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미디어 그룹 '월트디즈니컴퍼니'는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에 힘을 쏟고 있다.

거대 미디어 그룹 '월트디즈니컴퍼니'는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에 힘을 쏟고 있다.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 <알라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89년 <인어공주>를 시작으로 1999년 <타잔>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들썩이게 한 애니메이션을 쏟아낸 이 시기는 '디즈니 르네상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시기에 내놓은 작품들 덕분에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이 보는 것'이란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 작품성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1992년 <알라딘>, 1994년 <라이온 킹>이 각각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섰다. 이 기간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OST가 아카데미 음악상에 여러 차례 이름을 남겼다. 1991년 발표한 <미녀와 야수>는 애니메이션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월트디즈니컴퍼니'가 지금 누리는 영광의 든든한 지지 기반이 된 시기다.
 
'마블스튜디오', '워너브러더스', '20세기폭스' 등 경쟁사를 인수해 집어삼키며 영화계에서 몸집을 불린 디즈니의 행보가 최근에도 눈에 띈다. 할리우드의 큰 손이 된 디즈니는 시선을 과거로 돌렸다. 디즈니는 애니메이션 실사화 작업 '디즈니 라이브 액션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디즈니는 실사화를 통해 원작의 팬과 아직 원작을 접하지 못한 세대를 아우를 요량이다. 이에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어설프게 손을 댔다가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에도 디즈니는 '디즈니 라이브 액션 프로젝트'를 강행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매출일 것이다. 디즈니가 공개한 지난 2018년 매출액 자료에 따르면 전체 매출 594억 달러(약 67조447억 원) 중 디즈니의 캐릭터, 라이센스 등을 담당하는 '컨슈머 프로덕트&인터랙티브 미디어'의 매출은 약 9%다.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이다. 과거 인기 캐릭터를 상업적으로 부활시켜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
 
물론 실사화 작업이 이뤄지는 게 오롯이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대대로 보수적이던 디즈니의 요즘 작품들은 진보적인 캐릭터와 메시지로 무장했다. 인종, 민족, 종교, 성에 따른 편견을 경계하는 태도인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작품에 수혈하고 있다. 사건과 남성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던 디즈니의 공주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고, '사이드 킥' 조연으로 만족하던 유색인종 캐릭터들은 주연으로 활약하는 중이다.
 
 영화 <알라딘>은 문제 소지가 있던 원작의 장면을 꼼꼼히 손봤다.

영화 <알라딘>은 문제 소지가 있던 원작의 장면을 꼼꼼히 손봤다.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한 이야기
 
<알라딘>도 이런 흐름에 궤를 같이한다. 원작의 배경, 줄거리, 수상 이력이 화려한 음악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원작이 발표된 1992년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회적 이슈를 꼼꼼히 따진 흔적이 보인다.
 
'화이트 워싱'을 경계한 캐스팅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장애인 비하로 지적되는 부분도 삭제했다. 예를 들어, 원작에서 자스민은 허락 없이 가게의 물건에 손을 대 상인에게 손목이 잘릴 위기에 처한다. 자스민을 변호하기 위해 알라딘은 자스민이 지적장애인이라고 설명한다. 지능이 모자라 어쩔 수 없었다는 뜻이다. 자스민도 그에 맞춰 장애인 행세를 하는 건 덤이다. 실사화에서는 이 장면을 없앴다. 대신 노래와 함께 추격신을 집어넣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역시 페미니즘이다. 영화 <알라딘>의 자스민은 스스로 술탄이 돼 나라를 통치하길 원하는 주도적인 여성이다. 원작에서는 법으로 정해진 남편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가출했지만, <알라딘>에서는 백성을 가까이서 지켜보기 위해 궁전을 빠져나온다.
 
자파가 권력을 차지했을 때 대응하는 태도도 극과 극이다. 원작의 자스민은 몰래 잠입한 알라딘을 돕기 위해 무희의 복장을 갖춰 입고, 자파에게 노골적인 섹스어필을 한다. 시선을 끌기 위한 키스도 서슴지 않는다.
 
