 곳을 방문했다. 토론회 실무를 준비하고 있던 비서관과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우리는 그동안 활동을 하며 겪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불법웹툰때문에 많은 작가가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데 이에 대한 실태조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개선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전했다. 이 의견은 만화진흥법 개정을 통해 불법과 관련된 실태조사를 정례화하는 법안 발의로 이어졌다. 아직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진 못했지만, 우리들의 요구를 문화체육관광부도 수용해 2019년에 '불법웹툰으로 인한 산업계 피해 상황에 대한 정부의 공식 연구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2018년 5월] '밤토끼' 검거되다 
 
불법웹툰 사이트 밤토끼에 작품을 도용당한 웹툰작가 54명이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 소송장을 제출하는 웹툰작가들 불법웹툰 사이트 밤토끼에 작품을 도용당한 웹툰작가 54명이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 이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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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3일 경찰의 집중 수사로 밤토끼 운영자가 검거되었다. 기쁜 일이었다. 한동안 만화계는 축제 분위기를 즐겼다. 하지만 이 축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밤토끼의 트래픽을 다른 불법 웹툰 사이트가 나눠 갖는 풍선효과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밤토끼 운영자에게 더욱 엄중한 경고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작가들을 모집해 그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진행했다. 54명의 작가가 이 소송에 참여했고, 20억 원 규모로 예상되는 소송이 현재 진행 중이다. 우리가 소송을 선언하자 네이버웹툰과 레진코믹스 등 플랫폼 기업들도 밤토끼 운영자에게 소송을 걸기 시작했다. 웹툰계 전체가 대략 50억 원 정도 규모의 소송을 건 것으로 파악되었다. 만화계는 밤토끼 운영자가 저지른 죄의 책임을 끝까지 추궁한다는 선례를 만들었다. 

밤토끼 검거 이후 가장 중요한 화두는 '우후죽순 생겨나는 새로운 불법 사이트를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저작권보호원의 대응 전략은 참 훌륭했다. 저작권보호원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협조가 필요한 기업이나 정부 부처와 미팅을 했고 만족할 만한 성과를 쌓아나가고 있었다.

다만 '밤토끼'와 같은 대형사이트를 잡는다고 할 때 순조로웠던 국제공조가 밤토끼 검거 이후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국가적인 협력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웹툰 작가들에겐 갑갑한 상황이 이어졌다.

[2018년 11월] 리벤지 포르노 피해자 등과 공조하다

우리는 조금 더 다양한 집단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외에 거점을 두고 있어서 곤란한 건 우리만이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리벤지 포르노'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여성들이나 '불법 온라인 도박'으로 삶이 피폐해진 사람이 이에 해당했다. 

우리는 2018년 11월, 김한정 의원과 함께 불법웹툰문제 해결을 위한 국회 토론회를 열었다. 5월에 하기로 한 토론회가 사정상 취소된 후 11월에 열린 것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의 김한정 국회의원, 한국만화가협회, 한국웹툰작가협회, 웹툰협회가 국회에서 불법웹툰문제 대응책을 모색하기 위해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 웹툰도둑을잡아라, 국회토론회 장면 더불어민주당의 김한정 국회의원, 한국만화가협회, 한국웹툰작가협회, 웹툰협회가 국회에서 불법웹툰문제 대응책을 모색하기 위해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 미디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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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토론회에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이하 사감위)를 초대해 해외거점 사이버 범죄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그리고 토론회와는 별개로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를 방문해 그동안 한사성에서 진행한 활동 내용을 전해 들었다.

한사성은 활동 내용이 우리와 상당히 흡사했는데 성과는 우리보다 훨씬 좋았다. 이들은 국제 비정부기구(NGO)와 교류를 하고 미국 정부와 직접 소통했다. FBI와 국내 경찰의 공조 수사로 미국에 거점을 둔 수백 개의 포르노 사이트 운영자를 검거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우리가 배울 게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과정에서 '사이버 범죄'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와 관련 정책 그리고 국제 공조 전략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예를 들어 부다페스트 사이버 범죄 협약의 경우 전 세계 51개국이 참여하고 있는데 가입국들은 사이버 범죄 관련된 핫라인이 설치되고 수사 공조 과정이 단순화 된다. 이 외에도 다양한 국제공조 전략이 있었고 여성계나 경찰청, 저작권보호원은 다양한 전략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창과 방패의 지루하고 긴 전쟁은 아직 시작 단계

이쯤 되니 우리에게 해결 방법이 없다고 말했던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답이 없는 게 아니라 답을 찾을 의지가 없는 이들이었다. 어떤 측면에선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피해 당사자들만큼 강한 '의지'를 가지는 집단이 어디 있겠는가. 

밤토끼 운영자 검거 후 얼마 전에는 또 다른 불법웹툰 사이트인 어른아이닷컴의 운영자가 잡혔다. 하지만 여전히 인터넷에 불법 관련 검색을 하면 저 범죄자들은 빠른 속도로 정부의 대응을 피해 자신들만의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약간의 성과가 있었지만 창과 방패의 지루하고 긴 전쟁은 아직 시작 단계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불법웹툰문제만이 아니라 '사이버 범죄'의 맥락에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여성들, 불법도박문제 관계자들과 함께 또 다른 국회 토론회를 준비하고 있다. 웹툰 작가와 기업들의 생명권을 위협하는 범죄자들과 긴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조금은 실마리를 발견한 기분이다. 중요한 건 더 많은 사람과 더 자주 만나며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이다. 해답은 끊임없는 궁리와 모색 그리고 만남과 대화 속에 있었다.

태그:#밤토끼, #웹툰, #불법웹툰, #사이버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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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문화를 통한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습니다. 글로써 많은 교류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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