<알라딘>은 원작의 미인계를 걷어내고 보다 능동적인 여성상을 보여줬다. 자스민이 원작에 없던 공주 전용 테마송 'Speechless'를 부르는 영화 후반부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줄곧 유지하던 작중 분위기와 상이해 약간 이질적인 느낌도 준다. 맥이 탁 풀린다. 하지만 디즈니는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위해 과감히 비용을 치렀다. "여자라는 이유로 더 이상 입 다물지 않겠다"는 자스민의 호소는 나오미 스콧의 폭발적인 가창력에 힘입어 마음을 울린다.
 
결말도 크게 달라졌다. 원작에서는 자스민의 아버지인 술탄이 알라딘과 자스민의 사랑을 인정하고, 법을 개정해 둘의 결혼을 허락한다. 결국 남성에 의해 꿈을 이루게 되는 셈이다. 반대로 <알라딘>의 자스민은 아그라바 최초의 여성 술탄이 된다. 그리고 '공주는 왕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법을 스스로 폐지하고 알라딘과 결혼한다. 성별에 상관없이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는 외침이다.
 
 기술의 발전을 느끼게 하는 화려한 효과가 돋보였다.

기술의 발전을 느끼게 하는 화려한 효과가 돋보였다.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눈과 귀가 즐거운 화려한 영화
 
상상의 세계는 애니메이션 고유의 영역이었다. 가령 배우의 연기력이나 감독의 연출이 아무리 좋아도 온갖 초능력을 사용하는 지니나 나르는 양탄자 등을 구현할 수 없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는 그만큼 뚜렷했다.
 
하지만 CG기술의 발전으로 실사 영화는 애니메이션의 영역에 한 발 내디뎠다. 지니가 자기소개를 하며 'Friend Like Me'를 부르는 장면이나 행진곡 'Prince ali'를 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선명하게 담아낸 화려한 색감과 특수효과로 만든 상상 속 세계가 눈을 즐겁게 한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발리우드풍 연출로 흥겨움을 유지하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수시로 음악과 화려한 군무를 활용해 액션과 로맨스, 코미디 등을 한데 버무렸다. 관객이 신나는 파티에 참석한 것처럼 들뜨게 한다.
 
OST는 큰 틀을 그대로 가져갔지만, 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손봤다. 오프닝을 장식한 'Arabian Nights'와 주인공 커플이 마음을 확인하는 'A Whole New World'는 원작에 충실했다. 가장 유명한 장면들이라 원작과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만 칼을 댈 부분에는 과감했다. 래퍼 출신인 윌 스미스의 강점을 살려 'Friend Like Me'를 힙합 스타일로 편곡했다. 알라딘의 OST는 가치를 인정받은 명곡이지만, 20여 년이 지나 다소 올드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제는 당당히 주류문화로 올라선 힙합 편곡으로 '힙'한 감성을 잡았다. 원작에 없던 'Speechless'를 후반부 중요한 장면에 집어넣은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큰 틀은 지키며 '할 때는 한다'는 걸 보여줬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을까, 캐릭터의 매력이나 설득력이 다소 아쉬웠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을까, 캐릭터의 매력이나 설득력이 다소 아쉬웠다.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설득력이 아쉬운 캐릭터들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진지함'이다. 가령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에서 제리가 톰의 뒤통수를 커다란 쇠망치로 가격했다고 치자. 깔깔, 관객의 웃음이 터진다. 폭력을 이용한 슬랩스틱은 <톰과 제리>의 주요 웃음 코드다.
 
하지만 만약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 영화였다면 이야기가 꽤 다르다. 현실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실제 배우가 제리처럼 행동한다면 그건 살인을 묘사하는 장면이 된다. 한순간에 장르가 바뀐다. 살점이 묻은 망치를 든 제리를 피해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제리의 익살스러운 미소가 섬뜩한 사이코패스의 미소로 바뀌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이다.
 
실사화를 하면 필연적으로 작품의 분위기도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애니메이션이라면 별 생각 없이 넘어갈 부분이라도 그렇다. 보여주는 모습이 현실의 재현이니, 현실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가벼움'은 애니메이션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어설프게 짜여진 캐릭터들은 실사화라는 무대에서 자기 자리를 잘 찾지 못한 느낌이다. '대선배' 로빈 윌리엄스의 존재감을 지워내고 지니를 새롭게 해석한 윌 스미스는 선전했지만, 주인공 알라딘은 사실상 자리를 빼앗겼다. 영화 이름이 <알라딘>인데 비중이 적어도 너무 적다. 제목을 <자스민>이나 <자스민과 지니>로 바꿔야 알맞을 듯한 느낌도 든다. 128분이란 한정된 상영 시간에서 자스민의 서사가 크게 늘었다. 이 과정에서 지니의 연애스토리와 자파의 과거도 보여줬다. 그 분량은 오롯이 알라딘의 몫에서 빠졌다.
 
그 와중에 알라딘의 묘사도 설득력이 다소 부족하다. 알라딘의 재기발랄함과 좀도둑임에도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걸 초반부 'One Jump Ahead' 시퀀스 하나에 크게 집중해서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알라딘이 '진흙 속의 보석'이라고 볼 만한 이유가 다소 부족하다. 관객은 알라딘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고, 자연히 알라딘의 행보를 고스란히 납득하기 힘들다.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알라딘의 연기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공들여 만든 신여성 자스민 캐릭터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다. 그가 왜 술탄이 되고 싶은지, 왜 되어야 하는지 나름대로 설명하려 하지만 공감하기 힘든 부분도 보인다. 예를 들어 굶고 있는 가난한 백성을 돕겠다며 마찬가지로 자신의 백성인 시장 상인의 빵을 훔치는 장면은 헛웃음이 나온다. 물건을 사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도 모르면서 정말 깊게 생각해 술탄이 되고 싶은 건지, 그리고 그걸 믿고 지도자 역할을 맡겨도 되는지 의구심이 든다.
 
과연 올바르게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고 있는 건지도 의문이다. 자스민이 술탄을 꿈꾸는 서사가 생기면서 알라딘의 작중 목표는 오직 공주와 결혼하는 것뿐이다.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결혼하는 게 목표인 원작의 자스민이 오버랩된다. 전형적인 디즈니 공주스토리에서 성별만 바뀐 듯하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남자주인공을 수동적인 '공주'로 바꿔버리는 게 과연 디즈니가 추구하는 '올바름'인지 묻고 싶다. 
 
가장 존재감이 없는 건 빌런인 자파다. 원작과 달리 순한 눈망울과 수려한 외모의 자파는 카리스마가 전혀 없다. 지니에게 부탁해 막강한 힘을 손에 넣었을 때조차 위압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많은 작품에서 악당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이는 이유는 그들이 인상적일수록 주인공이 이겨냈을 때의 쾌감이 크기 때문이다. 승부가 결정 난 게임은 재미가 없듯이 밋밋한 악당과의 싸움은 흥미를 끌지 못한다. 자파는 관객을 긴장시켜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디즈니의 실사 <알라딘>,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분명 아쉬운 점도 있지만, <알라딘>은 기본적으로 원작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 탈선하지는 않았다. 원작의 아성에 도전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전편을 뛰어넘는 속편'이란 평은 듣지 못 하겠지만, 최소한 실패하지 않을 '안전함'을 선택했다. 
 
알라딘보다 먼저 나온 디즈니 실사화 작품의 평가는 대체로 좋지 못했다. 가령 <덤보>는 변화를 택했지만 '원작 파괴'라는 평과 함께 이도 저도 아니게 됐다. 원작을 그대로 재현한 <미녀와 야수>의 경우 걸작인 원작에 미치지 못하는 평범한 영화라거나, 색다를 게 없어 지루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큰 틀을 유지하고 적당한 변화를 가미하는 '안전한' 전략은 향후 디즈니가 실사화 프로젝트에 자주 써먹을 듯 보인다.
 
디즈니가 마음 놓고 '안전한 실사화'를 시도할 수 있는 이유는 원작의 덕이 크다. <알라딘>의 도입부에 흐르는 'Arabian Nights'의 첫 소절부터 원작 팬의 가슴은 쿵쿵 뛰더니, 'A Whole New World'에 이르러서는 "그래, 이쯤이면 됐잖아?"라고 생각하게 된다.
 
추억이란 때론 강력한 무기가 되는 법이다. 디즈니가 '잘 드는 칼 들다가 제 손 베이는 일'이 없길 빈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 같이 올립니다.
알라딘 디즈니 실사화 영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